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중 <객관성의 칼날> 제 9장 에너지학 / 찰스길리피스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 보존법칙) - 줄과 마이어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증기기관의 발명은 과학에 빚진 것이 거의 없다. 증기기관은 수준높은 과학 지식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어떻게 보면 단순한 기술이었다. 오히려 증기기관은 과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카르노로 부터 시작된 열역학은 증기기관의 연구에서 비롯되었기때문이다.

 

열역학에는 몇가지 법칙이 있다. 먼저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있고,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 있다. 그런데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증명되지 않은 것이라 하면 조금 놀랍다. 왜냐하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전우주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원리로 받아들여지기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열역학 제1법칙이 성립되었으며,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부터 어떤 과학적 사실들이 도출되었을까?

 

수학은 철학과는 달리 기본적인 방법론으로 증명을 내세운다. 증명되지 않은 사실은 수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증명된 사실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이 위에 또 새로운 진리를 세워나감으로 수학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이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엄밀함의 학문인 수학조차 증명되지 않은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면 놀랍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수학보다 엄밀함이 떨어지는 물리학에서야 오죽하겠는가? 그 전제로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사용한다고 나무랄 순 없을 것이다.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자연의 궁극적인 힘들이 서로 교환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 왔었다. 화학적 반응에 있어, 반응전의 계의 질량과 반응후의 계의 질량이 동일할 것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바탕으로 화학이 발전해 왔던 것과 똑 같이,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너지 보존법칙은 증명되지 않은 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져 왔던 물리학의 전제였다. 이런 전제가 옳음을 보여주는 여러 간접적인 증거들에 의해 이 전제에 대한 믿음은 점점 더 굳건해졌다.   

 

벤저민 톰슨(1753~1824)은 마찰에 의해 운동이 열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최초의 실험을 수행하였다. 그는 대포의 포신을 깍을 때 발생하는 열로 물이 심하게 끓는다는 것을 통해 열은 운동에 존재함을 주장했다. (1798) 그러나 그는 운동으로부터 열로의 변환을 수량화하지 못했다. 

 

40년뒤 제임스 프레스코트 줄(1818~1889)은 운동과 열사이의 수량화에 성공했다. 그의 초기실험은 기계적 동력의 소모와 열의 발생 사이에 일정한 비율이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연의 위대한 힘은 창조주의 엄명에 의해 영원불멸임에 대하여 만족한다. 기계력이 소모되면 언제나 정확히 그에 상응하는 만큼의 열이 얻어지는 것이다."리고 줄은 말했다.(1843)

 

줄은 카르노의 연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실린더에서 증기가 팽창할 때, 실린더 속의 온도가 감소한다. 그리고 감소한 온도에 비례하여 피스톤에 전달되는 기계적 힘이 증가한다. 즉 열의 감소는 힘의 증가와 정확히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활력은 소멸되지 않으며 단지 다른 형태의 힘으로 변환될 뿐이다.> 

 

이러한 일과 열과의 변환에 대한 사실이 과학적 객관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수량화에 성공해야 한다. 즉 어느 정도의 열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변환되었는가하는 것이 수량적으로 보여져야 한다. 줄은 바로 이러한 수량화에 성공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한 과정을 수량화했을까?

 

줄은 특별한 장치를 고안하였다. 물통속에서 회전하는 물갈퀴를 만들고, 추가 내려가면 물갈퀴가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추가 하강하면서 물갈퀴가 움직이고, 물갈퀴가 움직이면서 물과의 마찰로 인해 물의 온도가 상승한다. 이 과정에서 추가 한 일과 온도의 상승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일과 열사이의 수량화에 성공한 것이다. 1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높이는데 772파운드의 무게가 1피트 낙하하는 기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줄은 이 실험을 통해 열과 일의 등가성을 보여주었다. 즉 열과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변환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것은 좁은 의미로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줄은 실험을 통해 그의 업적을 이루었지만, 마이어(1814~1878)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으로 줄과 똑같은 결과를 얻었다. 줄이 실험물리학자였다면 마이어는 이론물리학자였던 셈이다. 실험과 이론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이는 증명하지 않고 사용한 전제조건이 받아들일 만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객관성의 칼날 / 찰리 길리피스 / 이필렬

 

증기기관이 과학에 빚지고 있는 것보다 과학이 증기기관에 빚지고 있는 것이 더 많다 - 헨드슨(1878~1942)

 

뉴커먼 기관에서 시작       레고로 만들어 본 증기

그림)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1736~1829)와 증기기관차

영국에서 증기 기관을 빼앗는 것은 석탄과 철도를 동시에 빼앗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영국의 모든 부의 원천을 고갈시킬 것이며, 그 번영이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것을 멸망시킬 것이며, 저 거대한 힘을 근절시킬 것이다. 영국이 가장 강력한 방어력이라고 생각하는 해군을 파괴하는 것조차도, 이것과 비교하면 별로 치명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사디 카르노(1796~1832)

사디 카르노는 증기기관을 모형으로 삼아 가장 효율적인 열기관 연구에 착수하였다. 열기관연구의 기본 목적은 열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동력에 한계가 있는가, 그리고 증기보다 더 유효하게 힘을 전달하는 것이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에콜 폴리테크닉 출신으로 가능한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은 카르노는 연구를 일반화시켰다. 증기기관이라는 특수한 것의 연구로부터 즉각 "열에 의한 운동의 생성"이라는 문제를 추상하여 가장 이상적인 열기관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카르노

그림) 영구기관으로 유명한 카르노- 열역학의 창시자로서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보존의 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의 법칙)이 열역학분야에서 유래했다.

 

카르노의 열연구는 19세기 물리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뉴턴역학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물리학의 헛점을 드러내었다.

 

19세기 뉴턴 역학은 물체의 연장(공간속에서 일정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물질의 성질), 질량, 속도(운동)을 기본으로 한다. 힘은 질량에다 운동의 변화를 곱한 양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리학자는 작용을 어떻게 표현해야 했을까? 힘, 일, 열, 불, 화학적 반응성, 자기, 전기, 생명등을. 힘의 전달은 기본적으로 접촉을 전제로 한다. 민다든가, 충격을 가하는 것등은 접촉으로 힘이 전달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접촉되지 않은 물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물체에 힘이 가해지는 현상은 어떤 메카니즘으로 설명해야 할까? 

 

자기 - (a) 막대자석

그림) 자석의 주위 공간으로 미치는 힘의 영향이 보인다. 붙어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 물체에 힘을 가하는 것은 어떤 메카니즘에 근거한 것인가? 입자론적인 고전역학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또한 기계론적 물리학이 자연을 기술하는데 과연 적절한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기술자가 인간이나 동물, 바람이나 물의 운동으로부터 지레, 도르레, 기어, 스크류등에 전달되는 힘만 다루어야 한다면, 고전 역학의 원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열을 동력으로 삼자마자 고전 역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되었다. 증기에 의하여 피스톤이 밀려가는 것과 원통 속의 온도가 내려가는 것의 관련성을 어떻게 모멘트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격증 정보]실린더

그림) 피스톤 운동 - 증기기관은 열을 동력으로 실린더내에 피스톤 운동을 유발시키고, 이 직석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기구를 통해 바퀴를 회전시켜 일을 하는 장치이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카르노는 이러한 깊은 논의에 집착하기 않았다. 그는 열을 단순히 받아들인 뒤, 열을 전달하는 열소 즉 칼로릭이 있다고 전제하였다. 그는 칼로릭을 보존되는 성질이 있는 유체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증기기관의 운동은 칼로릭의 흐름으로 인한 것이라는 이론이 전개한다. 따뜻한 물체에서 찬 물체로 칼로릭이 흐름으로 평형이 깨어지고 그 이후 다시 평형이 수립된는 과정에서 피스톤 운동이 생긴다. 즉 칼로릭이 자신의 준위를 찾아 복원되는 과정에서 동력이 끌어내지는 것이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카르노의 영구기관에서 구현되었다. 기체는 압축되면 뜨거워지고, 팽창하면 냉각된다. 만일 기체를 압축시키면서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하려면(등온압축), 우리는 그 기체속의 칼로릭을 제거해야 한다. 또 역으로 팽창시키면서 온도가 내려가지 않게 하려면(등온팽창) 칼로릭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른바 등온압축, 등온팽창이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이러한 열역학에 근거하여 카르노의 영구기관은 [등온팽창-> 단열팽창-> 등온압축 ->단열압축]의 사이클을 거쳐 초기상태로 돌아온다.

 

카르노기관 - 카르노기

그림)  P=압력, V=부피, 1=초기상태, 1-2 = 칼로릭이 공급되는 등온팽창, 2-3 = 칼로릭의 공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팽창함으로 온도가 내려가는 과정(단열팽창), 3-4 = 칼로릭이 회수되는 등온압축, 4-1: 칼로릭의 공급 및 회수가 중단된 상태에서 압축됨으로 온도가 올라가는 과정(단열압축), 1=최종상태=초기상태

이러한 사이클로 무한 운동이 가능한 이상적인 영구기관의 가역적 과정은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엔트로피법칙이 탄생하게 된다.  

 

카르노의 영구기관은 초기상태에서 시작하여 초기상태로 되돌아가는 이상기관이다. 카르노의 영구기관에 나타난 이러한 가역성 개념은 관성 운동개념과 비교된다. 현실의 운동 중에서 직선위에서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운동은 없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과정 중에서 가역적인 과정은 없다. 그러나 현실의 비가역적 변화 대신에 이론적인 가역 변화를 생각할 수 있다. 초기상태와 최종상태의 온도차를 한없이 작아지도록 한다면 이론적으로 초기상태는 최종상태와 같다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가상적인 가역성은 연속성을 의미하며 미적분을 응용할 수 있게 해 준다.

 

클라페이롱(1799~1864)은 카르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다루었다. 클라우지우스는 클라페이롱의 논문을 통해 카르노의 업적을 알게 되었고, 그 가역성은 클라우지우스가 엔트로피개념을 이끌어 낸 필수조건이 되었다. 클라우지우스는 가역성이 "절대로 도달할 수는 없지만 무한히 접근할 수 있는 한계"같은 것이며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고찰을 할 때는 이것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으며, 비록 한계로서일지라도 이론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썼다.

 

클라우지우스가 들려주

그림) 엔트로피법칙을 유추해낸 클라우지우스, 그는 그 세대의 과학자들중에 가장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다. 엔트로피라는 불가해한 양을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물리학의 추상범위에 관해서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칼로릭모델을 사용하지 않고도 카르노가 그러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운동론적 열이론으로부터는 가역성이라는 핵심적이고도 역설적인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열역학이라는 학문은 열교환을 유체의 이동으로 보는 칼로릭 이론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칼로릭은 실체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고 에너지와 엔트로피라는 개념속으로 사라졌지만...

