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2일 


제주 서귀포시 가온제이게스트하우스를 나와 제주 올레길 7코스로 출발한다. 

올레길 자체가 유명관광지라면 모를까, 유명한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비경들. 어떻게 보면 평범한 풍경도 비경이 될 수 있다





이바구길, 부산 초량 산복도로에 있다.

삶의 애환이 서리 서리 쌓여 있는 길에서는

풀어 놓지 못한 이바구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유치환 선생의 "행복"은 여기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에메랄드빛 바다와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카페에 앉으면 부산항 대교 너머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된, 유치환 선생이 보았음직한 하늘과 바다를 오롯이 볼 수 있다.

마음이 동하면 엽서을 띄울 수도 있다.

1년 후 자기 자신에게로.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쓰는 아가씨가 아름답다.

비록 오락가락하는 비로 에메랄드 빛 바다는

회색빛 하늘과 하나가 되어 있지만...

 

 

 

 

유치환 우체국을 떠나 스카이 웨이 공원을 걷는다.

빗 속에 싱그러운 풀 냄새가 콧 속으로 밀려든다.

 

 

 

부산역에서 산복도로까지 최단으로 오르는 길이 168계단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거쳐 갔을 길 한 쪽에는

주민들을 위한 모노레일이 오르락 내리락거린다.

하지만 모노레일은 정작 주민들보다는 관광객들 몫이다.

 

"이런 곳에 뭐 볼게 있다고 사람들이 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168계단 중국집 배달하는 아저씨가 툴툴거린다.

자신이 사는 곳의 아름다움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함께 가까이 있는 것은 어느새 생활 속에 스며들어,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나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이 되어 버린다.

한꺼풀 눈을 덮고 있던 비늘이 떨어지면

세상은 다시 보일텐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

오늘날의 삶은 또 다른 고단함을 준다.

하지만 옛 고단함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오늘날의 고단함은 절망속에 힐링을 기다리고 있다.

 

 

 

삶을 보는 또 다른 눈을 가지면

고단한 삶의 현장은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추억의 한 장이 된다

 

 

 


"아빠, 방탈출 카페에 가자?"
"가기 싫다. 안 간다."
"친구들이랑 방탈출 카페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아이들만 입장시켜주는 건 안 된대. 아빠가 같이 가야 돼."
"싫은데"
"같이 가 줘"
"좀 조르지 마라. 귀찮다."
"아빠아~"

옆에 있던 아내가 듣다 못해 한 마디 한다.

"방탈출 카페에 갔다가 갈맷길 데리고 가면 어때요?"

귀가 솔깃해진다. 아이들에게 길 걷는 기쁨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딸아이는 극구 함께 가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갈맷길 아빠와 함께 가면 생각해 볼게."

딸아이는 친구들에게 카톡을 보낸다.

"아빠, 애들이 다 갈맷길 따라 간대."

"좋아, 그러면 가자."


방탈출 카페는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KGB에 붙잡혀 수감된 스파이가 탈출한 흔적을 찾아 똑같은 방법대로 방을 탈출해야 했다. 1시간 안에 탈출하지 못하면 실패다. 우다섯 명 모두 탈출 비밀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는 갈맷길을 갈 차례다. 아이들과 39번 버스를 타고 송정까지 갔다. 송정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하나씩 먹고 다시 181번을 타고 대변으로 갔다.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계획에는 한치의 변경도 없다.


대변 척화비 앞에 섰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아이들에게 척화비 안내문을 읽어 주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했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에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쇄국 의지를 알리고 서양 오랑캐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대변에 있는 척화비는 일제 시대 부두 공사 때 바다에 버려졌던 것을 해방 후 인양하여 지금 대변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놓았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我戒萬年子孫(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아계만년자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하자고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에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 하노라."


아이들은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하다. 아이들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반드시 알아야 할 자신의 뿌리이며 민족혼을 일깨우는 스승일까? 아니면 아이들은 아직은 역사를 알기에 이른 나이일까?


아이들은 척화비에서 죽도공원으로 가는 길에 거대 해파리를 보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와~ 이렇게 큰 해파리는 처음 본다."

"이렇게 큰 해파리는 기장에서만 볼 수 있는 거야." 기장에서 나고 자란 한결이가 말한다.

아이들은 해파리의 독을 무서워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일회용 우산으로 해파리를 찔러보기도 하면서 신기해한다.


아이들은 움직이는 동물에 흥미가 많다. 하지만 식물과 풍경처럼 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진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발산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들에게는 정적인 것이 아직은 눈에 들어오지 않나 보다. 언제쯤이면 정적인 사물이 눈에 들어오는 걸까? 나는 어땠을까 돌아보니 꽤 나이가 든 후에야 그랬던 것 같다. 역시 아이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리라.



죽도 공원으로 들어갔다. 갈맷길을 면한 동해안에는 섬다운 섬이 없다. 대변항에 있는 죽도가 유일한 섬이다. 걸어서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놓여있어 죽도까지의 쉽게 들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섬은 사유지이다. 시온그룹이라는 종교단체의 소유로서 울타리와 철조망에 막혀 섬 중앙으로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이 섬을 개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소유자로부터의 반응이 없는 실정이다. 아쉽지만 우리는 갯바위를 밟고 아슬아슬하게 섬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죽도에 발을 들여놓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게 전부인 듯하다.

하루빨리 섬이 개방되기를 기원해 본다.  


섬 내부로 나 있는 커다란 대문 쪽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게 길이 있는 게 맞는지 의아할 정도로 좁은, 그냥 발 디딜 곳을 조심스럽게 찾아 밟고 지나야 만 할 그런 길 아닌 길(?)이었다. 물이 들어오면 사라질 그런 길, 아슬아슬 밟고 지나갈 수 있는 길, 설마 이 좁은 공간을 지나 섬을 한 바퀴 돌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길, 이 쪽으로는 거의 사람들이 발길을 돌리지 않을 길, 오직 호기심 많은 아이들 같은 성격의 사람들만이 무작정 가 볼 마음을 가질만한 길, 하지만 수심이 깊지 않아 위험하지는 않았다.


섬 둘레를 1/4 정도 돌 때까지는 발 디딜 데를 찾아야 했지만 그 뒤로는 비교적 너른 갯바위 위를 밟고 지날 수 있었다. 그러다 섬의 저쪽 끝에서는 드디어 길이 끊어졌다. 물이 빠지면 운동화를 적시지 않고 지날 수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발목까지 오는 물속을 덤벙덤벙 건너든지,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작은 돌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야 할 형편이다. 자칫 징검다리 돌이 삐끗하면 발이 물에 빠질 것을 감수해야 하는데, 아이들은 좀처럼 건너오려 하질 않는다. 다시 돌아가겠다고 우긴다. 중학교 1학년인 한결이만 나를 따라온다. '여자 애들은 못 온다 쳐도, 진서 이놈! 너라도 따라와야지.' 속이 부글거린다.


