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케루악 / 이만식 옮김 / 민음사

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3개월만에 써 낸 소설, <길 위에서>. 타자지를 갈아끼는 것이 귀찮아 타자지를 이어붙인 36미터 길이의 종이위에 단숨에 써 내려간 소설이 <길 위에서>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 마자 당시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킨다. 이른바 '히피문화'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 단초가 된 것도 이 책이란다. 리바이스 청바지와 컨버터블 자동차, 커피솝의 대유행도 이 책 <길 위에서>에 영향력 때문이라고도 한다.   





<길 위에서>는 샐 파라다이스와 딘 모리아티의 미친 여행 이야기이다. 4차에 걸쳐 미대륙을 동서로, 남북으로 여행한 여정의 기록이다. 1부는 동쪽 끝 뉴욕에서 콜로라도주의 덴버를 거쳐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길 위에 선 샐 파라다이스의 이야기이다. 2부는 뉴욕에 있는 샐이 그를 찾아온 딘 일행(메릴루, 에드던컬)과 함께 남부의 뉴올리언즈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길 이야기이다. 3부는 샐과 딘이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가는 여정이며, 4부에는 뉴욕을 출발한 샐이 덴버에서 딘과 스탠과 합류한 후 멕시코시티까지 가는 여정이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5부는 거의 미치광이가 된 딘과 샐의 마지막 해후와 슬픈 이별의 기록이다.  





딘 모리아티.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미친듯이 확인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딘의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삶의 충동은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다. 그 충동은 마구잡이로 분출된다. 딘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다만 샐과 몇몇 친구들만이 딘의 이러한 충동을 이해할 뿐이다. 관습과 형식에 매여있는 것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충동은 이러한 관습과 형식을 거부한다. 딘은 자유롭게, 미친듯이 연주하는 재즈에 열광한다. 딘의 눈에는 모든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보인다. 딘과 그의 친구들은 벤제드린이나 마리화나에 탐닉하기도 한다. 딘은 광적인 폭주(사실 그는 최고의 드라이버이기도 하다)로 동승한 사람들이 벌벌 떨게 만든다. 이 모두는 아마도 틀에 박힌 형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삶의 충동적인 에너지의 발작일 것이다. 


딘은 천재적 기억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삶의 에너지가 각각 어떻게 분출되는지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새로운 삶에 진저리칠 정도로 흥분해 하여 사방으로 펄쩍 펄쩍 뛴다. 그에 비하면 샐은 미대륙을 횡단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자연과 대면에서도 삶의 충만한 에너지를 느낀다. 거대한 대륙,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대평원의 칠흑같은 밤의 어둠, 달빛에 젖은 옥수수밭.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침묵의 공간은 존재하고 있다. 


뉴욕에서 덴버를 거쳐 멕시코시티를 향한 여정은 샐과 딘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멕시코에서의 삶이란 미국민의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위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인들은 행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


정말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야. 뭐가 급한 것인지 데대로 된 판단도 못하고 순진하리만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저들의 영혼 말이야. 만인이 인정하는 고민거리를 발견할 때까지 절대 편안해지지 못해.


그러나 멕시코인들의 삶은 얼마나 다르냐?  그들이 가난하다고 멸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는 문명이 가지지 못한 순수함과 위엄이 있다. 하지만 문명에는 특유의 독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자각과 흥분과 방황에서 딘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딘의 미친듯한 삶에 대한 충동은 결국 슬프게 막을 내린다. 

 



샐과 딘이 삶의 원초적 충동을 통제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충동에 따라 미친듯이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케루악은 필연적으로 삶의 의미와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케루악의 눈에는 현대 문명은 건설보다는 파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문명이 모든 것 즉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다. 이 모든 일이 어디로 흘러갈 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꽃은 미친 듯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신을 몰아낸 현대문명은 갈 길을 잃었다. 어떠한 삶의 길을 가야할 지 방향을 잃었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든 그 삶의 길을 가야만 한다. 삶은 길이기 때문이다. 어떤 길을 가야만 할까? 목적도 의미도 이미 무너져 버린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삶의 길은 열려져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가장 단순 명쾌한 방식으로 도에 다다르려 했다. 이봐, 너의 길은 뭐야? 성인의 길, 광인의 길, 무지개의 길, 어떤 길이라도 될 수 있어. 어떤 짓을 하든 누구에게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길이 있지. 그럼 어디서 어떻게 할래?

아무런 꿈이 없었기에 내 앞으로 세계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샐이나 딘, 그리고 딘과 같이 젊음의 충동을 마구 쏟아내면서 미친듯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그의 친구들 모두 어렴풋이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런 생활 방식은 젊음의 치기처럼 느껴지면, 그런 생활 방식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도 역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모든 사물은 가장 안정된 상태를 향해 간다. 인생도 그렇다.


이런 미친 짓과 쉼없는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어. 우린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찾아내야만 해.

이런 사진을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부모들이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사진 안에 들어 갈 만한 인생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인생의 보도를 걸어갔다고 생각하게 될까? 우리의 인생이, 진짜 밤이, 그 지옥이, 무의미한 악몽이 길이 거친 광기와 방탕으로 가득했단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잭 케루악이 이 책을 3개월만에 단숨에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멕시코로 여행하는 도중 딘은 스탠에게 자기 이야기를 좀 하라고 한다. 스탠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 지 당황스러워하자, 딘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껏 즐겨.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전부 말해봐. 그렇다해도 다 얘기할 순 없을테니까 느긋하게 해. 느긋하게.


아마 케루악이 글을 써 내려갈 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약에 취해 몽환의 상태로 생각나는 대로, 아무리 사소한 것일찌라도 마음 속에 떠 오르는 것을 거침없이 전부 써 내려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정황이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들이 <길 위에서>의 중간 중간에 나타난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런 책을 3개월만에 써내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잭 케루악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길 위에서'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자유에의 열망은 독성이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인지도.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딘의 모습에서 자기들이 추구하는 자유의 원시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딘과 같이 길위에 섰다. 하긴 좁은 울타리내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범인들에겐,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어디론가 용감하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기는 하다. 누군들 딘보다 사정이 나쁠까?






'읽은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영문예 (제19호 2015)  (0) 2016.05.20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  (0) 2016.04.27
엘리아데의 <성과 속>  (0) 2016.03.22
성과 속 발췌문  (0) 2016.03.20
책을 읽는 방법  (0) 2016.03.1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