 

찰스 길리피스의 객관성의 칼날은 무딘 연마석에 의해 예리하게 변해 왔다는 것이 놀랄 뿐이다. 오류는 오류를 낳지만, 때로는 오류로 인해 진리로 인도되기도 한다는 것인지...  

 

 

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20세기 물리학의 제2혁명을 초래한 19세기 물리학의 한계

 

19세기 물리학은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고전물리학은 절정에 달했다. 당시의 대물리학자들은 뉴턴 물리학이 자연의 구조를 구석구석까지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광입자의 복사와 운동, 원자와 분자들 사이의 화학 결합, 전기, 자기, 열현상에서의 에너지 흐름과 교환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 역시 고전물리학으로 그 원리가 밝혀질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단지 소수의 철학자들만이 그 기초의 문제에 대해 번민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물리학에서 혁명이 일어나리라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고전 물리학이 사물의 형상과 완전히 부합하지 못한 점이 있었기에 필연적이었다. 19세기 물리학은 두가지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는 뉴턴의 공간 개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입자론적 기계론에 관련된 것이었다.

 

공간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운동은 물체에 내재해 있는 본질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는 것은 아래로 향하는 본질때문이며, 가벼운 물체가 위로 뜨는 것은 그러한 본질이 그 속에 있기때문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플라

그림)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학당의 일부- 플라톤(왼쪽)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에 있는 이데아세계를 설파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오른쪽)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지상 현실세계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논증하고 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설명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의 변화라고 보았다. 이러한 운동론은 상대 운동과 절대 운동이라는 개념으로 인도하였다. 즉 어떤 물체가 움직일 때 무엇에 대해 움직이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뉴턴은 공간을 모든 운동의 기준틀로 잡았고, 그것이 절대적인 좌표계라고 보았다. 뉴턴은 그 좌표계안에서 모든 운동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

그림) 갈릴레오(왼쪽)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른쪽)

 

반면에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절대 공간에 반대하였다. 공간은 실체가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들간의 관계라고 보았다. 진공은 아무 것도 없는 무 자체였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의 공간에 어떤 물체가 하나 있다면, 그 물체의 운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정지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기때문이다. 이렇듯 공간상의 물체의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상대적 관계하에서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공간 개념이었다.  

 

표준모형_세상의 기초         DNA 정보 저장 왜 3진

그림) 뉴턴(좌)         ,                                        라이프니츠(우) 

두사람은 누가 먼저 미적분을 발견했는가의 문제로 격렬한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뉴턴의 절대 공간 개념은 사물의 형상을 올바로 반영한 것이 아니었다. 아인쉬타인은 상대성이론을 통해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공간은 시간과 결합하여 시공간을 형성하며, 수축되기도 하며, 늘어나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부러지거나 휘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20세기의 물리학은 19세기 물리학의 결함을 보완하게 되었다.

 

광전효과의 발견 - 알      키즈 사이언스 - 우주 

왼쪽 사진)아인쉬타인의 젊은 모습 - 광전효과의 발견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특수상대성원리와 일반상대성원리로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다.  

오른쪽 그림) 일반상대성원리: 중력에 의해 휘어진 공간의 모습을 그래픽으로 볼 수 있다. 중력이 무한대로 강해지면 블랙홀이 된다. 중력에 의한 공간의 휘어짐은 1919년 아서 에딩턴경의 관측에 의해 증명되었다.

 

기계론

19세기 물리학은 많은 물리학적 현상들을 입자의 운동과 충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간상에서 중력이 전달되는 현상이나, 전자기론에서 다루던 장의 현상 - 빛의 파동적 특성과 전자기 유도현상등은 그러한 역학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간에서 이러한 힘을 전달하는 매체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19세기 물리학은 에테르라는 실체가 공간을 채우고 있어, 공간상의 현상의 전파를 위한 매질의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20세기 상대성이론은 에테르의 필요성을 제거해 버림으로, 에테르는 상대성 이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물리학은 또한 자연의 통일성, 즉 물질과 에너지의 상호관계를 이해해야만 했다. 19세기 물리학은 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힘을 전달하는 유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유체는 실체로서, 연장(공간상의 일정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보존법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수학적으로 취급할 수 있었다. 이 유체는 열을 전달하는 열소로서 칼로릭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 칼로릭의 문제를 연구하는데서 열역학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 열역학은 에너지학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열역학 제1법칙(에너지보존의 법칙)과 제2법칙(엔트로피의 법칙)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칼로릭 개념은 에너지와 엔트로피라는 개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 2 열역학 법칙....

그림) 에너지보존의 법칙 - 우주에 있는 전체 에너지는 언제나 동일하다.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다.

엔트로피의 법칙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체 우주의 무질서도는 높아져 간다.

 

기계론으로 자연과 그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던 에테르나 칼로릭은 상대성 이론과 에너지학이라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이들은 20세기 물리학의 혁명을 초래한 19세기 물리학의 결함이었던 것이다.  

 

과학이 지닌 객관성의 칼날은 여지없이 비객관적인 요소들을 잘라버렸다고나 할까? 그러나 형이상학은 언제나 과학의 곁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어떨 때는 과학에 영감을 주기도 한다. 객관성의 칼날이 얼마나 예리하든지 간에 형이상학적 특성을 완전히 도려내지는 못할 듯 하다.

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새물결 출판사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 <쥐라기공원>에서는 호박속에 화석으로 남은 모기의 피로부터 공룡의 DNA를 채취하여 공룡을 복원시킨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쥐라기'라는 말은 지질학에 나오는 표현이다. 지구의 장구한 역사를 구분할 때 지질시대로 구분한다. 지질 시대는 선캄브리아기,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로 나누는데, 공룡들이 지구상에 활보했던 시기는 중생대이다. 이 중생대는 트라이아스기, 쥐라기, 백악기로 나뉜다. 공룡은 트라이아스기에 출현하여 쥐라기에 번성하였고, 백악기에 멸종된었다.

 

 

19세기에 시작된 지질학은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지질시대를 일컫는 명칭, 캄브리아기 그리고 석탄기, 데본기, 쥐라기, 백악기등의 명칭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지질학은 생물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독일의 광산학교의 광물학 교수였던 아브라함 고틀로프 베르너(1749~1817)는 어떻게 다양한 암석들이 형성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을 내놓았다. 모든 암석들은 지구 전체를 덮고 있던 원시 해양의 침전물로부터 생성되었다. 이를 베르너설 또는 수성론이라고 부른다. .

 

 

제임스 허튼(1726~1797)은 화성론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 <지구의 이론>에 의하면, 과거의 사건은 현재도 작용하고 있는 과정으로부터의 귀납적 유추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으며, 암석이 나타내는 증거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었다. 지각은 화성 작용에 의한 것과 수성작용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수성작용에 의해 침전된 퇴적층은 지구 중심의 고압 고열의 작용에 의해 단단한 암석으로 변화되었으며 그 팽창력은 해저에서 대륙을 융기시켰다.

 

이후 다양한 지층이 발견되면서, 이 지층들 사이에 체계를 세우는데 고생물학의 화석이 열쇠를 제공하였다. 영국의 무명 측량기사 윌리엄 스미스(1769~1839)는 1791년 특정 종의 화석은 특정 그룹의 지층들에만 존재하고, 다른 지층에는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 사실을 이용하여 주요한 암석계를 확정하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1815년 <잉글랜드 및 웨일즈의 지층의 개요>에서 고생물학적 지표를 이용하여 지층을 분석하였다.  

 

 

지층의 이름을 짓는데는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방법 즉 석탄이 발견된 지층을 석탄기, 백악이 발견된 지층을 백악기로 부르는 경우와, 데본기, 쥐라기, 페름기처럼 그 지층이 처음 발견된 지방의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 1820년대에 로드릭 머치슨(1792~18710)이 실루리아기를 발견하였고, 에덤 세지위크(1785~1873)이 조수로 데리고 간 그의 학생 찰스 다윈과 함께 캄브리아기 지층을 발견했다.

 

 

1830년경에 찰스 라이엘(1797~1875)의 <지질학 원리>가 출판되면서 지질학은 이전의 아마추어적인 면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지질학 원리>는 지질학이 참된 과학으로 발달하는 것을 방해했던 장애물을 제거하였다. 즉 현존하는 질서와는 다른 질서에 의하여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하는 비학문적 전제를 제거했던 것이었다. <지질학 원리>에  의하면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현재 작용하고 있는 힘에다가도 충분한 시간만 주게 되면, 인간의 거처인 지구에 관찰 가능한 변화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변화가 균일하며 시간 속에서 주기적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지질학자들은 고생물학적 지표와 화석 형태의 연속을 가지고 지구의 연대를 수립하였다. 반면에 생물학자들은 지질학적 시대 구분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라이엘이 종의 변이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증거를 확인하지도 않고 종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은 균일설의 이론에 반하는 것이었기때문이다) <지질학 원리>를 면밀하게 연구했던 다윈은 이 책의 영감을 받아 획기적 과학적 관점을 갖게 되었다. 

 

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 새물결 출판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고생물들은 어떤 원리로 복원이 되었을까? 퀴비에가 그 대답을 해 준다.

 

조르주 퀴비에(1769~1832)는 라마르크(1744~1829)와 동시대를 살았던 박물학자이자 프랑스의 과학 행정가이었다. 퀴비에와 라마르크의 주요 업적은 박물관의 멋진 수집품을 배열하는 방법을 수립하고 출판한 것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지동설의 코페르니쿠스가 달랐던 것처럼 라마르크와 퀴비에도 서로 달랐다. 라마르크는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철학적이었으며, 그의 생물철학은 자연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각 생물종은 영화의 한 순간 장면과 같은 것으로 다른 장면들 즉 다른 생물종과의 연속적인 흐름 상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퀴비에는 라마르크와 반대편에 서 있었다. 그는 라마르크와는 달리 철학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퀴비에는 생물종 사이에는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며,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각 생물종은 불연속군을 이룬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오늘날 자연사 박물관에 가보면 거대한 공룡의 골격을 볼 수 있다. 고생물의 화석을 발견할 때는 대부분 불완전한 모습으로 발견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완전한 형태의 공룡들을 다시 조립할 수 있는가? 어떨 땐 아주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수백개의 뼈들이 흐트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그 뼈들이 20종에 달하는 동물들의 뼈라면 어떨까? 하나 하나의 뼈에 대해 그것이 어떤 동물의 것이었는지를 정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여기에서 퀴비에의 분류학적 방법이 빛난다. 고대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의 겉모습을 보고 분류하였지만, 퀴비에는 더 나아가 비교해부학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했다. 퀴비에는 커다란 업적이 바로 이 비교해부학에 있는 것이다. 부분들의 상호관계성 원리와 비교해부학의 결합은 불가능하게 보였던 그러한 조립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물의 한 부분으로부터 그 동물 전체를 추정한다. 다시 말하면 유기체 내부의 형태들은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각 생물은 종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독특한 폐쇄체계이고 어느 부분이나 서로 대응하며, 상호 작용을 통하여 공동으로 일정한 활동을 한다. 만약 어떤 동물의 내장이 신선한 고기만을 소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면 그 동물의 턱은 포획물을 잡아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고, 그 발톱은 움켜쥐고 잡아 찢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그 동물의 전 체계는 추적하고 포획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하에 고생물학이 수립되었다. 사멸된 종, 화석만이 남아 있는 그 생물들을 다시 복원하여 박물관에 멋있게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객관성의 칼날: 찰스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라마르크의 진화사상과 그 의의

 

숲 속에서는 어디를 보나 다양한 생물들이 우글거린다. 땅 속에, 풀 밑에도, 심지어 시냇물 속에도 생명은 다양한 모습으로 꿈틀거린다. 생명의 세계의 이 풍부한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마르크 이전에는 생물들이 신의 무한한 배려로 그 환경과 목적에 맞도록 설계되고 창조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만일 생물이 어떤 목적에 맞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적응이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자연신학적 설명을 대신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 장 밥티스트 드 라마르크(1744~1829)였다.  

