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엘리아데/ 이은봉 옮기/ 한길사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 할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여러 번 <성과 속> 앞에서 멈칫거렸다.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 중 한 권이지만 흥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펴서 이리저리 뒤 적어 본 적도 있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목도 생경하다. <성과 속>이라니.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책들 중 나를 실망시킨 책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손 끝으로 가만히 책장을 넘긴다. 기대감 때문일까? 마음이 잔잔하게 울렁인다. 이 책은 무얼 줄까?

 

책은 깨끗했다.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책인 듯 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김에 따라 왜 이 책이 이토록 깨끗한지 이유를 알겠다. 처음에 느꼈던 긴장감과 기대감은 점점 실망감과 지루함으로 변해갔다. 얼기설기 엮인 허술한 바구니처럼, 무언가 진귀한 것을 담은 그런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끝까지 읽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더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한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고 덮어버릴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읽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내가 감지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읽는 <성과 속>은 처음과는 사뭇 달랐다. 다시 읽기를 잘했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엘리아데는 원시문화 단계에 있는 다양한 종족들의 종교적 의례 및 그들의 신화를 연구하면서, 그 다양성보다는 공통점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엘리아데는 종교와 관련된 여러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이나 영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사후의 세계와 같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생각들은 또한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그러한 사상들은 어떻게 철학의 세계로 편입되었는가? 종교적 의례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은 어떠한가?  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비종교적 인간이 가지는 실존과 존재에 대한 불안은 무엇 때문인가? 그 해결책이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속俗'의 공간은 균질하다. '속'의 공간이 균질하다는 것은 방향성이 없다는 말이다. 중심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聖스러운 공간이 이 '속'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은 더 이상 균질하지 않게 된다. '성'의 공간과 '속'의 공간 사이에 단절면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공간은 비균질해진다. 이제는 성스러운 공간을 중심으로 방향성이 설정된다. '성'의 공간은 왜 성스러운 것일까? 그 공간은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속된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와의 통로가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이렇게 '성'과 '속'의 구분함으로 그들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인 이 '성'의 공간 가까이에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 '성'의 공간을 중심으로 생활공간을 확장해 왔다.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어떻게 초월적 존재(신 또는 영)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까?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메시지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 그들에게 우주, 자연은 그 자체로 신의 계시였다. 그들은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안에서 계시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즉 신들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계 전체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계시였던 것이다.

 

창공은 단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 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122쪽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우주의 다앙한 존재 양식 즉 우주적 리듬을 생의 신비를 밝혀주는 암호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달의 변화 양상은 생의 신비를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종교적 인간들은 달이 기울어지고 이지러진 후에 다시 차 오르는 것과 같이 생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즉 죽음이 생의 마지막 종료가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생의 비밀은 달의 존재 양식, 달의 차고 기우는 리듬에 계시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원시 사회의 인간들은 죽음을 극복하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 의례로 변형시킴으로 그렇게 했다.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버리는 존재, 즉 세속적인 생명을 버리는 존재에 지나는 않는다. 그래서 죽음은 최고의 가입식, 즉 새로운 영적 존재의 시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죽는 것은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근대 과학의 영향으로 세계가 탈신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교적 인간과는 대비되는 비종교적 인간이 나타난다. 비종교적 인간은 초월성을 거절한다. 그들은 '실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재'의 상대성만을 인정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또한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역사의 주체 및 동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초월적인 것을 거부한다. 성스러운 것, 즉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83면

 

비종교적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속박아래 자신을 묶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비종교적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적 자유의 추구는 결국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긴장감과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 절대적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내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자유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존적 위기도 결국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결국 하나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의 모범적 해결책이다. 이것은 위기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더 이상 우연이나 특수한 것에 맡기지 않는, 따라서 개인적 상황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만든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의 존재 양상은 모범적인 삶을 모습의 계시이기도 하였다. 종교적 인간에게 성스러운 공간이 속된 공간에 방향성을 설정하듯 신의 계시는 인간의 삶에 참다운 방향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탈신 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이 겪는 긴장과 불안은 아마도 방향성의 상실 때문이 아닐까? 방향을 상실한 비종교적 인간들도 내심 그 깊은 속에서는 방향성을 설정해 줄 고정점, 즉 중심을 희망하지 않을까?  