먼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쪽으로 나오니 낚시꾼들이 무리가 보인다. 그리고 저 먼 바다 쪽으로 파도를 막아 주는 방파제와 그 끝에 어김없이 우뚝 서 있는 등대가 보인다. 이 방파제는 상당히 넓은 공간을 안고 있다. 변항은 생각보다 훨씬 큰 항이었다.


동해안의 등대는 대변에 와서 절정을 이룬다. 2002년 월드컵 4강을 기념하는 월드컵 등대와 일명 마징가 등대 및 태권브이 등대라 불리는 장승등대가 죽도 앞바다에 우뚝하다.  


그리고 죽도와 오랑대공원 사이에 있는 닭벼슬 등대와 젖병등대. 이 다섯 등대는 제각각  다른 형상이다. 아이들 장난같은 모양의 등대 다섯이 한 눈에 보인다.


다음 행선지를 멀리 바라본다. 저 멀리 점점이 바닷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갯바위, 오랑대가 보인다. 어떻게 할까 순간적으로 갈등한다. 날씨가 무더운데, 빗방울도 떨어지는데, 아이들과 걷는 길을 여기서 마감할까? 어렵게 아이들과 함께 온 이 길인데, 어쩌지? 아이들의 마음속에 오늘의 갈맷길 걷기가 오랫동안 남으면 좋겠다. '고생한 만큼 기억에 남는다'는 상투적인 상식에 기대어 조금 더 걷자고 마음먹는다.


"애들아, 힘들지."

"예"

"오늘은 저기 보이는 오랑대까지 갈 거다. 조금만 더 가자."

"와 저렇게 멀리요."

"멀어 보이지만 걷다 보면 금방이다."

"..." 


이제 오랑대 공원 입구까지는 시원하게 뻗은 일직선 도로이다.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걷는다. 아마도 이 더운 날에 갈맷길 따라와서 고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갈맷길에 나서자고 하면 아이들이 또 따라나서려고 할까?


"다음에 또 따라 올래?"

"방탈출 카페에 가면 따라올 수 있겠어요."

"하하하"

"저도요."

"그냥은 안 따라올 거예요."


그래. 아이들은 방탈출 카페가 더 마음에 들었구나. 그리고 갈맷길 걷기가 죽도록 싫었던 것도 아니었구나.



오랑대란 이름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시랑 벼슬을 하던 다섯 명이 기장에 유배된 친구를 찾았다고 이렇게 불린다고 한다. 다음 행선지인 해동 용궁사 부근의 시랑대도 그렇게 해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오랑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용왕단을 배경으로 태양이 떠 오르는 풍경은 사진작가들이 좋아하는 장면이다.


오랑대 용왕단 아래에 삼면이 바위로 둘러싸인 조그만 공간은 거의 삼십 년 전의 기억을 일. 한번 와본 듯한 장소, 하지만 기억과 다소 차이가 있는 곳, 여기가 그때 그곳이라면 분명 저 공간 가운데 큰 바위가 하나 있어야 하는데... 기억에 남아 있는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한순간 되살아 나다니 놀랍기만 하다.


그때 동생이 하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행님은 손과 발이 완전 따로 움직이네."

개구리헤엄을 치던 나를 보고 하던 말이다.


한 여자애가 우리 보고 하던 말도 생각이 난다.

"아저씨, 제가 저 바위까지 헤엄쳐 가고 싶은데 혹시 제가 빠지면 구해줄 수 있나요?"

수영을 좀 하던 동생이 콧방귀를 뀐다.

결국 그 여학생은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기억의 메커니즘이 신기하기도 하다. 한순간의 인상이 잠자고 있던 기억을 일깨우다니. 그것도 큰 의미가 있는 기억도 아닌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 보면 오래 전에 잃어 버렸던 시간을 일깨워낸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기억은 잃어버렸던 것이 아니라 아주 깊은 구석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깊은 곳을 건드리는 찰나의 자극은 그 숨은 기억을 되살려 낸다.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두뇌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아니야. 그럴 순 없지. 허공에 흩어져 사라진 기억이 설마 하나도 없으려고.


갈맷길 1코스의 남은 길을 가면서 찾아볼 것이 하나 생겼다. 송정까지 해안길을 따라가면서 그 옛날 기억의 장소를 찾아보는 것. 혹 이 곳 오랑대가 기억 속의 그곳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그 바위는?



오늘의 갈맷길 걷기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아이들과 함께 걸었던 덕분에 정말 짧은 길을 걸었던 걸음이었다.

이따금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는 길이었지만 비 때문에 더위를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며 그 비를 맞고 걸었어도 좋았을 것을.


다음 갈맷길 기행은 오랑대공원에서 시작하여 해동 용궁사, 시랑대, 송정을 거쳐 해운대 달맞이 고개까지이다.





    우여곡절 끝에 임랑 삼거리에 도착했다. 버스가 떠나버린 빈 시골길에는 햇살이 가득하다. 저 건너 송림 위에도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낮엔 푸른 송림이 아름답고 밤엔 달빛 아래 은빛 파랑이 아름다운 임랑이다. 길가에 피어있는 노란 꽃 무더기 위에 흐드러진 햇살은 이미 자유다. 나는 자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10시 20분 드디어 임랑을 출발하여 갈맷길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임랑해수욕장을 나와 임랑교 옆에 있는 조그만 임랑마을 도시숲 공원을 통과하여 좌광천을 건넌 후 해안도로를 벗어나 바닷길 쪽으로 접어든다. 이제 내내 푸른 바다를 왼쪽 어깨에 두고 걸을 참이다. 차례로 문동리, 문중리, 칠암리, 신평리, 동백리, 이천리를 거쳐 일광까지는 계속 바다를 벗 삼아 걸을 것이다. 갈맷길 1코스에는 만나는 이 마을은 신평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포구를 끼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 마을이다.


    길을 떠나 만난 첫 마을 문동리는 조용한 어촌 마을이다. 마을과 바다 사이 너른 공터에 펼쳐 놓은 그물, 바다로 길게 뻗은 방파제, 그 방파제 끝에 있는 빨간 등대, 방파제에 설치된 하역작업용 소형 크레인, 여기저기 정박해 있는 선박들은, 인적이 드문 이 어촌 마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문동리에는 조선시대 공납미를 보관하던 '해창海倉'이 있었다. 지금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이 마을은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마치 마을의 담벼락 아래 시멘트를 뚫고 올라오는 질긴 잡초처럼 문동리는 질기게 그 생명력을 이어왔다.   


