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에서 추천받은 책이다.

☞ 이윤기의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http://blog.daum.net/ccsj77/353

 

책을 읽다 보면 무슨 책을 읽을까하는 고민이 절로 해결되는 때가 있다.

책 속에 추천된 책, 그리고 책 속에 언급된 책들이 있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책의 행렬을 따라 가다 보면 어디로 가게 될까?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까?

그 끝이 나올 때까지 모든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지만, 그 걸음의 방향은 아마도 인류의 이성이 빚어낸 고전들로 향하지 않을까?

시간의 파괴성을 견디어 낸 책들, 인간들의 지성의 향연이라할 그런 책들 말이다.

그러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는 어떤 책, 그리고 누구와 선이 닿아 있을까?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대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복사판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로빈슨, 난파한 버어지니아호에서 혼자 살아남은 그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다. 

무인도를 개척해 나가는 삶, 그리고 동반자의 등장. 딱 여기까지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로빈슨 크루소>가 닮은 것은.

 

대니엘 데포의 '로빈슨'은 동반자 '프라이데이'를 만난다.

'로빈슨'은 야생의 세계인 무인도를 개척하고, 프라이데이를 문명인으로 교화시킨다.

데포의 <로빈슨 크로소>은 야생을 이긴 문명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다르다. 그는 야만인 '방드르디'를 만나 교화받는다.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쌓아놓았던 문명은 파괴되고, 그는 야생으로 돌아가게 된다.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문명에 대한 야생의 승리의 증인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미셸 투르니에는 레비스트로스의 강의와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유명한 인류학자로 <야생의 사고>,<슬픈 열대>와 같은 저서를 남긴,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문명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서구의 지성들에게 야생 즉 반문명의 원시문화가 더 우월할 수도 있다고 일갈했다. 

 ☞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http://blog.daum.net/ccsj77/174

 

아마도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이러한 야생의 우월성을 담고 싶었을 것이다.

문명이 야생보다 우월한 것이 무엇일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문화는 야생을 갉아먹고 산다. 후손 대대로 살아야 할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을 고갈시킨다.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을 통해 거대경제의 위험성을 지적한 바 있다.

 ☞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http://blog.daum.net/ccsj77/287

 

로빈슨도 끊임없이 스페란차의 생산력을 고갈시켜가면서 곡물을 생산해 낸다.

혼자서 사는 삶임에도 불구하고 창고에 가득 생산물을 쌓아 놓고도 또 더 많은 생산을 위한 계획과 실행으로 바쁜 삶을 보낸다.

만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살 만큼만 생산하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

하나 더 가지려면, 하나 더 만들든지, 아니면 하나를 더 뺏어야한다.

그러나 하나 더 만든다는 것은 장차 올 미래세대, 우리의 아들 딸에게 속한 것을 빼앗는 것과도 같다.

 

필요한 하나의 것만 가지고, 잉여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이 야생의 사고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신들이 먹을 만큼만 사냥한다고 한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많은 사냥을 하는 것은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도 파괴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명의 붕괴를 막고 지속적인 문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야생의 사고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인류의 문명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자로서 철학과 소설의 융합을 지향했다고 한다.

무인도에서 타자없이 살아가는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에게 타자란 어떤 의미일까?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철학적 생각거리도 던져주는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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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가 선정한 100권중  <작은 것이 아름답다>  E.F.슈마허 지음/ 이상호 옮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가 슈마허란 것을 알았을 때, 먼저 생각난 사람은 카레이서 미하엘 슈마허였다. 그러나 이 책은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Schumacher-1911~1977)라는 경제학자가 쓴 것이다.  

에른스트 슈마허 및 전체 내용 소개   ☞  http://blog.daum.net/ccsj77/284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1911~1977)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에 비판의 칼날을 들이 대며 이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중심의 경제'이다.   

 

존 케인즈(1883~1946)은 모든 사람이 풍족해질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다시금 수단보다 목적을 높이 평가하고 유용성보다는 선을 선호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러한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도 백년 동안은, 나쁜 일은 유용하지만 옳은 일은 그렇지 않기때문에, 옳은 일은 나쁘고 나쁜 것이 옳다는 점을 자신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상당 기간동안 탐욕과 고리대금, 그리고 경계심을 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는 경제걱 궁핍이라는 터널에서 벗어나 밝은 햇살 속으로 나아갈 수 있다."

 

존 케인즈 (1883-1946)

 

 

즉 근대 경제학의 바탕은 탐욕과 이기심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무한한 영리 추구를 기초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은 필연적으로 풍요를 가져올 것이며, 그 풍요는 평화를 가져 올 것이란 믿음이 근대 경제학의 토대인 것이다. 탐욕과 이기심이 평화의 기초가 될 것이란 믿음은 이율배반적이지만 바로 그것이 근대경제학의 모토인 것이다.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의 맹점을 가차없이 폭로한다. 영속적인 성장과 번영, 그리고 그로 인한 평화는 환상일 뿐이다. 성장에 요구되는 자원의 소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성장에 따른 자연의 생태계파괴나 환경문제는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번영을 가능하게 한 이기심과 탐욕이 초래한 인간성의 파괴는 어떤가?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비경제적 가치를 지닌 소중한 것들, 즉 아름다움, 건강, 깨끗함등의 전통적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한국 독자에게 널리 알려진 마이클 샌델 교수도 슈마허와 같은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샌델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라는 책에서 경제적 사고방식이 사회에 침투하여  시장사회가 형성되면 발생할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http://blog.daum.net/ccsj77/212

 

 

 

슈마허는 근대 경제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대안 경제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영속성을 위한 경제학이다. 그것은 지속가능한 생활방식을 영위하게 해 주는 경제학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건전하고 토지를 비옥하게 하고, 건강과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생산방법을 가진 경제학이다. 이 경제학에서는 임금(wage)만을 위해 일하는 노동은 없다. 그리고 여가시간에만 즐거움을 기대하는 노동도 없다. 그것은 즐기면서 일하는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학이다. 그것은 인간중심의 경제학이다.  

 

간디는 "대지는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지만, 모든 사람의 탐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고 말했다. 탐욕은 끝이 없다.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을 충족시키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줄이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둘 때 행복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욕망의 성장은 만족의 감소일 뿐이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 동료들만이 아니라 자연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만들고 우리 인간을 만든 높은 존재와 평화롭게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함을 의미한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필연적으로 파국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인류는 지구의 약탈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구는 우리의 거주지로서 보호하고 가꾸어 나가야할 대상이지 약탈의 대상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어왔으며 그로 인해 물질적으로 한층 풍요롭게 되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어야 보면 슈마허가 지적한 것처럼 환경오염, 전통적 가치관의 파괴, 인간성 파괴 및 소외, 빈부의 격차등의 문제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로 인해 풍요의 토양에 불행의 꽃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다. 슈마허의 모든 예견들이 꼭 그대로 들어 맞는 건 아니지만, 그는 우리 사회를 위한 예언자적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이 시대의 아픔을 해결할 능력도 갖고 있지 않은 소시민들은 그저 예언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떨굴 뿐이다. 다만 "내려 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이라는 시구처럼 오른편, 왼편도 둘러보고, 뒤도 돌아보고, 위로 하늘도 쳐다보면서, 앞만 보고 달려 오느라 보지 못했던 것에 눈길과 마음을 둘 수는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음들이라 할찌라도 합쳐져서 점점 커지면 그 때에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가족을 잃어 슬픔에 잠긴 분들께 함께 아픈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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