 

상대성과 방향 상실에서 야기된 긴장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절대적인 지점을 산출시키는 징표를 사람들은 희망한다. 60쪽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탈신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의 상황을 이와 같이 말하면서, 이들도 다시 옛 기억을 되찾아 종교적으로 실존에 대한 불안과 방향 상실로 야기된 긴장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성을 상실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 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았다.

 

      

 

<성과 속> 목차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002. 서론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007. 연대기적 고찰
008. 엘리아데 연보
009. 참고문헌
010.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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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성스러운 공간의 계시는 인간에게 고정점을 부여하고, 그리하여 혼돈된 균질성 가운데서 방향성을 획득하며 '세계를 발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획득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속된 경험은 공간의 균질성과 상대성에 머문다. 이 경우에는, 고정점이 더 이상 유일한 존재론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참된 방향성도 불가능하다. 즉 그것은 그날 그날의 요구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거기에는 어떤 세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흩어진 우주의 단편들, 무한히 많은 다소 중성적인 장소의 무형태적인 집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산업 사회에 편입된 존재로서의 의무에 의해 움직이고 지배당하고 조종받는다. 57쪽


상대성과 방향 상실에서 야기된 긴장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절대적인 지점을 산출시키는 징표를 사람들은 희망한다. 60


전통 사회의 하나의 특징은 그들이 사는 영역과 그 영역을 둘러싼 미지의 불확정적인 공간 사이의 대립을 상정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사는 영역은 세계이자 코스모스(우주)이다. 그 이외에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일종의 '다른 세계'이며, 유령과 악마와 '외인들'(이들은 악마와 죽은 자의 영들과 동일시되고 있음)이 살고 있는 이질적인 혼돈의 공간이다. 일견 이 공간의 단절은 사람이 거주하는 질서있고 우주화된 영역과 그 영역을 벗어난 미지의 공간의 대립에 기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한편에는 코스모스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카오스가 있다. ...성스러운 것은 경계를 정하고 세계의 질서를 세운다는 의미에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의 영역은 그것을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따라서 정화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된다. 61~63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실재를 창조할 때 신들은 또한 동시에 성스러운 시간도 창조한 것이다. 90


그리스도 이전의 특히 고대의 여러 종교에서 주기적으로 재현된 성스러운 시간은 신화적 시간, 즉 역사적 과거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원초적인 시간이다. 그것은 또한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실재의 출현 이전에는 어떠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앞에 선행하는 다른 시간이란 없으며, 갑자기 출현했다는 의미에서 최초의 시간일 것이다. 91


우주 창조 가운데는 시간의 창조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 문화의 종교적 인간에게 모든 창조, 모든 존재는 시간 안에서 시작한다. 즉 어떤 것이 존재하기 전에는 그것에 고유한 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우주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우주적 시간도 없었다. 어떤 특수한 식물종이 창조되기 전에는 지금 그것을 성장시키고, 열매를 맺게 하고, 그리고 죽게하는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든 창조를 시간의 시초에, 태초에 생겨났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시간은 새로운 종류의 존재자가 최초로 출현함과 동시에 발생한다. 94~95


우리는 도시, 사원, 집의 우주론적 상징 구조가 세계의 중심이란 관념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배웠다. 이 중심의 상징에 내포되어 있는 종교적 상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인간은 위로 열려 있는 장소, 즉 신들의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지려고 한다. 세계의 중심에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 가능한 한 신들과 가까이 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종교적 축제의 의미를 분석해 보면 우리는 신들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성스러운 기원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신들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따라서 신들의 현존 앞에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 체험에서 읽을 수 있는 지향성은 원초적인 상황, 즉 신들과 신화적 선조가 현존하여 세계를 창조하거나 조직하거나 혹은 인간에게 문명의 기초를 계시할 때로의 회귀를 열망하고 있다. 105


기원에 대한 향수는 종교적 향수에 해당한다. ...그 때로의 주기적 회귀는 주로 태초의 완전성에 대한 향수로 설명할 수 있다. 낙원에 대한 향수 105



인간은 종교적이 되면 될 수록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인도할 모범적 모델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된다. 말을 바꾸면, 인간은 종교적으로 되면 될 수록 실재에 더 많이 들어가게 되고, 비모범적이고 '주관적'이어서 결국 그릇된 행동 속에서 길을 잃어버릴 위험이 훨씬 줄어들게 된다. 108