    갈맷길은 마을과 바다 사이에 있는 널찍한 시멘트 공터를 가로질러간다. 길이라기보다는 공터처럼 보이는 애매모호한 그 길은 그늘 하나 없는 회색 시멘트 길이다. 길 위로 사정없이 땡볕은 내리고, 바닥에서 퉁겨져 나온 허연 빛 속을 걷는 걸음은 곤혹스럽기도 하다. 바로 옆에 푸른 바다가 있음에도 뜨거움이 시원함을 압도한다.  


    포구 중간 부분에서 문중리와 문동리가 맞닿아 있다. 두 마을은 문동리 방파제와 문중리 방파제가 품은 잔잔한 바다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


     

    문중리를 지나자 칠암(七岩)리이다. '일곱 개의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서 칠암인 줄 알았다.  사실은 마을 앞바다에 '옻바위'라는 검은 바위가 있어서 칠암(漆岩)이라 불렀는데, 옻나무 칠(漆) 자를 쉬운 일곱 칠(七) 자로 바꾸어 오늘날 칠암(七岩)이 되었다.  

     

    칠암으로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모습은 칠암 앞바다에 떡 하니 가로 놓여있는 방파제였다. 육지에서 길게 뻗어나온 칠암 방파제에서 떨어져, 칠암 앞바다 한가운데 일자로 서 있는 방파제. 칠암은 깊숙한 포구는 아니지만 먼 바다의 파도를 막아 주는 이 일자형 방파제 때문에 그나마 아늑해 보인다. 


    갈맷길 1코스에는 등대가 부지기수이다. 들리는 포구마다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처럼 서 있는 등대, 등대, 등대.그중 칠암에는 등대가 세 개나 있다. 칠암 부근의 문중 등대와 신평 등대까지 합하면 다섯 개의 등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칠암이다. 더구나 칠암의 등대는 예사 등대와는 다른 모양으로 시선을 끈다. 붕장어(아나고)가 서로 얽혀 위로 향하는 듯한 형상의 노란 붕장어 등대, 떠 오르는 붉은 태양과 갈매기를 형상화한 빨간 갈매기 등대, 야구 배트와 글러브 모양으로 2010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우승을 기념하는 하얀 야구등대. 칠암에는 등대 여행을 와도 좋을 그런 곳이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문동리와 문중리에 비해 칠암은 단연 활기가 돈다. 건어물을 파는 상인들의 파라솔이 어지럽고, 다른 쪽 횟집거리는 시끌벅적하다. 칠암에는 붕장어 회를 먹으러 온 손님들과 등대 구경을 온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칠암은 사람 사는 냄새가 왁자지껄하다. 



    문동에서 칠암까지의 길은 포구를 따라 걷는 길이다. 그리고 멀리 일자로 뻗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잔잔한 바다의 모습은 단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에서도 변화가 있다. 눈여겨보면 바닷물 빛이 미세하게 달라진다. 바다의 깊고 얕음에 따라 바다의 색은 짙고 옅어진다. 또한 바다는 하늘의 색깔을 반영한다. 하늘이 찌푸리면 바다도 찌푸리고 하늘이 맑으면 바다도 맑아진다. 



    길가로 나 있는 방파제 위로 올라서면 거대한 바다는 끊임없이 일렁인다. 바다는 쉬지 않는다. 가볍게 찰랑거리는 물결은 얕은 물속 모래 바닥이나 자갈 위에 물결 그림자를 만들어 낸다. 물이 맑을수록 그림자의 무늬는 맑아진다. 바다는 언제나 그렇듯이 일렁이며 생동하고 있다. 



    칠암을 지나 신평리이다. 계속 포구를 따라 걸어온 길은 신평리에서 다른 모습을 갖는다. 손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해안이다. 아이들은 얕은 자갈밭에서 물놀이도 하고 바위틈에서 게도 잡으면서 놀고, 어른들은 낚싯대를 드리운다. 신평소 공원이 아름다운 해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해안도로 저쪽에는 바다와 신평소 공원을 내려다보는 곳에 카페가 두서넛 들어서 있다. 


    울산 출신의 소설가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은 기장 일광면 학리를 배경으로 쓰인 소설이다. 거친 바다는 어부들을 삼키고, 갯마을에는 남편을 잃은 과부들이 모여 산다. 그네들은 남편을 앗아간 바다를 떠나지 않고 바다를 삶의 터전 삼아 살아간다. 갯마을 과부들의 애환이 담긴 '갯마을'은 영화로도 연출되었다. 영화 '갯마을'의 주요 촬영 무대는 일광면 이천리이다. 하지만 '해순'이와 '상수'의 밀회 장면은 이 신평소의 아름다운 해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걷기 시작한 지 거의 2시간이 흘렀다. 이제 길은 신평리를 뒤로 하고 동백리로 들어선다. 육지로 오목하게 들어앉은 포구는 아담한 동백항이다. 바다에서 동백항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어김없이 등대가 서 있다.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의 등대는 언제나 왼쪽에는 빨간색, 오른쪽에는 하얀색 등대가 뱃길을 안내한다. 밤이 되면 빨간 등대는 빨강 빛을 비추며 오른쪽은 위험하니 왼쪽으로 입항하라고 신호를 준다. 하얀 등대는 녹색 빛을 비추는데, 왼쪽에 암초가 있으니 안전한 오른쪽으로 입항하라는 뜻이다.  



    동백리에 있는 부경대 수산과학 연구소. 예전에 일여 년간 기장에서 살 때 여러 번 이 연구소 앞을 지나다녔다. 아니 그때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 부경대 수산과학 연구소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은 이 길을 걸으면서 처음 알았다. 수산과학 연구소 둘레를 도는 이차선 도로가 있다는 사실과 그 도로 아래 바닷가에는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는 또 다른 작은 시멘트 길이 있다는 사실도, 수산과학 연구소를 지나 온정마을이라는 곳에 바다를 바라보는 카페와 펜션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차를 버리고 걸어가는 길에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나타난다. 내 발바닥이 닿은 땅은 이제 나의 인식의 테두리 안으로 걸어 들어와서는 나의 세계의 일부가 된다. 내가 밟은 땅을 구석구석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는 이 느낌은 마음 한 구석을 뿌듯하게 한다. 천천히 걷는 길은 햇볕을 보지 않은 뽀얀 속살이 드러난 길이다.  



