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뿌옇게 흐리다. 가는 비를 뿌릴만한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더라도 아주 가는 비일 것이다. 창 너머 아래를 내다본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듬성 듬성 보인다. 괴어있는 물 표면에 가느다란 비의 흔적이 흔들린다. 가는 빗방울이 듣고 있다. 맞아도 될 비지만 어쨌든  우산을 들고 나섰다. 대연수목전시원으로 나선 길이다.


요즈음 손에 책이 잡히질 않는다. 김훈씨의 <라면을 끓이며>를 살 때 가득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자전거 여행>을 읽을 때의 감동과 찬탄은 허물어져 버렸다. 새로운 문장을 써 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더구나 새로운 생각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일까? 김훈씨의 글과 생각은 그냥 제자리에 멈추어 선 듯하다. 최소한 <라면을 끓이며>라는 수필집은 그렇게 보인다.


책을 읽지 않으면 집안에서 별달리 할 일이 없다. 나가야 한다. 나가야 할 일이 생긴다. 그렇다면 수목원으로 가자.주위에 있는, 산에 있는 초목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먼저 그들 존재의 모습을 익혀 개별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개별 이름을 익혀야 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나무'라는 명사가 없다고 한다. 각 나무는 고유의 이름으로 불릴 뿐 그 전체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분류하지 않는다. 초목은 인디언들에게 이름으로 불러주어야만 할 존재였다. 단지 뭉뚱거려 하나로 취급하지 않았다. 숲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겐 초목 하나 하나가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다른 존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존재는 서로 구별시켜 주는 이름을 지녀야만 한다. 


나도 초목들의 이름을 알고 싶다. 개별적으로 그들을 알고 싶다. 다만 나무들, 꽃들, 초목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 이름으로 불러주고 싶다. 사실 출근하는 길은 걸어서 15분 길이다. 나는 걸어가면서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길가에 있는 꽃들과 수목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본다.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잊어버렸는지 검산해 본다. 철쭉, 영산홍, 산수유, 매화, 동백, 느티나무, 벚나무, 목련나무, 튤립나무, 장미, 선주목, 채송화, 남천나무, 천리향, 붉은괭이밥... 이 정도면 길가의 초목은 다 아는 것이라 자처했었다. 그러나 천만에... 


봄이 오는 길에 가장 먼저 동백꽃이 피고 차례로 매화와 산수유가 피었다 진다. 그리고 목련꽃이 핀다. 목련꽃 질 무렵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핀다. 하루새 벚꽃이 바람에 지고 나면 노란 개나리꽃은 돋아나는 푸른 잎사귀 속으로 사라진다. 가지를 붙들고 놓지 않는 늙은 동백꽃이 햇빛에 바래어갈 때 철쭉과 영산홍이 짙은 분홍색과 진홍색으로 핀다. 이렇게 꽃으로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던 초목들은 나의 눈을 비켜가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이다. 언젠가부터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던, 내가 알지 못하는 초목들이 꽃이 피운다.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초목들이다. 더구나 산에 가면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나무가 저 나무같고, 저 나무가 이 나무같다. 풀 속에 숨어서 핀 야생초며, 아주 작은 꽃을 피운 야생초며, 도무지 그 이름을 불러 줄 수가 없다. 불러주고 싶은 이름들을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수목원에 가서 나무들이나 꽃들의 이름을 알아 보자고 나섰다. 


대연수목전시원은 평화공원, 그리고 UN기념공원과 붙어 있다. 수목원 한 쪽 끝에서 저 쪽 끝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잎과 기둥을 살펴보고 그 이름을 읽어본다.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 모습만 보고서는 구별할 수 없는 초목들을 다시 한 번 보고 이름을 불러본다. 다시 저 쪽 끝에서 이 쪽 끝으로 걸어오면서 다시 이름을 맞추어 본다. 피나무,먼나무, 팽나무, 닥나무, 사시나무, 오리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보리수나무, 올리브나무, 서어나무, 아왜나무, 동백나무, 이팝나무, 조팝나무, 튤립나무, 서어나무, 사과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석류나무, 비파나무, 금목서, 치자나무, 물푸레나무, 자작나무, 산시나무, 후박나무, 벚나무, 자목련, 리기다소나무, 해송, 잣나무, 편백나무, 꽝꽝나무, 수국, 해당화, 영산홍, 철쭉, 황매나무, 겹황매나무, 무궁화, 라벤더, 로즈마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초목들을 보고 생각하기를, 이 보다 좋은 산책 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걸으면서 나무 잎새를 보고, 줄기를 보고, 꽃을 보면서, 이름을 맞추어 보고, 이름을 불러보고, 참 좋은 산책길이 될 듯하다. 얼마나 걸으면 이 수목원에 있는 모든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될까? 궁금해 진다. 그리 큰 수목원은 아니기 때문에 한 번 그렇게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더 큰 수목원으로 옮겨볼까? 화명수목원이 넓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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