 

 

 

라마르크는 다윈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진화론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의 진화원리는 다윈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객관적 과학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생물 철학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에 근거해 있는 반면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설과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하였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라마르크는 한 종류의 광물이 환경의 작용에 의해 다른 종류의 광물로 변한다는 사실로 부터, 광물에는 항구적인 종이 없는다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생물계에 적용시켜 생물종도 환경의 영향아래 다른 종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물종이란 고정된 것이라는 당시의 견해와는 다르게 라마르크에 있어 종이란 생명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형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생물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는가? 라마르크의 철학에 의하면 생물에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생물에 내재해 있는 힘이며, 둘째는 물리적 환경의 영향이다.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환경)의 투쟁의 결과로 다양한 종이 발생한다. 생명의 힘은 생물이 끊임없이 복잡한 형태로 변하도록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의 영향은 이 자연스러운 연속적 변화를 깨뜨리고 불연속을 초래한다. 이 불연속으로 인해 종사이의 간극이 나타난다.

 

환경의 변화는 요구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요구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낳는다. 행동의 변화는 새로운 습관이 되고 특수한 기관을 변화시켜 마침내 생물체 일반을 바뀌놓게 된다. 그는 두가지 법칙을 끌어낸다. 즉 기관은 사용 여부에 따라 발달하거나 퇴화한다는 것, 그리고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획득한 형질은 유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획득 형질의 유전은 옳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는 생물학의 연구 방향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현재 보이는 자연의 모습만을 연구하고 있었던 반면에 라마르크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연의 추이,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던 것이다.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생물이 변화되어 왔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라마르크의 생물학은 객관적 과학으로 편입되지는 못했지만 생물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함으로 다윈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위 내용은 객관성의 칼날의 일부분을 요약한 것으로 본인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02499388.jpg
0.03MB

객관성의 칼날 / 찰스 길리피스 지음

 

제6장 물질의 합리화

이 장은 화학혁명으로 인도한 라부아지에 당시의 화학사이다. 라부아지에 이전의 화학은 형이상학과 전승, 혼란과 무지, 연금술등에 빠져 있어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화학이 객관성을 지닌 과학으로 발전해 나가는 흥미진진한 역사를 이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요인물로는 산소를 발견한 프리스틀리, 근대화학의 아버지인 라부아지에, 화학적 원자설 돌턴이 있다. 

 

화학사를 읽으면서 전에 해 보지 않은 질문들을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었을까? 기체가 단일 물질이 아니라 혼합물임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산소라는 단일한 기체를 분리해 내고 그 성질을 파악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그 산소가 공기의 2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산소는 원자번호 8번으로 원자량이 8 인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산정해 낼 수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화학결합은 입자들의 결합이라는 모형에 익숙해 있다. 이러한 모형들은 누가 어떻게 제안했던 것일까?

 

학교에서는 과학적 사실의 원리나 과학적 발견등이 밝혀진 과정등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결과만을 과학적 진리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과학적 사고는 위대한 발견으로 인도한 창의적 사고나 지성의 흐름등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건데, 우리는 일종의 세뇌과정을 거쳤다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객관성의 칼날 제 6장은 바로 과학적 사고를 일깨워주는 지성들의 생각, 그리고 흥미진진한 실험등을 보여준다. 난 화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객관성의 칼날의 이 화학사에는 진정 묘미를 느낀다.  

 

화학혁명은 라부아지에로 부터 시작하여 돌턴에 의해 완성된다. 물론 이 화학혁명은 라부아지에 혼자의 공은 아닐 것이다. 라부아지에에게 영향을 주거나 도움이 되었던 많은 화학자들과 실험들이 있다. 특히 조셉 블랙의 정량화학은 라부아지에의 화학방법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프리스틀리의 산소의 발견과 같은 실험들은 라부아지에의 이론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라부아지에의 연구는 뒤이은 돌턴의 화학원자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근대화학사에서 라부아지에의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새로운 화학의 방향을 정립한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1743~1794)는 화학의 새방향을 정립하였다. 운동론의 갈릴레오, 물리학의 뉴턴, 생물학의 다윈등과 같은 사람들은 과학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한 사람들이었다. 라부아지에는 화학에서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플로지스톤 이론을 몰아내었다. 연소라는 것이 플로지스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산소와의 화합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수학적 표현양식을 사요하여 오늘날의 화학 방정식과 유사한 독특한 결합양식과 그에 근거한 명명법을 도입했다.

 

라부아지에의 주요 저서 <화학원론>

라부아지에 이전의 화학은 용어만 무질서하게 모여 있는 과학이었다. 수학이나 역학은 공리와 정의로부터 결과가 명확하게 도출되는 학문이었다. 라부아지에는 화학을 그러한 명확한 학문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생한 해에 <화학원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목적은 화학을 올바른 방법의 기초위에서 출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화학을 새롭게 정리하는 일에 착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화확원론>은 단순한 방법론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위대한 실험상의 발견들에 대한 설명들이 들어 있다. 18세기 초의 화학은 정량적인 특성을 갖지 못했다. 즉 화학실험실에서 무게 측정 광경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라부아지에의 실험은 달랐다. 그의 실험실에서는 과정이 중요시 되었다. 특히 신중하게 실험 전후의 중량을 측정하는 정량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그의 화학에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플로지스톤 이론

기체의 존재 여부를 확실히 알지 못했던 18세기 화학은 플로지스톤이라는 것을 상정함으로 화학반응등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이 플로지스톤은 슈탈(1660~1734)의 생기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석탄, 황, 인등이 불에 타서 형태없는 잿더미로 되는 현상은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감으로 생기는 현상으로 생각하였다. 슈탈은 산소의 취득이 있는 곳에서 플로지스톤의 손실을, 산소의 손실이 있는 곳에서 플로지스톤의 취득을 보았던 것이었다. 이것은 거울에 비친 화학, 거꾸로 된 이론이었다. 플로지스톤은 올바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일종의 화학의 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로써 화학은 연금술의 신비적인 숲을 탈출할 수 있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화학적 현상에 대한 합리적 접근 방법이었지만, 정량적인 특성을 갖추지 못했으며, 1765년 이후  기체화학에서의 연이은 발견들과 조화되지 못하여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기체의 발견

영국 국교회 목사 스티븐 헤일즈(1671~1761)은 어떤 "공기"가 많은 유기 물질과 특정한 알칼리 토류에 "고정"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공기가 그러한 물질과 결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공기는 지금의 이산화탄소였다. 이후 조셉 블랙(1728~1799)은 탄산마그네슘의 산화물을 얻기 위해 가열하면 언제나 일정량의 무게가 감소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블랙은 불은 알카리 토류에서 공기 자체와 같은 무언가 탄성적인 기체 성분을 몰아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처음으로 발견된 이 기체를 "고정 공기"라고 불렀다.

 

블랙의 화학

화학자의 기술의 상징이 증류기와 레토르트로 부터 천칭으로 대체된 때는 블랙부터였다. 블랙의 독자성은 그의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량 분석 방법의 엄격성, 시약의 순도에 대한 주의, 어떤 연구에나 수반되는 끈기있는 추론, 실험 전술에 관한 철저한 작전 등에 있었다. 그는 정량 화학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는 "고정 공기"를 발생시키기 위해 백악을 염산에 녹이면 그 무게의 40%정도가 줄어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소실되는 "고정공기"가 40%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악을 태워서 생석회를 만들때도 무게가 43% 감소한다는 것을 알아냈었다. 그 결과로 백악의 40%정도가 "고정공기"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중량 분석의 방법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고정공기를 모아 그것의 성질이 어떠한지를 탐구하지 않아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헨리 캐븐디시(1731~1810)

1765년 캐븐디시에 의해 기체에 대한 직접적, 정량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는 스티븐 헤일즈의 기체 수조에 들어있는 물을 수은으로 대치함으로 용해에 의한 손실 없이 이산화탄소를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가벼운 "가연성 공기"(수소)도 모았다.

 

프리스틀리(1733~1804)

1772년 프리스틀리는 "초석공기(일산화탄소)"와 "염산공기"(염화수소)의 발견을 보고했다. 또한 보통 공기의 성질을 시험하는 데 쓸 수 있는 다른 "초석공기"(아산화질소)도 발견했다. 그는 산화제2수은을 가열하여 어떤 "공기"를 얻었다. 그리고 즉흥적으로 그 속에 양초를 넣어 보았더니 그것은 횃불처럼 빛났다. 그것이 산소였던 것이다. 그는 실험에 있어 관례에 구애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에게 화학 지식이 있었다면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으리라고 말했다. 산소의 발견도 아주 즉흥적인 행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성격비교

프리스틀리는 독창적이고 열광적이며 소박하고 산문적이었다. 그는 관대하고 경솔한 면도 있었다. 그의 스타일은 매력적이긴 하지만 판단력과 품위의 부족을 드러내었다. 반면에 라부아지에는 숙련되고 과묵하며, 노련하고 비판적이었다. 그는 프랑스 전문 지식의 관료적 전통 속에서 자신과 국가에 봉사하는 데 야심적이며, 일련의 실험처럼 신중하게 어떤 정해진 틀 속에서 그의 생애를 계획했다. 라부아지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수학 부문의 인물들, 라플라스, 라그랑주, 몽쥬 등과 교제했다. 그들은 개념을 엄격하게 판단하는 사람들이었다. 라부아지에가 당시 화학의 전반적인 불만족스런 이론 상태에 흥미를 느끼며. 플로지스톤이론이 가지고 있던 모순, 딜레마등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영향때문이었을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처럼 새로운 기체의 발견등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더 큰 틀, 원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연구

플로지스톤 이론에 의하면 황이나 인을 태우면 플로지스톤이 빠져 나가기때문에 무게가 즐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그러한 경우 오히려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실험 결과를 통해 연소중에 플로지스톤과 같은 것이 방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량의 공기가 흡수된다는 추론을 세웠다. 또한 그는 황과 인만이 아니라 연소와 하소로 무게가 증가하는 모든 물질의 경우로 이 추론을 확장했다. 그리고 실험들은 그의 추론을 확인해 주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은 틀린 것이었다.   

