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브레히트학회편/ 연극과 인간

 

바알

남자는 남자다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린드버그들의 비행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조처

 

 

희곡은 낯설다. 연극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본다. 아니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기억이 희미하다. 희곡을 읽은 일은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렇게 두 편을 읽었다. 그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을 때 황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뭐지??? 다 읽고 나서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불행한 가족 이야기는 인상적이긴 했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자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의 난감함에 다시 마주친다. 그래서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통에 세세한 그림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권을 다 읽은 시점에서 생각하면, 브레히트가 이러한 희곡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무언가가 있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바알>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시인의 방탕한 생활을 묘사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악용하여 여자를 농락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남자는 남자다>는 꼬드김에 빠진 한 남자가 전쟁터에서 용맹을 보이게 된다는 이야기.

 

<서푼짜리 오페라> ???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아마도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은유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글쎄 뭔가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인 듯...

 

<린드버그들의 비행> 비행기를 타고 처음 대서양을 가로 질렀던 린드버그의 이야기인데, 자연과의 사투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추락한 비행사들을 도와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토의하는 내용이다. 서로 돕는다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로 도울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도와야 할 필요가 생기고, 돕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폭력이라고... 사실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은 위험성이 상존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도왔는데 이 사람이 살인마가 되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이 도움은 옳은 것인가? 내가 그 사람을 돕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텐데...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동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참신하다.  병든 동네 사람들을 위해 함께 먼 곳에 있는 의사를 찾아 가는 일행의 이야기이다. 일행중 한 사람이 아프게 된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관습에 따르면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야한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이러한 조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가지 길이 있다.

 

첫째,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 자체가 필요하다. 또한 당사자는 동의하기 싫더라도 일반적인 관습에 의해 동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다.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둘째,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에서는 그와는 다른 상황이다.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만 한다는 전통이나 관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관습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한다. 즉 아니오라고 말함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극 중에서 아픈 사람은 자신이 죽도록 버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일행들은 이 사람의 부동의에 동의하여 아픈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새로운 행동 양식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조처>중국의 공산화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선동가들과 동행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인정을 베푸는 바람에 공산화 작업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죽어야만 공산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이러한 동의에 의한 죽음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겠다.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조직과 사회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대이고 무엇이 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어떤 인식의 테두리내의 일이라면, 다른 인식의 틀을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그 인식의 틀을 거두어내버리면, 그래도 그것이 '대'일까?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 상대적일 뿐이다. 이 희곡에서 처럼 공산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한, 그 틀에서 결정된 것이 절대적인 선 또는 '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절대적인 것일까? 그 무엇이 있기는 있을텐데...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고 생각하게 된 점들이 있다고 해도, 희곡의 낯섬은 가시지 않는다. 단 상연할 연극의 시나리오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묘사에 있어 소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한계내에서 그 한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시도,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도 같은 노력이 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 놀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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