신화의 최고 기능은 모든 의례 및 인간의 본적적 활동(식사, 성생활, 노동, 교육)에 대한 모범적인 모델을 확립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 존재로서 충분히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신들의 모범적 행동을 모방하고 그들의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다. 109



종교적 인간을 초인간적, 초월적 모델을 가진 인간 존재로 여기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종교적 인간은 신들이나 문화영웅, 신화적 선조를 모방하는 한에서만 자신을 진정한 인간으로 인정한다. 이것은 종교적 인간이, 속된 체험의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인간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적인 모델에 접근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든다. 111


종교적 인간이란 광기, 파렴치, 범죄의 영역과 접하는 행동에 열중하는 경우에도 신들을 모방하려 하고 또 모방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114 


우주의 종교성이 상실될 때...종교적 내용을 잃어버린 반복은 필연적으로 비관적인 이냉관으로 이끌려간다.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시간이 더 이상 태초의 상황, 신비로 가득찬 신들의 현존으로 회복하는 길이 되지 못할 때, 즉 탈신성화 될 때 순환하는 시간은 두려운 모습을 하게 된다. 즉 그것은 영원히 반복하여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원환 주기가 된다. ...무한히 자신을 반복하는 순환적 시간에 직면하여 절망을 느낀 것은 주로 종교적, 철학적 엘이트들이었다. 이 영원회귀는 인도사상에서 보편적 인과율의 법칙인 업의 힘에 의한 실존으로의 영구적인 귀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은 우주적 미망(maya)에 상응하게 되고 실존으로의 영원한 회귀는 고통과 속박의 무한한 계속을 의미하였다. 종교적, 철학적 엘리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실존으로의 비회귀, 업의 단절이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우주의 초월을 포함한 궁극적 해방이었다. 116~117


고대 및 동방의 여러 종교와 인도 및 그리스에서 형성된 영원회구의 신화적, 철학적 개념에 대하여 근본적인 혁신을 가져온 것은 유대교이다. 유대교에서 시간은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다. 순환하는 시간이란 개념은 폐기되었다. 야훼도 이제 우주적 시간 안에서 현현하지 않고 불가역적인 역사적 시간 가운데서 현현한다. ...예루살렘의 몰락은...역사에 대한 사적인 간섭이고 ...그렇게 하여 역사적 사건은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그것은 신현이 된다. 118~119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시간의 평가에서 이보다 더 전진한다. 신이 육화되어, 즉 역사적으로 제약된 인간 실존을 받아들인 이래 역사는 성화될 가능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복음서가 환기시킨 그 때는 특정한 역사적 시간, 즉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 된 시대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성화되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도가 의례적 시간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살았고, 수난받고, 부활한 그 때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그것은 신화적 시간이 아니고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를 다스렸을 때의 시간이다. ...역사는 마치 신화적 관점이나 원시 및 고대 종교의 여러 관점에서 그런 것과 같이 다시 한 번 성스러운 역사가 된다. 119


헤겔은 유대-그리스도교적 이념을 이어받아 그것을 총체로서의 우주적 역사에 적용하고 있다. 즉 세계 정신은 부단히 역사적 사건 가운데서 현현하고 오로지 역사적 사건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 전체가 신현이 된다. 역사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세계정신이 그렇게 하기를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이 행한 그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여 20세기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역사 철학에의 길을 열어 놓았다.


역사주의는 그리스도교의 해체에 의한 산물이다. 그것은 역사적 사건에 결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그것은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가진 관념이다) 거기서 구원론적, 초역사적인 의미를 계시해 주는 모든 가능성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적 사건 그 자체만을 인정하게 된다.