 

라부아지에의 연구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연구와 실험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즉 그는 "발효나 증류 또는 모든 종류의 화학변화에 의하여 방출되는 기체에 관하여 그리고 아주 많은 물질의 연소를 통하여 흡수되는 기체에 관하여 계획하고 있는 일련의 긴 실험이 시작"한다고 기술하였다. 그는 이러한 실험등을 통해 연소의 원리, 산의 생성 원리등을 그의 주요 목표로 삼고 연구를 해 나갔다.

 

라부아지에가 직면한 난점

그는 연소와 호흡은 공기중의 그 무언가와 결합하는 것임을 확신했다. 바로 그 무언가는 산소였다. 그 당시이 언어로 말하자면 '고정공기'란 산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헤일즈에 의해 확인된 "고정공기"(이산화탄소)는 예상과는 정반대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공기는 호흡과 연소의 재료가 아니라 그것들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었으며, 보통 공기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즉 "고정공기"의 정체에 대한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체가 발생한 모든 실험을 되풀이하여 그 기체의 생성 경로를 파악하려고 했다. 아마 라부아지에는 이산화탄소를 고정하는 반응과 산소를 필요로 하는 반응을 구별하고자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해야 했던 일은 연소, 녹이 스는 것, 호흡의 화학적 유사성을 밝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대기가 산소를 포함하는 혼합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라부아지에의 한계

갈릴레오, 데카르트, 케플러, 뉴턴, 다윈등은 위대한 발견을 위한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라부아지에는 발견을 위한 정열이 없었다. 그의 정신의 명석함은 오히려 상상력, 소박한 호기심, 예기치 못한 사물의 본성에 대한 공감등을 배제한 것일까? 그의 실험적 방법의 완전성 자체가 오히려 한계로 작용하였다. 예를 들어 연소중에 인은 방출될까, 화합할까? 무게를 달아보라. 그러면 천칭이 해답을 말해 줄 것이다. 증가한 무게는 대기로 부터 온 것일까, 아닐까? 측정해 보라. 그러면 감소된 부피가 해답을 말해 줄 것이다. 이처럼 모든 실험은 극히 적절한 물음에 대하여 그렇다 또는 아니다 하고 답할 수 있도록 유례없이 세련되게 계획되었다. 여기에 결함이 있었다. 그것은 이미 발견된 것의 논리였다. 여기에는 새로운 발견이나 미지의 것에 대한 모험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시너지효과

화학은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의 묘한 공존 관계에서 이득을 얻었다. 프리스틀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데 뛰어났다. 하지만 그는 이론적 경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리스틀리는 그가 발견한 것을 이해 못했다. 라부아지에의 명석함은 발견의 수단으로써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새로운 발견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 발견된 현상이나 사실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발견들을 이해했던 것이다. 프리스틀리는 발견을 하고, 라부아지에는 그 원리를 파악하였던 것이다

 

산소의 발견

수은 산화물의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수은을 적당히 가열하면 수은은 붉은 산화물을 된다. 더 세게 가열하면 다시 수은이 된다. (2Hg + O2 -> 2HgO, 2HgO -> 2Hg + O2)  처음 가열과정에서 수은은 산소와 결합하고(연소), 두번째 가열에 의해 산소가 방출된다(환원). 대부분의 물질은 환원시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하지만 수은산화물만은 그와는 달라, 환원시 이산화탄소 대신 산소를 방출한다. 이런 것을 몰랐던 까닭에 1774년 2월 바이엔은 산화제2수은을 하소시킨 후 발생한 이 기체(산소)를 고정공기(이산화탄소)라고 보고했다. 잘못된 결론이었다.  칼 빌헬름 셀레(1742~1786)도 그 이전부터 산소 실험을 했으며, 산화제2수은과 산화은으로 부터 산소를 얻었다. 그는 이것을 "불의 공기"라고 불렀다.

 

1774년 8월 프리스틀리는 처음으로 산소를 분리해 내서 이 기체가 물에 녹지 않고 연소를 돕는 성질이 있다고 하여 이산화탄소와 구별했다. 그러나 그는 이 기체를 그가 잘 알고 있던 소기라고 잘못 생각하고 말았다. 1775년 3월에 그는 이 기체의 성질을 확인했으며,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의 완전한 조성도 이해하게 되었다. 어떻게? 그는 닥치는 대로 시험해보고 나서 이 새로운 기체가 연소와 호흡을 도우며, 소기(아산화질소)와 반응하여 부피가 줄어든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는 그 혼합물에 초석 공기(일산화질소)를 가했더니 놀랍게도 그것은 또다시 원래 양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신선한 시료(산소)를 가지고 소기에 대하여 시험해 본 결과 그는 그것이 보통공기의 4배나 5배의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은 보통 공기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며, 그 부피의 20퍼센트는 "순수한" 공기(산소)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프리스틀리는 이 순수한 공기를 "플로지스톤이 없는 공기"라고 불렀다. 프리스틀리는 산소라는 새로운 기체를 발견하고서도 프로지스톤 이론의 울타리안에 갇혀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라부아지에는 산화제2수은 실험을 프리스틀리보다 빨리 이해했다. 그는 1774, 1775년 그 실험을 되풀이 하였다. 그는 수은산화물을 하소시켜 순 수은으로 환원시켰다. 처음의 수은산화물과 환원된 수은사이에는 54그레인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하소에 의해 발생한 기체의 부피는 78세제곱인치였다. 그러므로 78세제곱인치의 공기의 무게가 54그레인이라는 것, 그리고 1세제곱인치은 3분의 2그레인(54/78)에 조금 못 미치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보통 공기의 무게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이로부터 그는 잘못된 결론을 내린다. 그는 이 기체가 이산화탄소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보통 공기라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했다. 그것은 "보통 공기일 뿐 아니라 호흡이나 연소에 더 적합하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공기보다도 순수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라부아지에는 <질산중의 기체의 존재 및 그 산을 분해하고 재합성하는 방법에 대한 보고>(1776)에서 모든 산에 공기가 들어있으며, 각각의 산에 특유한 성분에 의하여 각기 다른 산이 생성된다는 확신을 보여준다. "공기뿐만 아니라 공기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모든 산에 들어 있으며, 그것이 "산성을 구성한다"라고 명기했다.  <쿤켈의 인의 연소에 대한 보고>(1777)등의 논문을 통해  "순수 공기"가 산의 원리라고 한 분석 방법을 인산과 황산으로 넓혔다. 그러나 그 요점은 그의 실험을 대기를 대상으로 하여 실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대기는 약 4분의 1의 플로지스톤 없는 호흡에 아주 적절한 공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머지 4분의 3은 유독한 공기, 미지의 성질을 가진 기체로 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1778년 <산에 관한 일반적 고찰>을 통해 "이제부터는 나는 화합상태, 즉 고정상태에 있는 플로지스톤 없는 공기, 즉 호흡에 아주 적절한 기체를 산을 생성하는 원리(acidifying principle)라고 부르겠다.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 더 좋다면 산을 생성하는 원리(oxygenic principle)이란 이름을 붙이겠다"... 그는 순수한 공기 즉 호흡에 아주 적절한 공기가 산을 구성하는 원소라는 가설을 힘차게 밀고 나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라부아지에는 아직 원소로서의 산소라는 생각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물의 합성

연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라부아지에는 수소의 연소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소가 연소하면 무엇이 생길까? 처음에는 수소의 연소후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기때문에 가연성 물질의 소실은 연소의 결합설보다 연소의 방사설이 더 유용한 것처럼 보였다. 1781년 프리스틀리는 가연성공기와 보통의 공기를 전기불꽃에 의하여 폭발시켜 생성물의 무게를 측정하려 했지만, 생성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용기 내부가 축축해졌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1783년 캐븐디시가 이 실험들을 되풀이 했는데, 이 반응이 내부의 공기의 부피를 5분의 1정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알아 차렸지만 실험의 규모가 작았기때문에 생성된 이슬을 모두 모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이슬에 흥미를 느껴 확대된 규모의 실험을 통해 이 수분이 순수한 물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영국의 제임스 와트, 그리고 프랑스의 가스파르 몽쥬도 똑 같은 발견을 독립적으로 거의 동시에 하였다. 캐븐디시는 물을 합성해 내었지만 그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라부아지에는 일견 극히 단순한 물질이고 고전적으로도 가장 직관적으로 파악되고 있던 원소인 물이, 라부아지에식 명명법을 예상하여 말하면, "물을 만드는 기체(hydrogenerative gas)"의 산화물이라는 것을 즉시 이해했다. 그는 50파인트의 가연성 공기와 25파인트의 산소를 연소시켜 660그레인의 물을 얻었다. 이 실험은 연소를 산소가 화합하는 화학반응으로 이해하는 개념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는 플로지스톤을 추방하는 싸움에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산소의 결합적 역할을 중심으로 하는 화학의 합리화는 플로지스톤화학을 정면에서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화학혁명은 라부아지에의 연소개념을 모든 화학 반응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그 화학의 연구 대상은 물질의 성질이 아니라 물질의 명확한 화합과 분리가 되었다. 이제부터 화학자는 양을 측정하게 되었다. 화학에 있어서 객관성의 기초는 어느 학문보다도 깊이 양적 관념에 자리 잡고 있기때문이다.

 

라부아지에의 질량보존의 법칙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가 질량 보존의 법칙을 정식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라부아지에 과학의 전제 조건이었지, 그의 과학이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과 인공의 어느 작업에서나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는다는 것, 실험 전후에는 등량의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공리로서 설정해야 한다" <화학원론>

 

라부아지에의 명명법

<화학의 명명법을 개혁하고 완성할 필요에 관한 논문>(1772) "화학의 연구와 교육에 도입되어야 할 중요한 방법은 그 명명법의 개혁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언어, 관념들의 변천 속에서 자연의 질서를 포착해낸 언어는 반드시 교수법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교육적이며 동시에 방법론적인 목적에 따라 라부아지에는 연구를 엄추고 동료들과 함께 화학 언어학을 도입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이산화탄소, 염화나트륨등과 같은 명칭은 그의 화학언어학에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라부아지에와 그의 동료들은  <화학명명법>을 논문집 형태로 1787년 출판했다.

