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루시디 장편소설/ 김진준 옮김/ 문학세계사 (뉴욕타임즈 선정 100선 ▶http://blog.daum.net/ccsj77/48)

  

 

무엇을 말해야 할 지 정리하지도 못한 채 사람들 앞에 설 때의 당혹감.

지금 그 느낌이다. 머리 속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파편들, 사방에 아우성치는 총탄과 폭탄소리, 울부짖는 괴성, 포연속에 번득거리는 불빛. 이런 피 튀기는 전쟁에 비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느낌이 그렇지 않을까? 나의 눈은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물이 눈에 비친다. 사물의 나의 인식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자체로 인식되는 느낌이라니. 잠정적 몽환상태이다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는 현실과 환상이 마구 뒤섞여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지브릴 파리슈타는 자신이 대천사 지브릴이라는 환상에 빠진다. 정신분열증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았던 파리슈타가 대천사가 되는 상황이라니. 모순. 그럴 것 같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3만5천피트 상공에서 폭발한 비행기에서 떨어졌으나 살아남는다는 것은 현실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 속에서는 현실로 나타난다. 파리슈타의 머리 뒤에 생겨난 후광도 현실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파리슈타가 대천사가 된다는 상황은 현실인가 환상인가? 이야기 속에 이것은 환상, 아니 망상임이 드러난다. 뿔 달린 악마의 모습으로 점점 변해가는 살라딘 참차의 모습은 현실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 될 수 없는 일이다. 환상이요, 망상이다. 하지만 이야기속에는 엄연한 현실로 묘사된다. 이렇듯 현실과 환상이 뒤범벅되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알 수가 없다. . 이 아우성속에 정작 살만 루시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내가 강렬하게 받은 인상은 무엇인가?   

 

마치 어둡고 음침한 시궁창 같다고 하면 인종차별적, 종교차별적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겠지만, 그만큼 루시디는 불편한 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음침한 느낌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나는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가 얼마나 적나라한 것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낯선 세계이고, 그러므로 무엇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낯설수 밖에 없는 것일테니까. 설사 그 속에 우리 모두의 공통 분모인 삶, 사랑, 종교 등이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나에겐 인도란 먼 미지의 세계로 영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세계라는 풍문만 접한 나에게는 공통분모보다는 낯섬에 신경이 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낯섬이나 혼란스러움이 당사자들에게는 익숙함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혼란스럽다.  

 

하나, 삶! 인도의 현실상황 - 종교갈등으로 인한 유혈충돌, 시위- 과 런던에 거주하는 인도 이민자들의 삶. 영국인으로서의 완전한 삶을 꿈꾸는 이들, 영국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끝없이 인종차별의 벽에 부딪혀 살아가는 사람들. 뿌리는 인도이지만 삶의 터전은 런던인 인도인들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뿌리채 뽑아 다른 토양에 이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아니 적어도 바람직한 일일까? 이식된 뿌리는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을 수 있을 것인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 내는 것처럼 이민자들이 영국 사회를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그렇게 바꿀 힘을 소유할 수 있을까?   

 

살만 루시디는 이슬람의 신을 모욕했다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오랫동안 영국 정부의 보호를 받았다는데, 사실 그는 영국을 우호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국의 어두운 면을 까발리고 있다. 런던의 어둡고 음습한 뒤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여행자가 볼 수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터질듯 말듯 삐어져 나오는 인종차별의 무거운 먹구름이 그렇고, 살라드 참차를 체포해가는 런던 경찰의 괴괴한 모습도 신사의 나라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섬 그 자체이다. 우리는 너무 익숙함에 익숙해져 있어 낯섬을 공포로 인식해 버린다. 같은 문화에서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그런 낯선 세계의 민낯을 보게될라치면 진저리를 친다. 

 

둘, 종교! 종교는 환상인가? 속임수인가? 악을 심판하는 힘인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하는 힘인가? <악마의 시>는 종교적 색채가 진하게 배여있다. 이슬람적 색채가 전반에 걸쳐 스며 있다. 그 색채는 다소 어두운 색채가 아닐까? 이슬람을 일으킨 마훈드의 이야기. 아마도 이슬람세계에서 지탄을 받는 이유가 이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다신교와 우상숭배에 빠진 도시에서 유일신을 주창하며 일어선 마훈드. 어려움 끝에 도시를 정복하고 자비를 베풀고 모두를 개종시키지만, 표면적인 개종이 온전한 개종이 아님은 분명하다. 위협에 의한 개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의 사자라는 마훈드의 여색에의 탐닉- 부인이 12명이었다나. 알라신 외에 신이 없다는 말은 진실일까? 이 마훈드의 이야기 결말에는 알라가 아닌 다른 여신이 환상중에 나타난다.

