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김영숙 / 휴머니스트

 

20세기 최고의 미술가 피카소, 아흔 살이 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2천점 가까운 그림을 그렸고, 도자기 3천점 이상, 조각 1200여점, 스케치는 약 7000점을 남겼다. 잡지나 책자에 그린 삽화는 무려 3만잠을 넘는다. 그의 작품들은 늘 새로웠고 현실에 대한 고뇌와 비판의식이 담겨있었다.

 

파블로 피카소는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머지 부분을 그림 속으로 다 끌어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물들을 다 분해한 뒤 다시 붙이는 것처럼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의 <다니엘-앙리 칸바일러의 초상화>는 자잘한 면들을 잔뜩 붙어있어 수많은 정육면체들이 붙어 있는 듯하다. 이러한 그림으로부터 큐비즘 즉 입체주의라는 말이 나왔다. 

 

파블로 피카소 <다니엘-앙리 칸바일러의 초상화>, 1910년, 피카소는 친한 화상 칸바일러의 모습을 여러 면으로 분해한 다음 다시 그려 넣었다. 배경 역시 분해되어 인물과 뒤섞여 있다.  

 

파블로 피카소 <황소머리>, 1942년, 버려진 자전거 안장과 핸들을 사용하여 황소머리를 만들었다. 피카소는 이전의 화가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재료들을 사용하였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쓰레기도 좋은 작품감이었다.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추상화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바실리 칸딘스키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법과 경제를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지만 모네의 그림을 보고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일 뮌헨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그리고 청기사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의 작품 <청기사>에 등장하는 푸른 옷을 입고 말을 달리는 기사를 보면 선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칸딘스키는 자연스러운 색과 완벽한 형태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추상적 화풍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청기사>, 1903년 

 

추상화란 말이 나오면 칸딘스키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화가가 피에트 몬드리안이다. 그는 세잔의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다. 모든 사물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만 남기면 기하학적인 모양만 남는다고 생각했다. 색깔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색만 남기면 빨강, 노랑, 파랑만 남게 된다. 몬드리안에게 추상화란 어떤 것의 가장 기본, 즉 본질이 되는 것만 남겨두고 다른 것은 다 생략해서 단순화해 그리는 것을 의미했다.

 

몬드리안이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서 작업실의 문을 열었을 때 아주 특이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그림 하나를 보게 되었다. 한참을 쳐다보던 그는 그것이 자신의 그림인 것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림을 거꾸로 세워놓은 탓에 알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칸딘스키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무엇을 그렸는지 모르니까 자연히 눈이 그림 속의 색깔과 선에 집중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몬드리안의 그림을 볼 때는 무엇을 그렸는가보다는 색깔 그 자체 그리고 모양 그 자체를 보고 감상하는 것이 몬드리안을 보는 방법이다. 아래의 나무 시리즈를 보면 몬드리안의 단순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피에트 몬드리안 <붉은나무> 1908년     <회색나무> 1911년

 

 

<꽃피는 사과 나무> 1912년                 <구성 10번>, 1912년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은 같은 추상화라도 성격이 다르다. 다음 그림을 보면 칸딘스키를 '뜨거운 추상화'라 하고, 몬드리안을 '차가운 추상화'라 하는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좌) 바실리 칸딘스키 <즉흥 7>, 1910년, 칸딘스키의 즉층시리즈는 즉흥적으로 손이 가는 대로, 자유자재로 그렸다. 복잡하지만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든다.

(우) 피에트 몬드리안 <구성 8> 1939~1942년, 몬드리안의 그림은 색들 간의 관계, 선과 면의 관계에 집중한다. 하얀색 사이에 있는 빨강의 느낌과 노란색 사이의 빨강의 느낌이 달라 보이고, 까만색과 닿아 있으면 다른 느낌이 드는 색의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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