 

라부아지에의 칼로릭설

그것은 뉴턴의 에테르처럼 이론의 구조속으로 구성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임의로 들어간다. 기체는 서로 반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쉽게 확산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열을 가하면 부피가 늘어난다. 즉 열은 반인력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체의 상태를 반인력으로서의 열의 삼투'라고 논한다면, 그 매질인 칼로릭은 반에테르였다. 열은 기체를 서로 반발하게 만드는 반인력의 성질을 갖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열을 전달하는 매질을 칼로릭이라고 생각하자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라부아지에도 뉴턴과 똑같은 이유에서 하나의 매질을 도입했던 것이다. 즉 능동적인 이론의 구성 요소로서가 아니라, 그의 이론을 쉽게 이해시키기 이한 목적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라부아지에와 공동으로 열을 연구한 라플라스는 열에 대해 라부아지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열의 칼로릭론자였고, 천체역학에서 뉴턴을 완성한 라플라스는 운동으로서의 열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열의 칼로릭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열의 본성에 관한 물리학자의 견해는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자연 전체에 삼투하는 유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물체의 온도와 열용량에 따라 각기 다른 정도로 물체를 투과한다. 그것은 물체와 결합할 수도 있는데, 이때는 온도계에 영향을 주기를 그치거나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로 자유롭게 흐르기를 그친다. 그것이 자유열을 형성할 때만 유리상태인데, 이 상태가 물체에서 열을 평형에 달하게 한다."는 것의 그의 칼로릭론이었다.

 

물질에 관한 과학은 어느 것이나 두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입자의 구성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에서의 현상의 전파이다. 라부아지에가 칼로릭을 도입한 것은 후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열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연속적인 매질이다. 후에 칼로릭은 에너지 역학으로 계승되며 사라져서 열역학이라는 비가역적인 대하 한가운데로 퍼지고, 그의 상응하는 에테르는 힘의 장과 동일시 되어 상대성 이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라부아지에 화학의 수학화의 실패

그는 금속 용액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일종의 공식을 만들었다.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최초의 화학방정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공식은 화학을 수학화하려는 라부아지에의 참신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그를 지배하고 있던 과학철학의 결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과학철학이란, 뉴턴 물리학의 방법과 사물의 형상과 종을 분류하는 베이컨적 박물학의 논리가 섞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학철학에서 박물학의 논리는 이론물리학자의 추상과 수학화라는 정밀한 방법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그의 <화학명명법>에는 이러한 화학 분류의 박물학이 명백히 드러난다. 

 

그는 산에 관한 마지막 논문에서 화학의 수학화를 꾀했다. 그의 방정식은 오늘날의 화학방정식과 유사하지만 그의 방정식의 계수는 시약의 무게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라부아지에는 원자를 믿고 있었다. 그 원자의 개념을 사용하여 계수를 나타냈다면 오늘날 사용하는 화학식과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터인데, 그는 그의 화학과 원자를 결합시키려하지 않았다. 결국 새로운 화학은 프랑스의 라부아지에를 떠나 영국의 보일에게로 이동하게 되었다.

 

화학적 원자론의 확립

고대의 형이상학적인 원자론을 과학이론으로 승격시킨 것은 화학이었다.

 

베르톨레(1748~1822)은 화학 반응 속도와 진행 정도는 화학적 성질의 함수가 아니라 시약의 양과 농도의 함수라는 것을 밝혔다. 프루스트(1754~1826)은 혼합과 화합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구별했다. 그리고 화학의 발견으로서가 아니라 화학의 공리로서 현재 배수비례의 법칙으로 알려진 원리를 정했다. 이러한 발견등은 양적 화학의 개념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화학반응을 원자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의 실마리가 되었다.

 

존 돌턴(1766~1844)은 화학결합은 원자대 원자의 결합이라고 하는 가설을 내세웠다. 그의 과학스타일은 모형으로 사고하는 도식적 취향을 갖고 있었다. 화학적 원자론의 성공은 때에 따라서는 참신한 모형에 의한 사색이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의 좋은 예가 된다. 그는 용해도 문제를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기체 원자의 상대적 중량을 측정하기 위해 화학적 화합 당량으로 나아갔다. 돌턴은 "최대 단순성의 원리"와 함께 원자 가설을 화학에 도입했다. 이 가설에 의하면 두 원소가 결합하여 단 하나의 화합물을 만들 때는 AB라는 이원자 화합물이 된다. 몇 개의 화합물이 된다면, 이원자 화합물 다음에는 삼원자화학물을 만든다. 그는 상대적 중량을 도입하였다. 그래서 수소의 중량을 1로 하면 산소는 5.66, 질소는 4, 물은 6.66이라는 것이 돌턴이 얻은 결과였다. 이 결과는 개선되어 산소는 8이 되었다.

 

그는  이러한 더 나아가 결합을 하는 원자의 수에 대해 생각했다. 이리하여 서로 결합하는 모든 화학 원소의 수 및 무게를 결정하기 위한 일련의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화학 철학의 새 체계>에서 돌턴은 입자의 크기라는 답할 수 없는 문제를 제쳐놓고 중량과 수에 주의를 집중한다. "단순 물질 및 복합 물질의 궁극 입자의 상대적 중량, 복합 입자를 구성하는 기본적 입자의 수, 이러한 것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과 유용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이 책의 주요한 목적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돌턴은 화학 혁명을 완성했다.

 

"최대단순성의 원리"는 오류이다. 돌턴에게 물은  HO였고 산소의 원자량은 8이었다. 그의 중량 측정은 대부분 부정확했다. 그러나 사실에서는 자주 틀렸지만 원리에 있어서 그는 옳았다. 과학의 진보에 있어서 화학이 중요한 위치로 이동한 것은 돌턴 부터였다. 돌턴은 라부아지에가 극복했던 모든 난문제, 즉 연소와 반응의 이론, 정량기술, 용어의 합리화등을 모두 이것들에 수반되는 화학 지식과 함께 당연한 것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돌턴은 그것들에다 17세기의 입자 철학을 읽고 얻은 옛 지혜를 그대로 적용했다. 

 

돌턴은 그의 원자론을 이렇게 말한다. "어떤 철학자들은 모든 물질이란 아무리 다른 것일지라도 같은 것이며, 그것들의 외양이 심하게 다른 것은 그것들에 전해지는 어떤 힘 및 결합이나 배열의 다양성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것이 그(뉴턴)의 생각에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의 생각도 그렇지 않다. 나는 서로 변형되는 일이 절대 있을 수 없는 기본적 입자라고 불리울만한 것이 상당수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돌턴이 화학의 수학화에 기여한 것은 바로 그의 원자론이다. 화학의 수학화를 위해서는 유동체을 다루는 화학보다는 셀 수 있는 입자를 다루는 화학이 더 낫기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화학은 객관성을 지닌 과학으로 발전해 나간다.  

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피스 지음

 

제5장 과학과 계몽사조

18세기 계몽사조는 합리주의와 낭만주의 두 갈래가 있다. 뉴턴의 사상이 이 계몽사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합리주의는 뉴턴의 과학적 원리를 수용하여 그 철학적 원리로 삼았다. 그와 같은 사상가들은 볼테르, 로크, 콩디약, 콩도르세등이 있다. 반면에 낭만주의는 뉴턴 과학의 객관성의 결과로 나타난 몰인간성에 대한 반동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낭만주의 사상가들은 루소와 괴테, 디드로가 있다.  

 

뉴턴을 계승한 합리적 계몽사조

계몽사조는 16~18세기에 유럽 전역에 일어난 사상으로 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둔 구시대의 정신적 권위와 사상적 특권, 제도에 반대하여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제창하고, 이성의 계몽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꾀하려한 혁신적 사상이다. 그 특징은 합리적, 인간적, 계몽적이라 할 것이다.

 

계몽된 인간들은 인간 세계에서 뉴턴의 조화와 질서의 세계와는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투쟁과 무질서, 미신등을 직시하게 된다. 이에 그들은 구시대의 질서를 버리고, 다른 시대를 만들어 갈 규범을 확립하고자 했다. 인간 세상의 질서의 원리를 발견해 내고 인간 본성의 법칙을 알아내어, 그것에 따르도록 촉구함으로 계몽된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계몽사조의 과학 이데올로기는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등이 지니고 있던 합리성이라는 특징을 공통분모로 한다. 베이컨의 분류에 기초한 박물학, 데카르트의 이성에 근거한 형이상학, 뉴턴의 원자론적이며 대수학적인 물리학등이 계몽사조 과학의 근간이 된다. 합리적 전통은 경험주의와 협력하고 인간을 자연에 맞추려는 과학 전통을 발전시킨다.

 

뉴턴에 반발한 낭만적 계몽사조 

과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가치의 영역에서 과학은 완전한 무능력이다. 앙리 푸앵카레는 <윤리와 과학>에서 '과학적 윤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부도덕한 과학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계몽사조는 과학의 업적을 수용하기는 하지만 도덕과 교훈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낀다. 그들은 그 이상을 과학에 요구한다.   

 

뉴턴의 과학은 객관적이다. 그것은 진술적이이다. 규범의 의미 즉 "그래야 한다"라는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뉴턴 과학에는 인간이 설 자리가 없다. 인간성 회복을 부르짖는 낭만파 전통은 풍부한 의미와 목적을 지닌 자연을 그리워한다. 그들은 기계론적 자연으로부터 유기체적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을 인간에 적합하게 하려는 과학을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에서 생물학이 발생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뉴턴 과학의 객관성에 맞서는 과학의 주관성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계몽사조의 합리주의적 사상가들에 미친 뉴턴의 영향

볼테르

볼테르는 해방자로서의 뉴턴을 신봉했다. 뉴턴의 과학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의 독단론을 깨부수었다. 볼테르에게 있어서 자연의 객관화는 자연 상실의 비극이 아니라 사상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의 좌우명 "사실로 하여금 승리하도록 하라"는 그가 형이상학으로부터의 해방을 간절히 원했음을 잘 드러낸다.

 

로크

로크의 <인간 오성론(1690)>에서는 인간성의 연구에 뉴턴식 과학이 접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볼테르는 로크에 대해 "여기 마침내 겸허하게 혼에 대하여 기술한 현자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로크의 인간본성에 대한 연구는 "기술" 즉 객관적인 진술적 성격을 갖는다. 이 진술적 성격은 뉴턴과학의 객관성과 맞닿아 있다. 그와는 다른 규범적 성격의 법칙이나 원리는 물리과학과는 다른 사회과학의 특징이다.   

