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 새물결 출판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생물들은 어떤 원리로 복원이 되었을까? 퀴비에가 그 대답을 해 준다.

 

조르주 퀴비에(1769~1832)는 라마르크(1744~1829)와 동시대를 살았던 박물학자이자 프랑스의 과학 행정가이었다. 퀴비에와 라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박물관의 멋진 수집품을 배열하는 방법을 수립하고 출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가 달랐던 것처럼 라마르크와 퀴비에도 서로 달랐다. 라마르크는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이었으며, 그의 생물철학은 자연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각 생물종은 영화의 한 순간 장면과 같은 것으로 다른 장면들 즉 다른 생물종과의 연속적인 흐름 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와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는 라마르크와는 달리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퀴비에는 생물종 사이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며,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각 생물종은 불연속군을 이룬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오늘날 자연사 박물관에 가보면 거대한 공룡의 골격을 볼 수 있다. 고생물의 화석을 발견할 때는 대부분 불완전한 모습으로 발견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완전한 형태의 공룡들을 다시 조립할 수 있는가? 어떨 땐 아주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수백개의 뼈들이 흐트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뼈들이 20종에 달하는 동물들의 뼈라면 어떨까? 하나 하나의 뼈에 대해 그것이 어떤 동물의 것이었는지를 정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여기에서 퀴비에의 분류학적 방법이 빛난다. 고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겉모습을 보고 분류하였지만, 퀴비에는 더 나아가 비교해부학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퀴비에는 커다란 업적이 바로 이 비교해부학에 있는 것이다. 부분들의 상호관계성 원리와 비교해부학의 결합은 불가능하게 보였던 그러한 조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물의 한 부분으로부터 그 동물 전체를 추정한다. 다시 말하면 유기체 내부의 형태들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각 생물은 종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독특한 폐쇄체계이고 어느 부분이나 서로 대응하며, 상호 작용을 통하여 공동으로 일정한 활동을 한다. 만약 어떤 동물의 내장이 신선한 고기만을 소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면 그 동물의 턱은 포획물을 잡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고, 그 발톱은 움켜쥐고 잡아 찢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 동물의 전 체계는 추적하고 포획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하에 고생물학이 수립되었다. 사멸된 종, 화석만이 남아 있는 그 생물들을 다시 복원하여 박물관에 멋있게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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