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속/ 엘리아데/ 이은봉 옮기/ 한길사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 할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여러 번 <성과 속> 앞에서 멈칫거렸다.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100권 중 한 권이지만 흥미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펴서 이리저리 뒤 적어 본 적도 있었지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제목도 생경하다. <성과 속>이라니. 하지만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책들 중 나를 실망시킨 책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마음 단단히 먹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손 끝으로 가만히 책장을 넘긴다. 기대감 때문일까? 마음이 잔잔하게 울렁인다. 이 책은 무얼 줄까?

 

책은 깨끗했다. 장담은 할 수 없으나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책인 듯 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김에 따라 왜 이 책이 이토록 깨끗한지 이유를 알겠다. 처음에 느꼈던 긴장감과 기대감은 점점 실망감과 지루함으로 변해갔다. 얼기설기 엮인 허술한 바구니처럼, 무언가 진귀한 것을 담은 그런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끝까지 읽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더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한번 읽은 것으로 만족하고 덮어버릴 것인가? 나는 다시 한번 읽는 것을 선택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내가 감지하지 못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읽는 <성과 속>은 처음과는 사뭇 달랐다. 다시 읽기를 잘했다.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후 이 책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달라졌다.

 

엘리아데는 원시문화 단계에 있는 다양한 종족들의 종교적 의례 및 그들의 신화를 연구하면서, 그 다양성보다는 공통점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한다. 이 연구를 통해 엘리아데는 종교와 관련된 여러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신이나 영과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 사후의 세계와 같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생각들은 또한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그러한 사상들은 어떻게 철학의 세계로 편입되었는가? 종교적 의례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은 어떠한가?  왜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가? 근대에 이르러 나타난 비종교적 인간이 가지는 실존과 존재에 대한 불안은 무엇 때문인가? 그 해결책이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속俗'의 공간은 균질하다. '속'의 공간이 균질하다는 것은 방향성이 없다는 말이다. 중심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聖스러운 공간이 이 '속'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공간은 더 이상 균질하지 않게 된다. '성'의 공간과 '속'의 공간 사이에 단절면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공간은 비균질해진다. 이제는 성스러운 공간을 중심으로 방향성이 설정된다. '성'의 공간은 왜 성스러운 것일까? 그 공간은 신을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속된 세계를 벗어나 초월적인 세계와의 통로가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이렇게 '성'과 '속'의 구분함으로 그들의 불안감을 잠재웠다. 그들은 세계의 중심인 이 '성'의 공간 가까이에 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이 '성'의 공간을 중심으로 생활공간을 확장해 왔다. 종교가 시작된 것이다.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어떻게 초월적 존재(신 또는 영)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까? 고대 사회의 종교적 인간들은 세계를 메시지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 그들에게 우주, 자연은 그 자체로 신의 계시였다. 그들은 "신성성은 세계의 구조안에서 계시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즉 신들은 마치 자기의 존재를 세계 전체가 반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는 명백한 계시였던 것이다.

 

창공은 단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것만으로 벌써 종교적인 체험을 불러 일으킨다. 하늘은 그 자신을 무한한 것, 초월적인 것으로 보여준다. 그 초월성은 인간이 그 무한한 높이를 단순히 인식함으로써 계시된다. 지고자의 개념이 저절로 신성의 속성이 된다.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지역, 별이 빛나는 영역은 초월자, 절대적인 실재, 영원성의 중대성을 획득한다. 122쪽

 

고대의 종교적 인간들은 우주의 다앙한 존재 양식 즉 우주적 리듬을 생의 신비를 밝혀주는 암호라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달의 변화 양상은 생의 신비를 계시해 주는 것이었다.  종교적 인간들은 달이 기울어지고 이지러진 후에 다시 차 오르는 것과 같이 생도 그렇다고 생각하였다. 즉 죽음이 생의 마지막 종료가 아니다. 죽음은 단지 인간 생존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생의 비밀은 달의 존재 양식, 달의 차고 기우는 리듬에 계시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원시 사회의 인간들은 죽음을 극복하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 의례로 변형시킴으로 그렇게 했다. 원시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버리는 존재, 즉 세속적인 생명을 버리는 존재에 지나는 않는다. 그래서 죽음은 최고의 가입식, 즉 새로운 영적 존재의 시작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죽는 것은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의 변화라고 생각함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

 

근대 과학의 영향으로 세계가 탈신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종교적 인간과는 대비되는 비종교적 인간이 나타난다. 비종교적 인간은 초월성을 거절한다. 그들은 '실재'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재'의 상대성만을 인정할 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존재의 의미를 의심하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또한 근대의 비종교적 인간은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상정한다. 즉 역사의 주체 및 동인은 오로지 자기 자신일 뿐,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초월적인 것을 거부한다. 성스러운 것, 즉 초월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그가 자유를 획득하는 데 최대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비종교적 인간의 사고방식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 살해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183면

 

비종교적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 신의 속박아래 자신을 묶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비종교적 인간은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적 자유의 추구는 결국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긴장감과 그 방향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불안이 절대적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내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자유는 독이 든 성배와도 같다.

 

현대 사회의 모든 실존적 위기는 세계의 실재성과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현존을 다시 한 번 문제 삼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실존적 위기도 결국 '종교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결국 하나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란 모든 실존적 위기의 모범적 해결책이다. 이것은 위기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존을 더 이상 우연이나 특수한 것에 맡기지 않는, 따라서 개인적 상황을 초월하게 만드는 가치를 향하여 마음을 '열게'만든다.

 

종교적 인간에게 우주의 존재 양상은 모범적인 삶을 모습의 계시이기도 하였다. 종교적 인간에게 성스러운 공간이 속된 공간에 방향성을 설정하듯 신의 계시는 인간의 삶에 참다운 방향과 의미를 부여해 준다. 탈신 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이 겪는 긴장과 불안은 아마도 방향성의 상실 때문이 아닐까? 방향을 상실한 비종교적 인간들도 내심 그 깊은 속에서는 방향성을 설정해 줄 고정점, 즉 중심을 희망하지 않을까?  

 

상대성과 방향 상실에서 야기된 긴장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의 절대적인 지점을 산출시키는 징표를 사람들은 희망한다. 60쪽

 

엘리아데의 <성과 속>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탈신성화된 비종교적 인간들의 상황을 이와 같이 말하면서, 이들도 다시 옛 기억을 되찾아 종교적으로 실존에 대한 불안과 방향 상실로 야기된 긴장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근대 사회의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성을 상실하였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와 신화는 그들의 무의식의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즉 비종교적 인간은 종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을 상실하였지만 그의 가장 깊은 존재 밑바닥에는 아직도 그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타락 이후 종교적 감각은 분열된 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와 버렸다. 두 번째 타락 이후 그것은 더욱 내려와,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지금 그것은 '망각되고' 말았다.

 

      

 

<성과 속> 목차

001. 성과 속은 무엇인가· M. 엘리아데의『성과 속』
002. 서론
003. 성스러운 공간과 세계의 정화
004. 성스러운 시간과 신화
005. 자연의 신성과 우주적 종교
006. 인간의 실존과 성화된 생명
007. 연대기적 고찰
008. 엘리아데 연보
009. 참고문헌
010.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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