 

그는 물리학적인 논의와 추론 규칙으로 그의 사상을 펼쳐나간다. 로크는 "이 논문의 목적은...지식을 탐구하고, 어떻게 정신이 그 지식에 도달하는 지를 물을 뿐, 사물의 원인이나 생성 방식에 대해 묻는 것은 아니다...단지 감지할 수 있는 부분의 다양한 양, 형, 수, 구조, 운동을 발견할 뿐이다."라고 말함으로 그의 연구 대상은 본성이 아니라 그것의 작용에 관한 지식임을 밝힌다. 이는 뉴턴의 중력의 법칙이 중력의 본성이나 그 원인을 밝히는 데 있지 않고 그 작용에 대해 진술한 것이라는 점과 평행을 이룬다.  

 

로크의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는 물리학을 모법으로 삼고 있다. 그는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뉴턴적 물질관을 기초로 삼는다. 즉 뉴턴의 원자론을 그의 연구에 적용시킨다. 그의 원자론적 정신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정신에는 기본적인 관념들이 있는데 이는 원자들 처럼 미립자적인 관념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원자적인 관념들이 입자처럼 서로 반발하거나 결합하여 새로운 관념을 형성한다. 이 관념의 연합은 만유인력의 법칙에 대응하는 '지성의 운동론'에서의 법칙이다.

 

콩디약

콩디약은 '과학은 곧 언어'라는 명제 아래 대단히 독자적인 언어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언어를 경험에서 유래한 기호의 인습화로 보았다. 그리고 언어는 정신의 가장 고상하고 복잡한 작용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 원인으로 파악한 것이었다. "추론의 기술은 언어를 잘 배열하는 것일 뿐이다"라는 그의 말에 드러나듯이, 그는 학문을 개조하는 길은 언어의 개혁에 있다고 믿었다.

 

뉴턴 법칙이 수학적이었던 것처럼, 콩디약은 대수학을 그의 언어 이론의 모범으로 삼았다. 대수학과 언어는 기호라는 공통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조직적인 명명법을 고안하여 사물과 관념, 자연과 기억을 명확시 결합시키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 언어를 대수학의 기호처럼 과학을 위한 정확한 도구로 만들고자 하였다. 이러한 콩디약의 이론은 분류학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칼 폰 린네(1707~1778)의 식물학 체계는 명확한 명명법을 그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는 꽃의 형태를 사용하여 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명명하였다. 그의 이러한 방법은 동물학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콩도르세(1743~1794)

콩도르세의 <인간 정신의 진보의 역사적 전망에 대한 개관>에서는 언어는 인간을 미개상태에서 공동체로 발전시켰으며, 경험의 공유가 인간 사회를 진보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무지, 미신, 광신등에 의해 무지에 빠진 인민들은 권력자들에게 의존적이 되었었다. 모든 역사는 이 무지의 극복의 역사이다. "정치와 윤리의 모든 오류에는 철학적 오류에 근거해 있고, 더 나아가서 이것들은 과학적 오류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종교 체계와 초자연적인 방종는 모두 자연 법칙에 대한 무지에 근거해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그러한 오류를 시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무지를 극복할 수 있으며, 이 무지의 극복으로 인간의 완성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 

 

디드로의 백과전서

놀랍게도 과학은 산업혁명을 일으킨 복잡한 기술 혁신과 거의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18세기에 이론 과학이 산업에 제공한 것은 과학적 방법이었다. 뉴턴의 과학적 방법은 무엇이었는가? 뉴턴은 모든 측정가능한 요소들을 분석하고 분해한 후, 이 요소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수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디드로(1751~1772)의 평생의 업적인 <백과전서>의 기술에 이와 같은 방법론이 적용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과학-기술-직종에 대한 분석 사전>인데, 이 책은 그 자체가 산업의 박물학이라 할 만 하였다. 이 책에서는 산업의 여러 요소들을 분해하고 다시 재조립하며 그에 대한 정확한 명명법을 적용하는 등의 과학적 방법론이 사용되었던 것이다.  

 

계몽사조의 낭만주의와 뉴턴 과학의 대립

낭만주의는 뉴턴의 과학에 대해 반대선상에 놓여있다. 낭만주의 정조가 계몽사조의 한 갈래임을 생각해 볼 때 이는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낭만주의의 기본 정신 즉 인간성의 회복을 생각해 볼 때 뉴턴 철학에 대한 반발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괴테는 낭만주의 최대의 정신이라 불린다. 그는 문학적 지성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과학에 대한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학 저술에서 그는 뉴턴주의에 대해 전면적이며 체계적인 반발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 루소, 그리고 디드로등이 뉴턴의 수학적인 물리학이 보여주는 인간소외의 정신, 몰인간적인 자연관에 대한 심한 혐오를 느끼며 뉴턴과는 다른 자연상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러한 낭만주의의 과학 정서는 주관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그것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과학의 주류로 자리잡지 못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었다.

 

루소

루소는 자신의 논문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도덕을 부패시켰는가, 향상시켰는가?"에서 과학은 인간성과 도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뉴턴적인 과학이 인간성의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에 불타는 낭만주의적 정신은 인간을 소외한 객관성을 지닌 과학이나, 또는 그러한 정신, 그러한 과학자나 지성인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디드로

디드로의 <백과전서>는 뉴턴의 과학적 방법의 틀로 저술되었지만 그 안에는 낭만주의적 정조를 담겨 있었다. 즉 그 컨텐츠만큼은 낭만주의적이었다. 또한 <숙명론자 자크>에서 디드로는 "물리적 세계와 도덕적 세계의 구별이 ...무의미한" 그런 자연철학을 제시한다. 디드로 과학의 대상은 자연에서 생겨나는 덕이며, 질서의 원천은 전우주적인 인격이었다. 그것은 스토아 학파적인 것이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자연으로부터 행위의 법칙을 찾아내며, 우주와 인격체간의 교감과 조화를 중요시하였다. 뉴턴의 물리학의 객관성과는 다른 주관적으로의 회귀의 모습이 디드로의 자연 과학 철학에 나타났다.  

 

데카르트는 자연을 알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연구하였다. 하지만 디드로는 자기 자신 즉 인간을 알기 위해 자연을 연구하였다. 그에게 있어 과학의 무기는 수학적 추상이 아니라 도덕적 통찰이었다.   

 

브넬

브넬은 <백과전서>의 화학항목을 저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 당시 시작된 화학은 디드로의 자연관을 닮은 스토아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과 교감을 중요시하는 공감적인 화학이었다. 그러한 화학은 뉴턴적 물리학에 의해 속성이 박탈된 물체에 그 속성을 회복시켜주려 했다. 화학자들은 화합과 분리등의 여러 현상들에서 "자연의 생명"을 감지하려 하였다. 생명이 배제된 뉴턴적 자연의 빈곤을 다시금 충만케 하기 위해서 말이다. 

 

괴테

괴테는 분석, 분해, 분류등의 원자론적 방식에 본능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결합, 동화, 조화였다. 그에게 있어 린네의 식물학은 형태에 따른 몰인간적인 분류의 원리일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사상에 맞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바취라는 박물학자의 체계를 좋아했는데 바취의 방법은 존재의 연쇄 속의 진보에 대응하는 형상에 따라 식물을 배열하는 것이었다. 

 

괴테가 뉴턴의 <광학>에 반대하는 색체이론을 주장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뉴턴의 빛의 분석은 원자론적인 것이었다. 즉 단일한 것으로 여겨지던 빛을 다양한 광선으로 분해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프리즘을 통과시킴으로 얻게 된 결론이었다. 하지만 괴테는 "본능적으로" 뉴턴의 색채론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의 기본 사상은 분석이 아니라 조화였기때문이다. 그는 빛의 가장자리가 어둠을 두들길 때 색채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색채는 빛과 어두움이라는 양극 사이의 긴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빛은 실재의 흐름이고, 내재하는 신성의 현현이며, 영혼과 마찬가지로 분할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암흑은 고뇌이고, 비존재며, 죽음이었다. 이 사이의 긴장이 색채로 자각되는 것이었다. "색채는 빛의 고뇌이다"라는 그의 말은 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진술은 괴테의 과학적 진술이기도 한 것이다.  

 

뉴턴의 방법은 자연을 수학에 의하여 추상화하고, 망원경, 프리즘, 거울 등의 도구로 자연을 괴롭힘으로써, 결국 자연을 핀에 꽂힌 나비처럼 숨을 거두게 하고 만다. 괴테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넓은 하늘 밑에서, 번거롭고 인위적인 기교도 부리지 않고, 일생동안 공감적인 지각으로써 관찰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괴테의 낭만주의적 정서였다.  

 

괴테의 과학은 모두 그의 개성과 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베이어드 테일러는 "그의 지성은 인간과 자연, 즉 개인과 종족과 세계를 하나의 일관되고 조화적인 조직으로 결합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거기에서는 시, 산, 꽃, 조상이 모두 동일한 성장 법칙을 따랐다."고 말했다. 시인 괴테나 과학자 괴테에게서 이 목표는 바뀐적이 없었다. 그의 과학에 대한 주관성은 바로 이러한 그의 정서의 결과물인 것이다.  

 

괴테와 디드로의 뉴턴 과학에 대한 공격은 잘못된 흐름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은 자연의 통일과 현상의 다양성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였으며, 이 둘 사이의 조화를 위해 오랫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일종의 주고 받는 대화를 지속해 왔다. 하지만 낭만주의 정조를 바탕으로 한 이러한 흐름은 분명히 잘못된 방향 전환이라 할 수 있다.  

 

낭만주의와 객관적 과학

낭만주의 정조의 뿌리는 인간성, 도덕성이었다. 이에 대한 열망은 물리학에 대한 반역의 동기가 되었다. 뉴턴의 물리학은 자연을 객관화하였다. 뉴턴의 물리학은 계량적, 수량적 과학이었다. 하지만 낭만주의는 인간과 자연이 합일할 수 있는 과학을 지키고자 이에 대항하였다. 낭만주의는 과학의 중심에다 물리학 대신 생물학을 놓으려고 했다. 낭만주의는 질서의 모범으로서 기계론 대신에 유기체를 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과학이 자연에서 발견한 것 이상을 자연에게서 기대하고 있었다.