 

나비떼에 둘러싸인 신비의 여인 아예사. 신의 계시를 전한다. 신이 함께 한다는 표징이 아예사를 감싸고 마을 사람들은 아예사를 따라 메카 순례여행을 떠난다. 이 비장하면서도 장엄한 순례행진을 본 일부 사람들도 자진적으로 이 행렬에 가담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믿음이 강해지면서 신의 권위로 감싸인 아예사는 점점 절대자로 변해간다.그러나 그 절대성은 위협을 받는다. 아예사가 악마의 자식으로 선고한 갓난 아이를 대중들이 돌로 쳐 죽일 때, 아예사를 따르든 순례자들의 마음 속에 이래도 되는가하는 회의가 자리잡은다. 하지만 바다를 목전에 둔 순례자들은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계시를 목도할 때까지 불신을 보류한다. 

 

셋, 영적 체험! 아예사를 따라 단체 순례길에 오른 마을 사람들의 믿음. 믿음의 세계는 현실세계와의 괴리감이 있는 신비함으로 가득찬 세계이다.  이것은 환상의 세계와는 다르다. 바다에 도착하면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는 신의 계시. 그리고 신의 사자 아예사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 끝까지 합리성에 호소하며 불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돌려 세우려는 미르자 사이드. 그 불신의 예언자는 몇 몇 개종자들을 얻게 된다. 신비한 일을 봄으로 영적 눈을 뜨게 되고 아예사를 따르던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이유로 아예사를 버리고 떠난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사람, 권위적인 남편을 보고 나서 믿음을 버린 사람, 저마다 어떤 사건을 계기로 불신에 빠져드는데... 이 이야기는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허구 내지는 우화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아예사를 따라 바닷물 속으로 사라진 사람들. 그들은 바닷물이 열린 것을 보고 그 속으로 행진해 가지만, 정말 바닷물이 갈린 것일까? 믿음이 있는 사람의 눈에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완전히 닫혀진 그런 세상이 있는 것일까?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는 있는 걸까? 

 

넷, 하나!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로서 권리를 근거로 말할라치면, 이건 '하나'임을 보여주려는 시도가 아닐까? 현실과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며, 선과 악도 다른 것이 아니다. 신과 악마도 다른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싯달타>의 마지막 장면이 오버랩된다. 고빈다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모든 것이 일체임을 깨닫는 순간....음, 그 순간을 향해 살만 루시디는 좌충우돌 달려온 것은 아닐까? 다만 접근하는 방향이 다른 길일 뿐. 종교라는 것에 우호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종교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불안한 의문만 잔뜩 던져주는 <악마의 시>이다. 하지만 살만 루시디가 종교에 우호적이지 않음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반대의 결론이 도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살만 루시디는 아주 영리하다. 종교를 건드리는 것 같으나, 그것이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 구별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일반 독자들은 특히 이슬람에 문외한들은 아리송한 몽환상태에서 텍스트를 읽게 되어 버린다.

 

의문, <악마의 시>란 무엇일까?

이슬람의 코란을 악마의 시라고 ...

책에서는 <악마의 시>로 언급된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발췌문

살아 있다는 사실, 그것은 사람이 살아 오면서 겪었던 모든 고통을 상쇄시킨다.

 

당신에게는 언제나 삶이 투쟁일거야. 삶에 대한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이지.

 

알리는 얼음에 뒤덮여 높은 절벽을 기어오르는 힘든 육체운동을 통하여 초월성이랄까 영혼의 기적 같은 것을 경험한 것이었다.

 

생물의 유한한 인식능력으로는 신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나 내 감각들은 천지만물속에서 조물주를 발견했노라.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됩니까? 그가 대답했다. 시인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나니, 상상력의 시대에는 굳은 신념의 힘으로 산을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자들이 즐비하도다.

 

밖으로 드러난 상처나 구멍의 크기만으로 내면의 상처를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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