어떤 역사주의 철학과 실존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시간 개념에 관해서는 다음의 관찰이 흥미를 끈다. 즉 시간을 더 이상 원환으로 생각되지는 않지만 현대 철학에서의 시간은 다시 인도 및 그리스의 영원회구의 철학에서와 같은 두려운 면을 지니고 있다. 철저하게 탈신성화된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불안하고 덧없는 지속으로 나타난다. 120


제3장 자연의 신성과 우주의 종교

이 장에서 우리는 종교적 인간에게 세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좀더 정밀하게 표현하자면,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계시되는가를 이해하고자 힘쓸 것이다. 122


창공은 단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 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122


천공 구조를 갖는 최고 존재자는 그 신앙 숭배로부터 점차 사라져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서 멀리 있는 감추어진 신이 된다. ...차차 그의 지위는 신화적 선조, 모신, 풍요신 등과 같은 다른 신격들로 대체되었다. 125


신의 격절성은...[인간이] 좀더 구체적인(더욱 육체적인, 특히 열광적인) 종교 체험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원시인은 초월적인 천신에게서 멀어져 간다. ..삶과 훨씬 밀접하게 관련된 체험이 나타나면, 위대한 모신과 강력한 힘이 있는 신 혹은 풍요의 정령들이 창조신보다도 분명히 더 동적익 인간에게 더 가까운 신이 된다.

...[그러나] 공동체의 존속 자체가 문제가 되는 위급 존망의 상황에서는 평상시 삶을 보증해 주고 고양시켜 주는 신들을 버리고, 인간은 최고신에게로 돌아[간다]. 128~129


신들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계 전체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창조하였다....하늘의 신성성은 본래의 종교 생활에서 몸을 감춘 후에도 상징을 통해 계속 그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130


물른 가능성의 우주적인 총체를 상징한다. 그것은 일체의 존재 가능성의 원청니아 저장고이다. 즉 물은 모든 형태에 선행하며 모든 창조를 떠받치고 있다...다른 한편, 물 속에 가라앉는 것은 무형태로의 회귀, 존재 이전의 미분화된 상태로 되돌아감을 상징한다. 부상은 우주 창조의 형성 행위를 재현하고, 수몰은 형태의 해체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의 상징은 죽음과 재생을 포함한다. ...물은 분해하고 형태를 파괴하고 '죄를 씻어냄'과 동시에 정화하고 재생한다. 131-132

 

역사는 고대적 상징의 구조를 근본부터 바꿀 수는 없었다.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지만 이 새로운 의미가 상징의 구조를 파괴하지는 않는다....우주적 신성성의 계시는 어떤 점에서 원초적인 계시이다. 즉 그것은 인류에게 종교적으로 먼 과거에 일어난 것이고, 그 후에 역사에 의해 도입된 변혁들도 그것을 폐기시킬 만한 힘을 갖지 못하였다. 136 -> 예를 들어 세례에 있어서의 물의 역할, 우주의 리듬-계절, 낮, 밤-과 부활


여성의 출산력에는 우주적 원형이 있다. 그것은 만물을 낳는 어머니인 대지의 출산력이다....여러 종교에서 우주 창조 혹은 적어도 그 완성은 천신과 지모의 성혼의 결과로 이루어진다....그 때문에 인간의 결혼식은 우주적 성혼의 모방으로 간주된다...곡물의 풍요를 위한 의례적 오르기도 다산력의 남신과 지모와의 성혼이라는 성스러운 모델을 가지고 있다....어떤 관점에서 보면 오르기는 창조 이전의 미분화된 상태에 상응한다. ...사회적 혼란, 성적인 방종, 진탕 마시고 노는 잔치는 세계 창조보다 앞선 무형태의 상태로 돌아감을 상징한다...신년 의례에서 우리들이 시간의 갱신과 세계의 재생으로서 발견한 갱신의 관념은 오르기적 농경 제의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도 오르기는 생명의 완전한 갱신, 따라서 대지의 출산력 및 수확의 풍요를 보증하기 위하여 우주적 밤으로, 형태 이전으로,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142-144

* 오르기: 망아적 도취의 축제, 방자한 술자리, 유흥, 방종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메시지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가금 그 메시지는 암호로 되어 있으나 인간에게 그 암호의 해독을 도와주는 신화가 있다. ...인간 경험의 전체는 우주적 삶과 동일시 될 수 있고 따라서 성화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우주는 최상의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143


우주적 출산력의 여러 측면들이 계시하는 것은 결국 생산의 신비, 즉 생명 창조의 신비를 밝혀 주고 있[다]...종교적 인간에게 죽음은 생의 마지막 종료가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이 모든 것은 우주적 리듬 가운데 암호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우주가 그 다양한 존재 양식 속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단지 해독할 뿐이고, 그렇게 해야 생명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44