 

낭만주의는  디드로의 자연주의적이고 도덕적인 과학, 괴테의 자연의 인격, 워즈워드의 시, 알프레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가장 고상하게 꽃을 피웠다. 또한 과학에서 질적이고 심미적인 자연 인식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의 정신을 모두 고취하는 면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길은 과학의 길은 될 수 없다. 다만 예술이나 역사주의의 길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피스 지음

 

뉴턴은 흥미롭게도 갈릴레오가 사망한 1642년에 태어났다. 그는 1665-1666년에 미적분을 발견해내며 광학 색채이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해에 달 궤도에까지 미치는 중력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작 뉴턴 경(1642~1727)은 어떻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그는 "언제나 그에 대해 사색함으로써" 그러한 발견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베이컨적인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데카르트적인 명석함에 의지하여 그 발견을 이루었다. 그가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된다. 뉴턴의 물리학의 특징은 수학적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론 물리학이나 수리 물리학은 갈릴레오와 뉴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뉴턴은 실험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밝혀진 사실들을 통합하고 그 이면을 들여야 보는 능력과 그것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실 뉴턴은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 호이겐스(1625~1695)등의 연구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선택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갈릴레오로부터는 단순히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운동의 변화가 수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케플러의 제3법칙 즉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궤도 중심에서의 평균거리의 세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으로 부터 행성에 작용하는 힘은 그 궤도 중심에서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계산해내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또한 뉴턴은 데카르트로의 관성과 곡선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뉴턴보다 조금 앞서 호이겐스(1625~1695)는 원운동은 중심방향으로 가속된 관성 운동이라는 분석을 내 놓았다. 뉴턴도 호이겐스와는 별도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뉴턴이 호이겐스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뉴턴은 호이겐스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즉 달이 그 궤도를 도는 것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같은 현상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만약 달과 사과가 같은 힘에 의하여 움직인다면 천체의 움직임은 만유인력의 법칙하에 있는 관성 운동의 웅대한 예가 된다는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모든 천체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그 관성 운동은 만유인력에 의해 가속되어 원운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개념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서로 달라 보이는 것을 하나로 결합하는 뉴턴의 창의적 사색과 명석함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엄밀한 증명은 1685년에 이루어진다. 그는 케플러의 법칙과 호이겐스의 원심력을 결합한 엄밀한 기하학적 연역으로 그는 중력의 법칙을 천체의 규모로 증명한다. "나는 행성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원심력에 의하여 타원위를 회전한다는 명제를 발견했다." 당시 후크는 분명히 인력은 천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거장들 중 한 사람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과 젊은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1656~1742)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힘의 법칙으로 부터 천체의 운동을 연역해 낼 수학적 능력이 없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한다. 이 때 핼리 혜성으로 널리 알려진 천문학자 핼리가 이 책을 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그는 조폐국 장관으로 취임하며, 왕립 학회 회장이 된다. 기사 작위도 수여받고 1727년에 사망한다.   

 

 

뉴턴의 광학이론

1665년 뉴턴은 일차 프리즘을 통과한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이차 프리즘에 통과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각 색채의 광선은 특유의 굴절량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굴절량은 보라색으로 갈수록 커지고 빨간색으로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에 뉴턴이 내린 결론은 백색광은 여러 종류의 색채를 가진 혼합광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빛과 색채에 관한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빛에 대한 이러한 발견은, 빛은 단일하며 기본적인 것인 것으로 나뉠 수 없다는 뿌리깊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뉴턴은 그의 색채이론에 반대하는 로버트 후크(1635~1703)와 그 외 많은 사람들과의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1675년 뉴턴은 빛과 색채에 관한 두번째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에테르 가설을 내세웠다. 이것은 에테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도입한 것이었다. 그는 에테르 가설을 물리학의 구조상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뉴턴의 빛 이론은 기본은 빛의 입자설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뉴턴 빛 이론의 핵심은 그 입자적 구조보다는 오히려 빛의 복합적 본성에 있다. 뉴턴의 빛은 단일 색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광선의 혼합광이다. 뉴턴의 빛은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일한 광선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었다. 뉴턴의 광학적 원자론은 오해받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구성 성분이 원자로 이루어진 것 처럼 빛의 구성 성분이 광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광학적 원자론은 철학적 원자론과의 구조적 일치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빛의 입자설을 뉴턴이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오해인 것이다. 뉴턴은 경우에 따라서 빛을 입자로 보는 것이 더 유용할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으로 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뉴턴은 빛 파동을 횡진동이 아니라 종진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저술 <프린키피아>

뉴턴의 이 책은 과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자기학, 열, 광학 등 다른 물리학 분야는 뉴턴적 원리의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이라 할 만큼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 많이 읽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책은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기하학을 사용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해 나가고 증명하였기때문이다. 만일 그가 발명한 미적분등을 이용하여 17세기의 새로운 해석학으로 표현하였다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린키피아>는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저항 없는 매질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것이다. 2권은 저항이 있는 매질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유체역학과 관계된 것이다. 그는 유클리드처럼 몇 가지 기본 정의와 세개의 공리로부터 수학적 연역을 사용하여 결론들을 유도해 낸다. 제3권은 주로 천문학과 관련된 물리적 지식과 관련이 된다. 뉴턴은 보편적 우주관을 형이상학적인 추론에 의하지 않고, 기하학적 증명에 의해서만 설명하려 했다. 그는 운동의 법칙을 태양계에 적용시켜서, 케플러의 타원 궤도가 천체의 필연적 결과임을 증명했다. 또한 우주의 모든 물체는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달의 운동과 조수도 이러한 기본적인 힘의 영향아래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중력의 법칙으로 무한한 우주에 놓여 있는 지상과 천체의 과학으 통일시킨다. 이로써 이전의 지상의 물리학과 천체의 물리학이 다르다는 통념을 집어 던져버렸다. 

 

뉴턴의 신학

뉴턴은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종교인이 사람됨이나 태도를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 연구에 열심을 보였다. 개인적인 성경연구의 결과 그는 후년의 많은 합리주의자들처럼 삼위일체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신이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했다는 것과 그것이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뉴턴은 태양계에 있어서 누적되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불규칙성을 신이 조정해 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 신은 가설도 과학의 대상도 아니며 신은 확실성이었다. "신은 영원히 존속하며 어디든지 존재한다. ...신의 본질에 관한 관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자연현상이라는 신의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취향과 궁극 원인에 의하여 신을 알 뿐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쯔는 뉴턴의 과학이 자연신학을 파괴하는 자기충족적 유물론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상가들은 라이프니츠에 동조하여 영혼이 없고 결정론적인 세계-기계상을 수립한 책임이 뉴턴이론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호이겐스나 퐁트넬 같은 분별있는 사람들은 뉴턴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기계론적으로 불충분하여 오히려 자연신학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뉴턴 이론의 반형이상학적 특징

뉴턴의 이론은 성공적이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형이상학적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와 "왜"를 동시에 설명해 주는 체계를 원했었다. 하지만 뉴턴은 천체의 운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왜 중력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중력이 확실히 존재하고 우리가 설명한 법칙에 따라 작용하며, 천체와 해양의 모든 운동을 설명하는 데 풍부한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도 만족하지 않는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현상 가운데에서 중력의 여러 성질들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현상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설이라고 불러야 하기때문이다. 가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물리학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기계적인 것이든 실험 철학에서는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뉴턴의 그러한 입장에 비해 볼 때 '모든 물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미묘한 영"에 대한 그의 입장이나, 에테르가설등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과학성과 더불어 종교성도 아울러 함께 지니고 있는 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뉴턴과 뉴턴의 과학

뉴턴에게서 처음으로 이론과 실험이 대등하고 가장 직접적인 수준에서 만난다. 실천에서나 원리에서나 뉴턴은 계량 과학으로서의 물리학과 수량의 언어로서의 수학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수립했다. 뉴턴은 물리학과 천문학을 운동하는 물질에 관한 단일 과학으로 종합했다. 그리고 중력을 진공으로 돌입시킴으로써 그는 공간의 연속성과 물질의 비연속성을 조화시켰다. 힘과 운동으로는 연속이고, 물질로는 불연속이다

 

과학은 과학자에 의해 창조되지만, 그것은 자연에 관한 것이지 그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일단 그것이 창조되면 그것은 예술작품처럼 독립성을 갖는다. 인간 뉴턴은 꼴 사나운 오만에 빠진 적이 있었으며, 경쟁자에 대한 불관용을 나타내면서 추악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였다. 로버트 후크와의 광학논쟁이라든가 미적분을 둘러싼 라이프니쯔와의 진흙탕 싸움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뉴턴의 과학은 겸허하다. 데카르트는 세계는 이래야 한다고 단독적으로 규정했다. 뉴턴은 단지 그것이 어떻한 상태로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만을 말했을 뿐이다.

 

뉴턴의 이론이 이후의 세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해 볼 때, 뉴턴적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은 의식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한 요소이며, 뉴턴이 없는 문화 속에 존재하는 것은, 교양있고 깨어있으며 그만큼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는 길이다. 찰스 길리피스의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한 오만한 자신감?

 

뉴턴의 세개의 얼굴

뉴턴은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논쟁자 뉴턴, 신학자 뉴턴,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자 뉴턴. 각각의 얼굴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과학자 뉴턴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뉴턴은 이 세개의 모습이 어울러져 있는 것이다.   

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스피 지음/

 

제3장 새로운 철학

 

17세기의 철학은 자연을 탐구하여 그 신비를 밝히려는 목적을 가진 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철학은 철학이라는 허울을 벗고 진정한 과학, 객관성을 갖춘 과학으로 발전해 갔다. 새로운 철학은 과학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고대 과학의 특징

르네상스 이전의 과학은 근대과학과는 다른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분류 그리고 현상의 설명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다. 하지만 근대과학은 이러한 특징을 탈피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근대과학의 두가지 흐름

갈릴레오는 과학과 수학을 결합함으로 과학에 객관성을 부여하였다. 이와 함께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의해 고무된 실험과학 역시 고대과학의 낡은 프레임을 걷어버렸다. 또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은 경험주의와는 대척점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한 줄기 흐름을 담당하였다. 근대과학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근거한 실험물리학과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이론물리학의 두가지 흐름을 갖게 되었다.     