    온정마을을 지나 이제 갈맷길은 1코스 1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간다. 자갈밭을 가로지르는 길. 차를 타고 이 해안이 내려다 보이는 해안도로를 지날 때마다 송림 사이로 보이는 이 해변은 마치 주문을 걸어 마법을 걸려는 마법사와 같았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철 그 길을 지날 때는 당장이라도 수경을 끼고 물속으로 들어가 바닷속 비경을 보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지만 그때마다 난 간신히 그 마법에서 빠져나가곤 했었다. 


    이 해변을 이제야 두 발로 걷는다. 한가로운 일요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이 해변을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때문일까? 물이 생각만큼 맑지 않다.  




    자갈밭 위를 걷는 발걸음이 피곤해진다. 푹신한 모래사장처럼 발을 붙잡는 곳이 있는가 하면 자갈 위에서 삐끗해지지 않으려는 발목에 힘을 주는 통에 피로해진다. 자갈길을 버리고 해안도로로 올라가 데크길을 걸으며 송림 사이로 바다와 해변을 보며 걷는다. 여전히 매력적인 해변이다.

       


    이동항이다. 이천리 동쪽에 있어서 이동이라고 하는 이동마을은 기장 미역 특구이다. 부두 바닥에는 미역 말리는 손길이 분주하다. 문동리와 문중리의 텅 빈 부두보다 사람 사는 냄새도 바다 냄새도 더 하다. 손님들로 북적이는 칠암과도 다른 느낌의 이동항이다.



    갈맷길 1코스 중에서 가장 특이한 길은 이동항을 지난 후에 나타난다. 한국유리공업 부산공장을 둘러가는 길이다. 이 길 특이하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인 듯 키높이의 수북한 잡초에 가려 보이지 않는 길, 다만 한국유리공업 부산공장의 담벼락에 달린 파랑 분홍 갈맷길 리본만이 이 곳이 갈맷길임을 알리는 표지이다. 이 리본이 없으면 길인지 아닌지 당황스러운 길이다. 도로에서 이 곳 해변을 오려면 한참이나 걸어와야 하기에 여기는 참 여유로운 해변이다. 북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한가히 한 때를 보낼 수 있는 해변이 이곳이다.  



    소설 "갯마을"은 원래 일광면 학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 "갯마을"은 그 무대가 학리와 인접한 "이천리'이다. 이천리 해변에서 보이는 일광 앞바다 너머 학리의 풍경은 영화를 만든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다. 다만 영화에서 보던 예스러운 돌담 초가 어촌 마을은 찾을 길 없고, 지금은 현대식 양옥집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사람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는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그 모습이다.


    <영화 '갯마을'> https://youtu.be/BwbQgeavk-Y


    2시 30분에 가까워진다. 점심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아침에 임랑으로 가는 버스에서 본 열무 국숫집을 찾아간다. 길게 늘어선 줄의 의미를 놓칠 수는 없다. 마을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에 인접한 그 가게를 찾았다. 어라? 아직도 줄을 서 있다. 순간 기대감은 더 커진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선다. 주인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다. "4시에 다시 영업 시작합니다."  이런 이런 이런... 안내문을 보니 2시 30분부터 4시까지 재료를 다시 준비하고 4시에 다시 시작한다고. 시계를 보니 2시 32분이다. 


    일광천을 따라 강송정 공원 옆을 지나 일광 해수욕장으로 들어서서도 두리번거리며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일광해수욕장을 나와 기장 군청으로 향한 도로가로 나서니 열무 국수 식당이 눈에 띈다. 저기서라도 열 국수를 먹어야겠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좋다. 시원하게 열무 국수 한 그릇을 비우니 기분이 좋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시원하게 뻗은 기장 대로를 따라 땡볕 속을 걷는다. 삼사십 분을 걸었을까? 오후 4시에 목표점 기장 군청에 도착한다. 11시 20분에 임랑을 출발했으니 4시간 40분이 걸렸다. 갈맷길 1코스 1구간. 다리는 뻐근하고 몸은 다소 피로하다. 하지만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몸을 감싼다.



    갈맷길 1코스 1구간은 바다와 어항과 등대가 함께 하는 길로 정의해 본다. 아름다운 길도 있었고, 평범한 길도 있었고, 당황스러운 길도 있었다. 해안도로, 포구길, 시멘트길, 자갈길, 나무 데크길, 오솔길을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머릿속을 오가던 수많은 생각들은 사라지고, 다만 몸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절로 앞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간다. 길이 험하고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무념무상의 경지가 가까울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길 위에 떨어진 수많은 생각들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다.


    다음 달 말에는 기장군청에서 죽성, 대변, 시랑대, 해동용궁사, 송정, 달맞이길을 걸을 것이다.


    다산초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완만하지만은 않은 오르막길은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흙속에 덮여 있어야 할 나무뿌리가 얽기설기 얽혀 기괴하게 표면에 다 드러나 있다. 뿌리를 계단 삼아 힘들게 올라갔다. 문득 다산 선 이 뿌리 길을 라가면서 무슨 각을 을까? 

    자신의 꼬인 인생 한탄했을까? 아니면 ' 이상 잃을 것은 없다. 다시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까?


    <뿌리길 - 출처: 전라남도 SNS 통합사이트>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여행을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자리에서 다산선생이 체취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단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편액에서만 희미하게 다산의 흔적을 느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었다.


    다산의 흔적을 진하게 느끼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의 기대가 어긋난 때문이었을까?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을 보 '다산초당이 아니라 다산와당이었어?'하는 생각? 다산선생의 영정을 보고 왠 안경? 고독하고 적막해야 할 유배지에 이런 북적임이란? 기대와는 다른 이질감 다산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산의 삶을 느끼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지였다.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뭔가 실마리가 있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은 그의 삶을 상상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적어도 다산 4경은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들,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말이다.  



