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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한 밤중의 의혹

음, 좀 생각해 볼께 2025. 6. 17. 01:39

온종일 흐리더니, 저녁부터 예고된 비가 조용히 내리기 시작했다. 자정이 지날 즈음엔 빗소리가 거세졌다. 오랜만에 창문 밖 세찬 빗소리가 정겨웠다. 쏴쏴 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다. 그런데 흐릿한 기억 속에 작은 의혹이 생겼다. 침대에서 몸을 뒤척일 때마다 의혹은 점점 커져갔고,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우산을 들고나섰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 집사람과 딸아이는 자고 있는지 기척이 없다. 아마 내가 나가는 기색을 알았다면, 무슨 일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게 뻔하다. 그래서 소리 죽여가며 살며시 빠져나왔다. 밖에는 아직 어두움 속에 비가 내리치고 있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인적이 드문 도로로 나왔다. 앞 유리창엔 '삐걱삐걱' 와이퍼가 빠르게 빗물을 걷어내고 있었지만, 전방을 향한 시야는 흐릿했다. 이따금 마주 오는 차량의 불빛이 앞 유리창 빗물에 산란되어 번쩍거렸다.

 

도착하자 차에 우산을 내버려 두고 재빨리 빗속을 통과해 문 앞으로 뛰어나갔다. 도어록에 비번을 입력하고 문을 당기며 들어섰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켜져 있을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에어컨은 꺼져있고, 창문은 잘 닫혀 있었다. 주말이라 이틀 연속 비어 있었을 상황이라 더 걱정이었는데, 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단단히 확인한 후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미친 듯이 뿌려대는 비를 피하려 서둘러 차 있는 곳으로 뛰어가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비 맞은 몸은 축축하고 서늘했다. "헛 걸음이었어! 괜히 이 늦은 밤에 비를 맞으며, 이게 무슨 짓이람!"

 

의혹이 해소된 편안한 마음 반, 괜히 나왔다는 자책 반, 묘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고 정지해 있었다. 그때 또 다른 의혹이 비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냥 무시할까, 괜찮겠지? 아니 다시 확인해 보아야 하나? 또다시 헛걸음을 하는 건 아닐까?' 무시하자니 마음이 불편해지고, 또다시 가자니 우습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한번 헛걸음을 했기에 더 망설여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돌려? 말어? 망설임 끝에 결국 차를 돌려 다시 빗 속을 달렸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문의 손잡이를 당기자, 쑥 문이 열렸다. 잠겨져 있어야 할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의혹은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조금 전 나서면서 비를 피하려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문을 잠그는 것을 깜박 잊었던 것이었다. 주말 동안 계속 문이 잠기지 않은 상태로 있었으면 어떡할 뻔했나 하고 생각하니,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문을 잠갔다. 그리고 한번 당겨 보았다. 잘 잠겨있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위의 마음은 아주 편했다. "그래, 오늘 밤 이 시간에 비를 뚫고 나온 보람이 있었어. 문을 잠그지 않았더라면 주말 내내 어쩔 뻔했어!"

 

다음 날 딸아이를 웃기려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랬더니 딸아이는 "아빠! 애초에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 아니야! 그런데 나간 게 무슨 보람이 있었다는 거야!" 하고 웃었다.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문을 열어 놓고 올 리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우리는 함께 크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리석은 짓을 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스스로 자책하면서 짜증을 내기보다는 이렇게라도 자신의 실수를 안주삼아 크게 웃을 수 있다면 이것이 더 낫지 않을까. 모든 일을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때로는 이미 일어난 일,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웃어넘기는 것이 더 즐거운 삶이 아닐까 한다.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소재를 잔뜩 가진 사람은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임을 명심하라... 웃음이야말로 요상한 것들에 대한 가장 현명하고 간편한 대답이거든... 앞으로 닥쳐올 일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무슨 일이 닥쳐오든 크게 웃어줄 테야." - 허먼 멜빌의 <모비딕>

 

멜빌에 의하면 난 짐작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