 

3장의 주요 내용

제3장 새로운 철학에서는 갈릴레오 이후 그리고 뉴턴 이전의 과학사조와 그에 따른 과학의 발전사를 다루고 있다. 르네 데카르트가 과학에 미친 영향, 그리고 뒤이어 베이컨에 바탕을 둔 실험물리학의 성과, 마지막으로 베이컨이 주장한 과학의 대중화 내지는 사회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느니 살펴본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17세기 과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공허한 철학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베이컨과 의견을 같이하나,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 베이컨은 유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데카르트는 명석함에 의거하여 과학의 재건을 꾀했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실험과 귀납을 신뢰한 경험주의라면, 데카르트는 이성과 연역을 신뢰한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관성의 발견

데카르트의 관성에 대한 이해는 순수한 이성의 놀랄만한 업적이다. 그 이해는 경험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성에는 무한까지의 불변의 운동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운동은 실제로는 결코 일어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성의 개념은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현상보다는 자신의 사고를 더 크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관성의 법칙을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과학은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석함'에 의지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극도의 추상적인 성질인 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와 수학

데카르트가 과학에 끼친 또 하나의 큰 유산이 있다. 그것은 수학이다. 그는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으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때문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한 발판은 '이성의 명석함'이었고 또 다른 발판은 수학이었다. 그의 명증성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시작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의 직각좌표의 발견과 도입은 이러한 그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는 직선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었으며, 모든 존재들 사이의 관계나 비례를 두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에 놓고 연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명확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좌표계의 도입으로 데카르트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하게 되었다. 공간적 연속의 수학인 기하학과 불연속적인 양의 수학인 대수학을 결합시켰던 것이다. 이를 이어 받은 뉴턴은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공간개념과 구체적이며 불연속적인 원자론적인 물질개념을 통합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

이러한 이성과 수학을 무기로 데카르트는 '세계는 하나의 기계'라는 기계론을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정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정신이 존재한다면 그 정신 밖에 있는 또 다른 것의 존재 즉 물질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논리하에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이원론적인 생각이 나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비어있는 공간개념보다는 물질로 가득차 있는 공간개념으로 이끌었다. 결국 공간은 물질이며, 세계는 물질을 구성성분으로 가진 기계라는 사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우주의 모습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가 자연에 대한 궁극적 이해에서 실패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데카르트의 한계

데카르트는 자연이 아니라 이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과학의 주제는 자연이며, 수학은 도구, 수단, 또는 과학의 언어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언어와 주제를 혼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단일한 일반화를 가지고 행위와 원인을 일거에 설명하려 한다. 그 단일한 일반화는 기계론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명석하고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도 자신이 비판한 철학의 공허함이라는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과학사에서의 데카르트의 위치

하지만 데카르트는 철학과 과학사에 있어 위대한 공헌을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르네상스 과학은 주로 문화와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문화와 철학은 주로 과학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의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서 있다. 그로부터 자연에 관한 지식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아갔다. 과학은 법칙의 균일성만을 가정할 뿐 진리의 통일, 우주 인격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직접 과학에 총괄적인 공헌을 한 최후의 위대한 체계적 철학자였다.

 

원자론

고대 원자론

데카르트의 기여가 이론 물리학에 있다면 베이컨은 실험물리학에 그 기여가 있다. 이 실험물리학은 원자론에서 그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진공에 대한 실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원자론 학파에서는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가 있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물체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고대 원자론들은 이와 같이 무한한 진공속에 입자(물체)를 넣었고, 그리고 그 공간내에서의 물체의 움직임 즉 운동이 가능하다는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원자들의 배열이며, 변화와 진행은 입자의 물리적 재배열일뿐이다고 보았다. 심지어 영혼과 지성도 단순한 미립자의 배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감지하고 판단하는 물질의 제 2성질 - 색, 냄새, 맛, 형, 감촉 - 은 우리 속에 있는 지각의 양식에 불과하며 이러한 지각은 자연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운동이란 자연의 본질 즉 원자와 관련된 것이지만 물제의 제2속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중세시대와 원자론

이러한 원자론을 철학에 받아들인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원자론이 지니고 있던 객관성은 목적론을 배제했기때문에 자연에 대한 신의 역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자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 않고 신들의 도움없이 우주를 운행시킨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자연관은 신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도덕적 권위의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고대 원자론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시대에서는 찬밥신세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상황이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진공의 발견

17세기에 들어 피에르 가상디(1592~1655)에 의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과학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손으로 즉 실험을 통해 과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원자론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원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원자가 놓여있다고 가정되는 진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오래된 목적론적인 원리를 반박할 수 있는 단서를 실험을 통해 찾았다.  

 

갈릴레오의 탁월한 제자인 토리첼리(1608~1647)은 수은 기압계를 발명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신 수직관의 열린 쪽을 수은 용액 속으로 거꾸로 뒤집어 넣고, 그 수직관 속의 액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수직관 속의 수은이 그 수직관을 타고 내려옴에 따라 형성되는 빈 공간의 의미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이 진공공간이었다. 그는 진공을 만들 때 받는 저항은 진공 혐오의 원리때문이 아니라 공기의 무게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우리는 공기의 대양의 밑바닥에 살고 있으며, 이 공기는 무게가 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말했다. 실험으로 진공을 만들어냈던 것이었다. 이 진공은 원자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던가? 원자론이 이러한 실험에 의해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파스칼은 1648년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내려간다고 하는 유명한 실험을 실증하여 온 유럽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혐오라고 되어 있는 현상은 모두 공기의 무게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참된 원인을 간파하지 못할 때, 그들은 교묘하게 가상적 원인을 만들고 여기에다 특수한 이름을 붙여서 이성이 아니라 그 귀를 만족시킨다."

고 이야기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의 무지함을 비판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드러내 보였다. 

 

보일의 입자철학

실험 물리학은 로버트 보일(1621~1691)과 함께 본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진공에 존재에 관한 토리첼리와 파스칼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공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연기가 흩어지는 것, 새 털이 총알처럼 낙하하는 것, 그 속에 쥐를 넣어 두면 죽는 것등을 증명했다. 일반적으로 보일은 화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희망했던 바인 원자물리학자라고 간주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공보다는 그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공보다는 펌프의 작용과 공기의 반응 즉 "탄성"에 더 흥미가 있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들을 "입자 철학"의 자료로 삼을 생각으로 계획했다. 그의 '입자철학'이란 '입자과학'과는 다르다. 즉 보일은 공기가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원자 모형은 그 현상을 "알기 쉽게"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입자론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것이다. 보일은 입자 철학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중요한 물리학자였다.

 

보일은 실험물리학을 발전시킨 큰 공로가 있지만 그의 과학은 완벽한 의미에서 객관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그의 과학이 '입자과학'이 아니라 '입자철학'으로 불려야 했다. 왜 그런가? 보일의 과학은 상식의 과학이었다. 보일의 입자설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하나의 생각, 즉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을 발견했지만, 기체의 화학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백년이 더 지나서 돌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입자철학"은 수로 표현된 적극적 의미로서의 객관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베이컨의 실험주의는 보일과 영국의 왕립학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베이컨의 영감이 보일에게 작용하여 원자 물리학을 진공으로부터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공존

과학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수학은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만으로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모든 이론이 객관성을 확립하려면 실험적 방법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즉 데카르트와 같이 순수하게 이성과 추상적인 수학에 기대는 사람들은, 사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탐구하는 실험가들에 의하여 재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과 수학에 실험이 더해진다면, 또한 거꾸로 뒤집어 실험에 이성과 수학을 덧붙인다면 어떤 결과가 산출될까?

 

역사는 이와 관련하여 어떻게 흘러갔을까? 실험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이컨은 다소 천박한 반지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과학자들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편협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의 축적과 분류로써 얻은 질서를 추상과 수학 공식에 의하여 얻어진 질서와 대립시키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들은 베이컨식의 방법과 데카르트식의 방법의 장점을 다 함께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리학은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이라는 두개의 멜로디가 잘 어우러진 음악이 되었다.  

 

과학의 사회성

베이컨의 예언대로 과학은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필요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발전시켰다. 역사적으로 두개의 탁월한 과학단체가 있었다. 런던 왕립학회(1662)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가 그것이었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의 지식인들은 장소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살롱을 형성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적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지방의 동료와는 서신에 의존했다. 이 그룹의 중심인 메르센느(1588-1648)신부는 과학의 가십을 전하는 사람으로 "학계의 우편함"으로 유명했다.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베이컨의 새 과학상으로 제시된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요소들이 있었으나 자발적인 성격보다는 국가 통제적 전통에서 구상된 것었다. 그것은 프랑스 공업의 기술적 감독과 개량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영예를 누렸다. 이렇듯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과학이 좀 더 전문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루이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성숙한 과학자들은 데카르트나 파스칼 세대에 비하면 훨씬 빈약했고, 뉴턴 시대에 왕립학회에 모여들었던 영국의 천재들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18세기 계몽사조나 나올 때에야 비로소 그 우위가 드러나 보였다.

 

영국의 왕립학회

이에 비해 영국의 왕립학회는 또 다른 성격을 지닌다. 프랑스의 왕립아카데미는 국가의 관리하에 전문화의 길을 걸었다면 왕립학회는 정직한 아마추어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17세기 과학 대중의 요구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으로 성립되었다. 왕립학회는 성실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려하고, 경건, 학문, 인간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토론을 거듭했던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하여 과학의 방법과 양식에 있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윌킨스는 놀랄만한 통찰력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의 수학화와 베이컨의 과학의 사회화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윌킨스가 과학의 성과중의 하나로서 의견교환이 아니라 사물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언어"의 고안인데, 이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항구적인 조직을 세우고자 국왕의 은혜를 구했다. 1662년 예비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자연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재가를 받았다. "왕립"이라는 칭호는 국왕의 관용을 표시할 뿐, 지원은 없었다. 실제적인 지원은 공공심 있는 후견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기의 실험실이나 재정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은 학회의 실험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향상"에 실제로 종사하던 보일, 로버트 후크, 에드먼드 핼리등이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리하여 왕립학회는 협동적인 문화 운동을 체현하였다. 왕립학회는 영국식의 자발적인 단체로, 대륙에서라면 공영 기관이 되엇을 것에 민영 사업이 손을 뻗힌 것이었다.

 

과학의 대중화 및 사회화

과학 대중이 없었더라면 사회적 활력으로 되기에는 너무 세련된 수준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후계자 및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고상한 개념이 교환되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즉 과학의 사회화를 통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과학자들은 고립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으로 부터 이렇게 동떨어진 견해는 없다. 어는 인문학자는 '그의 과학자 동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집단을 이루고 샘이 날 정도의 연구비에 힘입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며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훌륭한 결과를 맺는, 토론을 하기에는 하등의 방해도 안 될 것 같은 집회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과학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공통의 이해>에서 과학 안에서 살고 과학 안에서 존재하는 참된 공동체를 감동깊게 고찰한다. 이것이 왕립학회가 발족했을 때부터 성취한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

이 당시의 과학과 종교는 서로 반목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등의 종교적 열정은 과학에의 열정으로 옮겨갔다. 보일은 성실한 과학자이자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자연신학은 신의 업적은 그 놀라운 자연에 나타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에의 적의, 공리주의, 타산적 자기 부정, 세상 일에 대한 소명, 합리성, 경험의 개인적 해석등은 서구 문화사의 일반적 특색으로 칼빈주의자의 행동 양식이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적 양식은 재능있는 자나 야심 있는 자를 격려하여 과학을 높여왔다. 또한 시민계급의 환경도 이러한 움직임에 합세하였다. 반면에 가톨릭과 귀족적 환경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 성향이 강한 스코틀랜드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의 역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카톨릭적 성향의 아일랜드인과 스페인인 가운데서는 두드러진 과학자 무리를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 

 

하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계몽사조시대를 거쳐 점차 목적론적인 철학과 객관성이 심화되는 과학사이의 괴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엇박자를 내기 시작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