    18년간의 오랜 유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다산. 10년간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을 다산초당을 떠나려다 문득 돌아서서 망치와 정을 가지고 초당 뒤 바위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 자신의 성을 바위에 새긴다. 다산초당의 제1경 '정석丁石'이다. 선생이 그 글을 새길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석을 새기고 난 뒤에도 한참을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가다 멈춰서서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나는 다산초당 방문을 되돌아보는 지금에야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정석>


    다산초당의 제2경과 제3경은 약천藥泉과 다조茶竈이다. 초당 주위를 살펴보던 선생 초당 뒤에서 물기가 축축이 새어나오는 곳을 보게 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이곳을 헤집어 본다.  그랬더니 바위들이 드러나고 그 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선생은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그 물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이 물과 차는 유배생활로 초췌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샘을 '약천藥泉'이라 한다. 또한 초당 앞 뜰에는 널찍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선생은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이 바위 위에서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이 바위가  다조茶竈이다   


    <약천>


    <다조>


    선생을 이야기하자면 차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선생에게는 '사암'이라는 호가 있다. 하지만 '다산'이라는 호가 더 널리 알려져 사용된다. 선생이 생활을 하던 초당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덕산을 '차가 많이 나는 산'이라는 뜻의 '다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생이 기거하던 초당도 그래서 다산초당이라 불렸고, 선생도 역시 '다산'이란 호를 얻게 되었다.  


    선생과 6년간 절친한 벗이었던 백련사의 혜장선사도 차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혜장이 보내준 차는 선생의 건강과 마음을 다스리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억울하게 유배되어 온 선생, 큰 형 약전은 흑산도, 자신은 이 곳 강진에 유배되고, 작은 형 약종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목숨을 다. 이렇게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통에 그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얼마나 컸을까? 게다가 열악한 유배생활은 선생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선생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준 것이 바로 차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러 거의 절멸 상태에 있었던 차문화는 다산과 초의선사를 거쳐 추사에 의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산은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 돌이켜 보니 다산초당의 선생의 흔적들은 실은 차향의 흔적이 었음을 깨닫는다. 다산 선생과 차는 뿌리길의 뿌리들처럼 깊이 얽혀 있  선생 산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다산초당의 제 4경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풀이하면 '연꽃이 핀 연못에 돌로 만든 산'이란 뜻이다. 다산초당 인근은 물이 많은 지역이다. 차나무도 습하고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데, 바로 다산이 그러한 곳이었다. 다산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선생은 연못을 조금 더 크게 만들고 연못 중앙에 돌을 쌓아 작은 산을 조성하였다.


    <연지석가산>


    초당에서 연못 쪽으로는 '관어제觀魚齊'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문이 있다. 선생은 글을 읽거나 쓰다가 피로해질 때면 이 문을 열고 연지석가산을 보기도 하고, 연못 속을 노니는 잉어도 쳐다보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좁은 연못을 헤엄치고 있는 잉어를 보면서 자신도 그 잉어와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산초당을 방문했다면 이렇듯 다산이 남긴 흔적들에 묻어나는 다산의 삶의 향기를 느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을 살아남은 실마리의 꼬리를 잡고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산의 삶을 그려보는 시간여행을 했어야 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홍준 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 장소를 답사할 때 기억해야 할 가장 기본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정이었기에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산초당의 방문을 계기로 뒤늦게라도 선생의 삶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아쉬움을 달래 본다.   


    다산초 4경외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다산초당의 편액이다. 언제인가 이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것임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추사의 글씨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 글씨는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자꾸 들여다보니 정이 가는 글씨이다. 각 글자는 모두 다른 필체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어우러진 조화는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다산과 추사가 한 시대를 살았다는 우연과 다산과 추사의 인연이 만들어낸 다산의 흔적이 바로 '다산초당' 편액이 아닐까?


    이 우연은 다산동암의 편액에서 또다시 조우한다. 다산동암의 편액은 다산선생의 글씨이다. 다산과 추사의 글씨는 이렇게 나란히 서로 만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산동암을 지나다산초당의 백미 백련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 길과는 달리 이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다. 숲의 향기에 취해 40여분을 걸어 800여 미터를 가면 고갯마루를 넘어 백련사에 도착한다. 선생은 혜장을 만나러 이 길을 무던히도 걸었을 것이다. 혜장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함께 이야기하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는 길도 선생의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동백꽃 가득한 봄날의 숲, 동백꽃 떨어지고 초록의 향연이 짙어지는 늦봄의  숲, 매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대는 한 여름의 숲, 모든 잎들이 꽃이 되는 가을의 숲,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늦가을의 숲, 눈 덮힌 겨울의 숲, 선생은 이 숲 사이로 난 백련사 가는 길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밤에는 부드러운 달빛을 초롱 삼아 달그림자 밟으며 길을 걸었을 것이다. 때로는 혜장이 이 길을 거슬러 선생을 찾았을 것이다. 선생은 혹 밤늦게라도 자신을 찾아 올 혜장을 위해 평소에도 문걸이를 걸지 않았다. 다산보다 14살이 어린 혜장이 초당을 찾아, "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부르며 들어섰을 때, 다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혜장을 맞이 했을 것이며,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다조에서 차를 끓이고,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차향과 맛을 음미하며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찾는 이 드문 외로운 유배지에서 선생의 마음에 위로가 된 것은 백련사 가는 길로 이어진 혜장과의 사귐이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서야 다산초당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을 찾아 선생의 삶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아 무상한 세월이여, 선생은 가고 없고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난 그 향기를 좇아 나대로의 방식으로 선생의 삶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우연한 만남이 때로는 오랫동안 기억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5월의 황금연휴 이틀째 오후, 우리는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전날 보성 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만났다. 그는 전 날에는 벌교와 보성을 갔었고, 우리를 만난 날 오전에는 순천 낙안읍성에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성녹차밭을 가보란다. 아내도 무척 보성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아내의 바람을 외면할 수만은 없어 예정에도 없던 보성을 여행하기로 한다. 아름다운 순천만 국가정원은 다시 한 번 더 와 봐야 할 명소의 목록에 올려놓고는 아쉬움을 달래며 보성으로 달린다. 내게는 보성 가는 길이 미답의 길이다. 하지만 보성녹차밭 정경을 담은 사진을 여러 번 보았던지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은 그다지 하지 않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미세먼지로 뿌옇다. 5월의 푸른 하늘 찍힌 짙푸른 산등성이를 보고 싶었지만, 몸살처럼 성가신 미세먼로 먼 풍경은 마치 선잠을 깬 눈에 비치는 모습처럼 흐릿하다. 참 성가신 일이다.