우주는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을 주기적으로 갱신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생명 출현의 신비는 우주의 주기적인 갱신과 결합하고 있다. 144


종교적 인간에게는 식물의 리듬 속에서 생명과 창조의 신비 그리고 갱생, 청춘 및 불사의 신비가 계시된다. 146


철저하게 탈신성화된 자연의 경험이라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고, 그것도 근대 사회으 소수, 특히 과학자들만 접근할 수 있는 경험이다. 147


신성한 우주의 경험이 ...엷어지고 변화해서 결국엔 완전한 인간적 감정-예컨대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감정-이 되기에 이르렀[다] 149


제 4장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세계를 향해 열린 실존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의 관점에다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자마자 곧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세계는 신들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즉 세계의 현존이 이미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무엇인가를 '말하고자한다'는 것이다. 세계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불투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목적도 의미도 없는,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는 '살아있고' '말을 하는' 무엇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어떤 문화 단계 이후부터 자신을 하나의 소우주로 보기 시작하였다....우리는 이 모든 상동성을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체득된경험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하도록 해보자. 명백히 그의 삶은 하나의 차원을 더 소유하고 있다. 즉 그는 인간적인 것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주적이다. 왜냐하면 그의 삶은 초인갅거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적 존재 양식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열린 실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적 인간, 특히 원시인의 실존은 세계를 향하여 열려 있다. 즉 종교적 인간은 삶 가운데서 결코 고독하지 않으며 세계의 일부가 그의 안에 살아 있다....세계로의 개방성은 종교적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종교적인 것이요 존재와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귀중한 것이다. 155-156


삶의 성화

신체 기관이나 그 기능들은 다양한 우주적 영역 및 현상과의 동일시를 통하여 종교적 가치를 부여받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인간-우주적 상동 관계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여러 실존 상황의 징표들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인간들이 열린 세계 가운데 살고 있으며, 그의 실존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종교적 인간이 우주적이라고 일컬음직한 무한한 경험 체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57-58


여러 신체 기관과 생리적 생활의 신성화는 이미 모든 고대 문화 단계에서 풍부히 확인된다. 160


신체-집-우주

현대의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우주는 불투명하고 둔하고 말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우주는 어떤 메시지도 전해 주지 않으며, 어떤 암호도 갖고 있지 않다....산업 사회의 그리스도교, 특히 지식인의 그리스도교는 중세시대까지 지녔던 우주적 가치를 오래 전에 상실해 버렸다...도시인의 종교적 감수성이 뚜렷하게 빈곤해졌다...그들의 종교적 체험은 더 이상 우주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체험이 되어버렸으니, 즉 구원은 인간과 그의 신에 관한 문제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진정한 그리스도교라도 더 이상 세계를 신의 창조물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164-165


좁은 문의 통과

우주의 모든 형태들-우주, 사원, 집, 신체-이 모두 위를 향한 출구를 가지고 있다....그 출구는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 하나의 실존적 상황에서 또 다른 실존적 상황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한다...인간 존재는 일련의 '통과 의례', 간단히 말하면 연속적인 가입식을 통하여 완성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


위를 향한 출구는 하늘과의 교류, 초월을 향한 욕구를 나타내고 있다. 문지방은 안과 밖의 경계선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지대에서 다른 지대로(세속적인 것에서 성스러운 것으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다리와 좁은 문의 형상은 위험한 통과의 관념을 나타내며, 이 때문에 가입 및 장례 의례와 신화에 자주 등장한다. 가입식, 죽음, 신비적인 엑스터시, 절대적 인식, 유대-그리스도교에서의 신앙,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존재 양식에서 다른 존재 양식으로의 이행에 해당하며, 참된 존재론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이행(그것은 항상 단절과 초월을 가져오기 때문에)을 표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종교적 전승에서 위험한 다리와 좁은 문의 상징이 아주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다. 166-167


이상과 같은 가입식과 장례식의 몇몇 실례들이나 다리와 문의 형이상학적 상징은 일상 생활과 그에 속한 '작은 세계'-가구가 있는 집, 일상적 행위와 동작의 매일 같은 반복등-가 종교적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종교적 인간은 어디서나 징표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가장 습관적인 동작까지도 영적인 행위를 의미할 수 있다. 길과 보행도 종교적 가치로 변형될 수 있다. 모든 길은 생명의 길을 상징할 수 있고, 모든 보행은 순례, 세계의 중심으로의 여행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의 소유가 세계에서 안정된 상황의 선택을 의미한다면, 집을 버리는 순례자와 고행자는 그들의 보행에 의하여, 그들의 끊임없는 이동에 의하여 이 세계를 떠나, 어떤 세속적인 조건도 거부하려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168