    늦게 순천만 국가정원을 출발한 대가로 보성에는 해거름 녘에 도착한다. 높은 나무 그림자가 땅에 길게 깔리고, 주위의 공기에는 서늘함이 감돈다. 녹차밭 폐장 시간까지는 삼십여 분만이 남아 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것도 한 순간이다. 장대비처럼 곧두박질치고 있는 삼나무 울창한 숲, 안개가 자욱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 이 순간 주위에 가득한 자욱한 안개는 저항할 수 없는 손짓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대한다원 녹차밭으로 향하는 오솔길 좌우에 쭉쭉 뻗은 삼나무가 안개 속에 도열해 있다. 당당하게 다원을 지키고 있는 울창한 삼나무 숲이 압도적이다. 안개가 불러일으키는 아득함과 신비스러움이 그 당당함에 더 힘을 실어준다. 짙은 안개가 깊은 숲 속에서 고여 물이 되어 흐르는 듯한 아주 작은 시냇물이 안개에 젖은 숲 사이를 흐른다. 짙은 안개로 숲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그만큼 숲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안개가 자욱한 분위기는 미세먼지가 일으키는 성가심과는 딴 판이다.  


    전혀 예상 밖의 풍경이다. 이전에 보아왔던 사진 속의 풍경을 기대하던 무의식적인 선입견과 예상은 다원의 입구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린다. 오히려 생각도 못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진 고랑, 정원사의 손길을 탄 정원처럼 가지런히 정돈된 푸른 녹차밭, 사진 속에서 보던 그런 녹차밭이 여전히 저 숲 너머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잡지 못했던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가 마음속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숲의 요정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나는 넋을 잃고 시커멓게 하늘을 치찌르는 삼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습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보성의 기후조건은 차나무를 재배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보성군은 협소한 해안지역과 보성강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지로 되어 있으며 연이어져 있는 산들로 산세가 수려하고 웅장하다. 보성의 남쪽으로는 보성만이 자리 잡고 있고, 보성군의 서쪽에서 발원한 보성강은 보성군의 북쪽을 감싸 안듯이 흘러 섬진강과 합류한다. 또한 산지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천들이 이 지역을 적시며 흐른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큰 기후로 이어져 보성은 차나무가 잘 자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심한 기후 조건으로 보성차밭의 두 개의 얼굴을 갖게 된다. 한 낮의 얼굴과 아침저녁나절의 얼굴이 사뭇 다르다. 보성은 아침저녁나절에 안개가 자주 낀다. 이른 아침 보성은 깊은 안개 속에서 잠을 깬다. 잠 기운이 사라지면서 꿈결 같은 안개는 어둠과 함께 차츰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면 안개는 어둠과 함께 숲 속 다원으로 찾아든다.


     


    안개 자욱한 삼나무 숲을 지나 드디어 녹차밭과 마주한다. 안개가 내려앉은 녹차밭은 하얀 어스름 속에,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처럼 다소곳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고아함은 안개 자욱한 속에서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안개 낀 다원의 풍경은 여백이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폐장시간이 가까운 다원은 인적조차 드물어 아주 깊은 산 속인 양 고요하고,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풍경은 하얀 여백이 되어 몽환적인 풍경을 이룬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복숭아꽃 핀 마을인 몽유도원에 비할바는 못되겠지만 몽유 다원이라고는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 낮의 다원은 싱그러운 푸르름을 뿜어낼 것이다. 찻잎을 따는 일꾼들이 다니는 길이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뚜렷한 밭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낼 것이다. 대기 중에 가득 찬 녹차 기운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여행으로 피로해진 발걸음은 녹차밭을 산책하는 동안 어느새 가벼워질 것이다. 아직 한 낮의 다원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한 낮의 얼굴도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성의 속살은 안개 속에 잠긴 모습이 아닐까? 아무에게나 보여주지는 않는 민 낯의 보성이 바로 이 모습일 것이다. 그 날 나는 안개 자욱한 다원을 신선처럼 거닐었다. 걸음에 지친 다리는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예상외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애초부터 땅끝마을에 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언제부터인지는 희미해도 마음 한 구석 저 깊은 안쪽에는 늘 땅끝마을이 작은 소망처럼 자리 잡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 땅끝마을 여행은 순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미답의 땅인 보성을 밟아보고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여기까지 온 김에 갈 때까지 가보자는 묘한 만용이 생긴 것일까? 율포에서 일박한 후 땅끝까지 가보자고 합의를 보았다.


    가는 길에 월출산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가우도 출렁다리를 먼저 찾았다. 유홍준 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무위사를 "한 여름에 낮잠 자다 깬 아이가 엄마 찾아 우는 절"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무위사의 유명세에 비해 볼 때, 그리고 석탄일을 일주일 앞둔 때였음에도, 무위사는 한참이나 인적이 드문 한적한 사찰이었다. 그 고적한 분위기는 한 여름 뜨거운 열기를 피해 기와지붕 아래 그늘진 마루에서 맛있게 낮잠을 자던 아이가 사방의 고요함에 문득 잠이 깨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울며 엄마를 찾을 법한 그런 분위기였다.   


    무위사를 말하자면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을 빼놓을 수 없다. 맞배지붕에 주심포 형식의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는 오래된 건물이다.

    나무의 결과 색을 그대로 살린 기둥이 첫 보기에는 허름하고 낡아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세월의 묵직한 힘이다



    극락보전 앞 널찍한 마당에 고적함이 감돈다. 극락보전 마당 건너편의 아름드리 고목나무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 극락보전과 마주하고 있었을까? 이 건물이 세종 때 지어졌다는데, 그때 심긴 나무일까? 움직이지는 못해도 한 자리에서 고스란히 그 역사를 지켜보았으리라. 그 시간의 깊이가 나이테로 쌓여 아름드리나무가 되었지만, 말이 없이 다만 어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으로 시간의 묵직함을 전한다.  


    나무 그늘 아래 마루에 앉아 오월의 햇볕이 눈 부신 너른 마당 건너편의 극락보전을 한참 동안 무심히 바라본다.

    어둠에 익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세월의 이끼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는데도 그런가 보다. 정신이 나른하게 고즈넉함에 젖어갈 무렵 시간을 거슬러 우뚝 서 있는 이 건축물이 보인다. 기둥을 붉은색으로 칠한 다른 건물들과 극락보전과의 거리는 공간 속의 거리가 아니라 시간 속의 거리임을 깨닫는다. 새 것이 옛 것보다 나을 것이란 보펀적인 생각은 때로는 무참히 깨어진다. 

     

    극락보전이 지니고 있는 소박미는 맞배지붕과 주심포 형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일반적으로 대갓집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팔작지붕은 기와지붕이 전후로만이 아니라 좌우로도 날개를 폈듯 처마를 드리운다. 하지만 극락보전의 맞배지붕은 기와지붕이 용마루로부터 건물의 앞 뒤로만 펼쳐져 내린다. 기와지붕의 여러 형태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또한 주심포 형식은 지붕을 떠 받히는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건축 양식이다. 극락보전의 네 개의 기둥을 보면 그 위에 장식 모양의 '공포'가 놓여져 있다. 이와 같은 공포가 기둥 위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건축 형식이 '다심포'형식이다. 주심포 형식은 다심포 형식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다만 단순해 보인다.  



    맞배지붕을 한 극락보전, 정면의 기와 지붕과 후면의 기와지붕이 가장 높은 중앙 용마루에서 만나 서로 배를 마주 대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보자고 이 곳에 들린 것일까? 역시 무위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고즈넉히 서 있는 극락보전을 보면서 찬란한 오월의 나른함을 느낄 뿐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무위사를 방문하는 것은 실망만 안겨 줄 뿐이지만, 무위사는 오랫동안 기억속에 남을 그런 곳이 될 것이다.   

    무위사를 방문하면 반드시 그 고즈넉함과 극락보전이 아울러 내는 느낌을 놓치지 말기를...


    다음 행선지는 다산초당이다. 정약용 선생은 18년 유배생활 동안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다산 초당은 땅끝까지 가는 길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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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뿌옇게 흐리다. 가는 비를 뿌릴만한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더라도 아주 가는 비일 것이다. 창 너머 아래를 내다본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듬성 듬성 보인다. 괴어있는 물 표면에 가느다란 비의 흔적이 흔들린다. 가는 빗방울이 듣고 있다. 맞아도 될 비지만 어쨌든  우산을 들고 나섰다. 대연수목전시원으로 나선 길이다.


    요즈음 손에 책이 잡히질 않는다. 김훈씨의 <라면을 끓이며>를 살 때 가득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자전거 여행>을 읽을 때의 감동과 찬탄은 허물어져 버렸다. 새로운 문장을 써 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더구나 새로운 생각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 김훈씨의 글과 생각은 그냥 제자리에 멈추어 선 듯하다. 최소한 <라면을 끓이며>라는 수필집은 그렇게 보인다.


    책을 읽지 않으면 집안에서 별달리 할 일이 없다. 나가야 한다.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 그렇다면 수목원으로 가자.주위에 있는, 산에 있는 초목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먼저 그들 존재의 모습을 익혀 개별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개별 이름을 익혀야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나무'라는 명사가 없다고 한다. 각 나무는 고유의 이름으로 불릴 뿐 그 전체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않는다. 초목은 인디언들에게 이름으로 불러주어야만 할 존재였다. 단지 뭉뚱거려 하나로 취급하지 않았다. 숲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겐 초목 하나 하나가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다른 존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는 서로 구별시켜 주는 이름을 지녀야만 한다. 


    나도 초목들의 이름을 알고 싶다. 개별적으로 그들을 알고 싶다. 다만 나무들, 꽃들, 초목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사실 출근하는 길은 걸어서 15분 길이다. 나는 걸어가면서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길가에 있는 꽃들과 수목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는지 검산해 본다. 철쭉, 영산홍, 산수유, 매화, 동백, 느티나무, 벚나무, 목련나무, 튤립나무, 장미, 선주목, 채송화, 남천나무, 천리향, 붉은괭이밥... 이 정도면 길가의 초목은 다 아는 것이라 자처했었다. 그러나 천만에... 


    봄이 오는 길에 가장 먼저 동백꽃이 피고 차례로 매화와 산수유가 피었다 진다. 그리고 목련꽃이 핀다. 목련꽃 질 무렵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핀다. 하루새 벚꽃이 바람에 지고 나면 노란 개나리꽃은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 속으로 사라진다. 가지를 붙들고 놓지 않는 늙은 동백꽃이 햇빛에 바래어갈 때 철쭉과 영산홍이 짙은 분홍색과 진홍색으로 핀다. 이렇게 꽃으로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던 초목들은 나의 눈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이다. 언젠가부터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알지 못하는 초목들이 꽃이 피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초목들이다. 더구나 산에 가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나무가 저 나무같고, 저 나무가 이 나무같다. 풀 속에 숨어서 핀 야생초며, 아주 작은 꽃을 피운 야생초며, 도무지 그 이름을 불러 줄 수가 없다. 불러주고 싶은 이름들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수목원에 가서 나무들이나 꽃들의 이름을 알아 보자고 나섰다. 


    대연수목전시원은 평화공원, 그리고 UN기념공원과 붙어 있다. 수목원 한 쪽 끝에서 저 쪽 끝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잎과 기둥을 살펴보고 그 이름을 읽어본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모습만 보고서는 구별할 수 없는 초목들을 다시 한 번 보고 이름을 불러본다. 다시 저 쪽 끝에서 이 쪽 끝으로 걸어오면서 다시 이름을 맞추어 본다. 피나무,먼나무, 팽나무, 닥나무, 사시나무, 오리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보리수나무, 올리브나무, 서어나무, 아왜나무, 동백나무, 이팝나무, 조팝나무, 튤립나무, 서어나무, 사과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 비파나무, 금목서, 치자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산시나무, 후박나무, 벚나무, 자목련, 리기다소나무, 해송, 잣나무, 편백나무, 꽝꽝나무, 수국, 해당화, 영산홍, 철쭉, 황매나무, 겹황매나무, 무궁화, 라벤더, 로즈마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목들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 보다 좋은 산책 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 잎새를 보고, 줄기를 보고, 꽃을 보면서, 이름을 맞추어 보고, 이름을 불러보고, 참 좋은 산책길이 될 듯하다. 얼마나 걸으면 이 수목원에 있는 모든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될까? 궁금해 진다. 그리 큰 수목원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그렇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더 큰 수목원으로 옮겨볼까? 화명수목원이 넓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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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 2일 토요일(둘째날) 오전 일정

    풀향기펜션 출발 -> 비자림로 -> 산굼부리 -> 녹산로 -> 유채꽃프라자


    오늘 날씨가 참 맑다. 일요일에는 비소식이 있다. 그럼 오늘이 녹산로 가기에는 최고의 날이 아닌가? 

    4월초 유채꽃과 벚꽃이 만발한 이 때, 정말 때를 잘 맞추어 왔다. 

    내일이면 늦다. 수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난타를 견딜 수 있는 꽃잎이 아니다. 

    유채꽃과 벚꽃이 어우러진 녹산로(세화녹산장선도로)가 부른다. 하하하.


    어제 렌터카 사장님도 꼭 가봐야 할 곳으로 추천해 주셨다. 

    "세화녹산장선도로를 꼭 가보세요. 노란 유채꽃길이 12킬로미터나 계속되요."

    그렇지. 노란 유채꽃과 분홍 벚나무가 함께 하는 길은 이미 내 목록에 올라 있지.