탐색, 중심으로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가족과 사회 안에서의 그의 위치, 즉 둥지를 포기하고 최고의 진리를 향한 보행에 전적으로 몸을 바쳐야 한다. 고도로 발달된 종교에서 그 진리는 숨은 신과 일치한다. 168



통과 의례

비종교적 인간에게는 탄생, 결혼, 죽음은 오로지 개인과 그 가족에게만 관련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비종교적인 삶의 관점에서 모든 통과는 그 의례적 성격을 상실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기된 종교적 실천이 희미한 기억, 혹은 심지어 그에 대한 동경 가운데서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입식 의례는 종교적 인간이 '자연적' 단계에서 존재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과 신화가 그에게 계시하는 이상적인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은 후대의 진보된 사회 윤리의 씨앗 가운데 이미 포함되어있다. 171


가입식의 현상학

신가입자가 유아적이고 세속적이며 부활 없는 생에서는 사멸하고 새롭게 성화된 실존으로 재생한다면, 그는 또한 인식과 지를 가능케 하는 어떤 존재 양식으로 재생한다는 것이다. 신가입자는 오로지 새로 태어난 자 혹은 부활한 자일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자, 신비를 알고 형이상학적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이기도 하다. 그는 숲속에서 단련을 받는 동안 성스러운 비밀, 신들과 세계의 기원에 관한 신화, 신들의 진짜 이름, 가입식에 사용되는 의례용 두구들의 역할과 유래를 배운다. 가입식은 정신적인 성숙을 의미한다. 신가입자 즉 신비를 체험한 인간은 지자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72



모든 고대 사회에서 영성에 대한 접근은 죽음과 새로운 탄생의 상징 속에서 그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174


남성 결사와 여성 결사


죽음과 가입식

우리는 원시 사회의 인간들이 죽음을 통과 의례로 변형시킴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애써왔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달리 말하면,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버리는 존재, 즉 세속적인 생명을 버리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줄여 말하면, 죽음은 최고의 가입식, 즉 새로운 영적 존재의 시작으로 간주되기에 이른다. 178


제2의 탄생과 영적 생성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려는 자는 항상 세속적인 조건에서는 죽고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181


근대 세계에서의 성과 속

원시 사회와 고대 문명의 종교적 인간이 지녔던 상황의 대부분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오래 전부터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오늘날의 우리로 형성하는 데 기여해 왔으며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 자신의 역사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

종교적 인간은 그가 처해 있는 역사적 맥락이 어떠하든지 간에 항상 이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이 세계 안에서 자신을 현현하는, 그럼으로써 이 세계를 성화하고 또 그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성스러운 것, 절대적 실재가 있다고 항상 믿는다. ...


비종교적 인간은 초월성을 거절하며 '실재'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심지어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그는 그 자신을 오로지 역사의 주체 및 동인으로만 간주하며 초월적인 것을 모두 거부한다....성스러운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다. 그는 완전히 신비성을 잃어버릴 때에만 그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이 비극적 실존을 받아들이고 있다. 182-183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 것이다. 실존적 위기는 결국 '종교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문화 단계에서 존재와 성스러운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창건한 것은 성스러운 것의 체험이며, 가장 원초적인 종교까지도 결국 하나의 존재론이다.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의 모범적 해결이다. ...종교적 해결은 위기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더 이상 우연이나 특수한 것에 맡기지 않는, 따라서 개인적 상황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만든다. 187-188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아직도 그의 무의식의 활동으로부터 영양분과 원조를 받고 있지만 세계에 대한 본래의 종교적 체험과 비전을 보여주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무으식은 그에게 그 자신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해결을 제공하며, 이런 방식으로 종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비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근대인들에게 있어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러한 인간이 내면을 깊이 안에 생의 종교적 비전을 회복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종교적 인간은 의식된 종교체험, 따라서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이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최초의 타락 이후에 그의 선조인 원초적 인간이 세계안에서 신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인식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과도 같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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