    아직 우리 일행은 녹산로를 잘 모른다. 막바로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로 가자고 제안한다.

    유채꽃은 섭지코지에도 잘 조성되어 있으니

    굳이 녹산로에서 유채꽃을 볼 이유가 없다고 한다.

    나는 이례적으로 딱 잘라 말한다. "안됩니다. 녹산로에 먼저 들러야 합니다."

    "정석비행장으로 갑시다."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조금은 조마조마한 마음이다.


    녹산로에 가기 전에 비자림로를 거쳐간다.

    비자림로도 녹산로 못지 않게 아름다운 길이다. 비올 때 더 운치가 있는 길이 비자림길이란다.

    쭉쭉 뻗어 있는 푸른 숲 사이로 난 한 줄기 가느다란 도로,

    이 공간에 희뿌연 비 안개가 흐를라치면

    생각만으로라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도로가에 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고 중간 중간에 경찰이 주차를 단속하고 있다.

    이 아름다운 길을 차창 밖으로 밖에 볼 수 없음이여.

    이 길을 내 마음의 목록속에 올려놓는다.





    비자림로 끝까지 달려 보고 싶지만, 사려니 숲길에도 가보고 싶지만, 오늘은 녹산로다.

    비자림로를 벗어나 녹산로를 향해 달린다. 길 양쪽으로 노란 유채꽃이 핀 길이 나온다.

    아직은 아니다.

    정석항공관 부근에 이르자

    갑자기 봄 기운은 노란 유채꽃과 핑크빛 벚꽃으로 사정없이 기관총을 쏘아대듯 온 사방에 가득하다. 

    봄이 가득 들어 찬 공간이여. 아...이 광경이었구나!

    정석항공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총알같이 튀어 나온다. 

     







    한 동안 사진을 찍느라 난리 법석이다. 

    어느 정도 흥이 가라앉고 진정한 일행은 차를 타고 유채꽃 프라자로 이동한다. 

    아직 흥이 깨지 않은 나는 아쉬운 마음에, 일행을 먼저 차에 타라하고

    벚꽃 나무의 호위를 받는 유채꽃길을 걷는다. 


    그리고는 유채꽃 프라자로 그리고 성산 일출봉으로 달린다.

    세월이 지나 저 벚나무가 더 많이 자라 도로위를 덮을 때면

    이 길은 어떻게 보일까?



      

     

    2016년 4월1일(금)~2016년 4월4일(월)


    첫째날과 둘째날 아침

    금요일 오후에 부산을 출발하여 월요일 오전 비행기로 돌아오는 삼박삼일(?)의 여행.

    금요일은 도착하여 펜션에 짐을 부리고 저녁먹고 나니 벌써 하루 해가 저문다.




    첫째날 오후 일정:

    제주공항 -> 서귀포 대평리 풀향기 펜션 -> 서귀포 대평포구의 박수기정 -> 산방산 아래 유채밭 -> 모슬포 동성수산 횟집에서 저녁식사

    -> 서귀포 천문과학관 -> 풀향기 펜션 -> 둘째날 아침 박수기정 다시 방문

    오후 느지막하게 서귀포 대평리에 있는 풀향기 펜션에 짐을 풀고 나니,

    어디 마땅히 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펜션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산방산과 용머리 해변에는 잠깐 들릴 수 있겠다 싶어 서둘러 출발한다.

    바삐 서두르는 통에 아뿔사 길을 잘못 든다. 대평포구다. 

    눈앞에 어디서 눈에 익은 듯한 깍아지른 절벽을 보고 

    여기가 박수기정임을 깨닫는다.

    저 뒤로 여인의 젖가슴처럼 궁글게 솟아 오른 용머리해변이 보인다.  




    박수 기정에 가린 기울어가는 저녁 햇살이 강렬한 포구에서 잠시 넋을 잃고 절벽을 바라본다.

    그러다 우리의 목적지는 산방산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방향을 잡아 산방산을 향한다.

    이미 해는 서쪽으로 뉘엿뉘엿지고 있다.

    산방산등반은 물론이거니와 용머리해변을 산책할 여유도 없다.

    산방산 아래 유채밭에서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고 모슬포로 출발.

    모슬포항 동성수산 횟집에서 저녁식사를 즐긴다. 


    밤이 찾아오고,

    또 다시 마음은 급해진다.

    이번 제주 여행의 첫번째 목표가 밤하늘 별 보기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맑은 제주에서는 은하수가 손에 잡힐 듯이 보인다는 말을 들었었다.

    서귀포천문과학관에서 8시, 9시에 밤하늘 관측 체험이 있다는데,

    9시에 맞추어 가려니 시간이 빠듯하다.

    달려라.


    한라산이라는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銀河水)를 뜻하며,

    라(拏)는 맞당길나[相牽引] 혹은 잡을나[捕]로서,

    산이 높으므로 산정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라 한다. 


    9시에 간신히 도착하여

    체험관에서 별자리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고

    옥상에 있는 천문관측 망원경으로 별들을 관찰하였다.

    북극성, 목성과 그 위성, 오리온 자리의 삼태성, 그리고 구상성단을.


    부산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깨끗한 별들이 보였지만

    말 그래도 쏟아질듯한 별과는 거리가 있다.

    남쪽으로 서귀포의 밝은 불빛이

    밤하늘을 조금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만 은하수가 보일런지... 


    펜션이 자리 잡은 대평리는 아늑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 자리한 풀향기 펜션에 숙박을 정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

    인터넷에서 얼핏 본 박수기정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생각도 못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한번 박수기정을 찾아 사진에 담아 본다 .





    박수기정뒤로 우람찬 산방산이 솟아있다. 박수기정은 '바가지로 마실 샘물(박수)이 솟아나는 바위절벽(기정)'이라는 이다.

    옛날 용왕의 아들이 대평리의 훈장님으로부터 글을 배웠다고 한다. 아들이 글을 다 배우자 훈장님에게 소원을 하나 말하면 들어준다고 하자,

    훈장님은 집 부근에 있는 시냇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말하자 용왕은 절벽이 솟아나게 하여

    시냇물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대평포구로 향하는 해안길.

    천천히 해안을 산책하면 절로 편안한 마음이 들듯한 그런 길이다.





    대평포구에 있는 하얀 피자집




    풀향기 펜션에서도 박수기정과 포구에 있는 하얀 피자집이 보인다.



    둘째날 토요일은 날씨가 참 좋다.

    오늘은 먼저 녹산로를 들렀다가 성산 일출봉과 섭지코지쪽으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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