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 그에게로 가는 길> / 김은미 김영우 지음 / 동녘

 

정약용을 알고 싶어 한승원의 소설 <다산>을 읽었다. 하지만 정작 다산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는 미진했었다. 이번에 읽게 된 <다산 - 그에게로 가는 길>은 정약용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인간 정약용의 모습을 가감없이 바라 볼 수 있도록 지나치게 미화하지 않고 그의 약점이랄 수 있는 것까지 보여주고 있다. 구성 자체는 사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어 청소년을 위한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꽤 많은 양의 정보를 담고 있어 다산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 생각되었다  

 

정약용의 고향 마재, 그 건축에 정약용이 일익을 담당했던 수원화성, 정약용이 결혼한 살았던 서울, 18년간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등, 네군데의 정약용의 주요 거점을 답사하며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태로 쓰여진 이 책은 읽기가 수월한 편이다. 

 

1. 어디에서나 한강이 보인다. - 정약용의 고향 마재

다산, 사암, 열수...정약용을 부르는 다른 이름들이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중 근 10여년간을 야생차가 많이 나는 만덕산의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에서 보냈다. 다산이란 '차가 많이 나는 산'이란 뜻이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이라 부른다. 한편 정약용의 일생을 다룬 <사암연보>라는 책이 전해져 내려온다. 이에 사암 정약용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정약용 선생은 고향 마재의 한강을 그리워했으며, 이 한강의 옛이름이 '열수'라고 고증하여 주장하면서 열수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열수'선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선생의 어릴 때 이름은 '귀농'이었다. 정약용의 아버저 정재원은 당파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귀농하여 마재에 살면서 정약용을 낳았기에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한 어릴 때 마마(천연두)를 앓아 눈썹 위에 상처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한 쪽 눈섭이 두개로 보였다. 그래서 눈썹이 세개처럼 보여 '삼미자'라는 별명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대부분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에 포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마도 물길을 따라 서울로의 접근성이 좋아 신 문물에 일찍 접할 수 있었다는 점과 서로 왕래하기에 편리했다는 점이 그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학의 집대성이라 불리기도 하는 정약용의 고향 마재 역시 한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다. 정약용은 18세(1784년)에 큰 형수의 동생인 광암 이벽을 통해 서학(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이 서학은 정약용의 운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남인 정약용은 노론으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빌미가 된 것이 바로 서학이다. 서학은 유교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게된다.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때 정약용의 형 세째형 정약종은 사형당하고,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가고,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고향 마재에 살게된 정약용은 자신의 집을 '여유당'이라고 불렀다. '여유'란 <노자>에 나오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은 조심스러움'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노론이 득세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 남인 정약용이 삶을 부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 생각한 대로, 그대 생가한 대로 - 경기도 수원 화성

정조는 왕이 된 후에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겼고, 이로 인해 화성에 신도시가 건설되게 된다. 정조가 사도 세자의 묘에 참배하러 올 때 임시 거처로 머물 수 있도록 화성 행궁을 짓는데 있어, 정조는 3년 상중에 있던 정약용에게 화성의 설계를 맡겼고 정약용은 설계는 물론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의 건축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수원 화성에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인 장용영이 있었다. 장용영은 임금을 호위하던 친위병이었는데, 장용내영은 한양에, 장용외영은 수원 유수부에서 임금을 호위했다.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 군사들을 지휘하는 곳이 '장대'였는데, 서쪽에 있는 장대는 서장대, 동쪽에 있는 장대는 동장대라고 부른다.   

 

정약용은 삼년 상이 끝난 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 서용보의 과실을 밝혀냄으로 이 때부터 평생 서용보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1801년 신유사옥때 서용보의 반대로 석방이 무산되는가 하면, 1803년 정약용을 해배하라는 명에 서용보가 반대하여 무산되었고, 1819년(58세) 정약용을 중용하려는 논의에서 서용보 반대하는 등, 이렇듯 결정적인 순간마다 서용보와의 악연이 질기게 정약용을 따라 다니게 된다.

 

정약용이 속해 있던 남인은 천주교에 우호적인 신서파와 천주교를 반대하는 공서파로 나누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입지가 약한 남인에게 서학(천주교)는 아킬레스의 건이었다. 일찌기 서학에 접한 남인들 사이에 서학이 번져 나가고, 서학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자, 남인 사이에서도 서학을 경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공서파의 서학을 싫어하는 경향은 당시 입지가 좁았던 남인의 세력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런지도 모른다. 정약용은 신서파에 속해 있었는데, 주문모 사건으로 공서파의 공격의 타켓이 된 정약용을 보호하기 방편으로 정조는 정약용을 외지인 금정찰방으로 보낸다. 중앙 정치에게 격리시켜 공격의 예봉을 피하게 하려는 수단이었다. 이 때 정약용은 정조에게 <변방사동부승지소>라는 글을 올려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한편 천주교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정조에게 고한다. '자명소'라고도 불리는 이 글에 정약용은 자신이 천주교 책을 읽은 적은 있으나 천주교 신자는 아니라고 밝힌다.

 

이후 정약용은 황해도 곡산 부사로 1년 11개월 부임하게 된다. 이 때의 목민관의 경험이 <목민심서>를 집필하는 데 기초가 된다. 곡산 부사로 부임할 당시 주세 거부 시위를 주동했던 이계심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였고, 호구 조사후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정리한 종횡표도 만들기도 하였다. 또한 지석영 선생의 종두법이 나오기 전에 이미 홍역의 치료 방법을 소개한 <마과회통>도 쓴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다.

 

곡사 부사 이후 서울로 돌아온 정약용은 형조 참의로 두달간 일했는데 그 때의 경험은 <흠흠신서>을 집필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후일 정약용은 자신이 접하고 조사한 사건을 바탕으로 <흠흠신서>를 쓰게 된다. '흠흠'이란 걱정이 되어 잊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재판을 할 때 아주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사하여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 설혹 너무 태양 가까이 날아

정약용의 가족 역사는 천주교 초기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정약용의 세째 형 정약종의 가족은 온 가족이 모두 몰살당한다. 정약종은 물론이요, 그의 아들 철상, 하상, 며느리, 딸까지 온 집안이 모두 순교를 당하게 된다. 당시 천주교와 관련이 있던 많은 사람들이 정약용과 인척 관계에 있었다. 처음 천주교를 책을 통해 배워 받아들인 이벽은 큰 형의 처남으로 사돈관계에 있었다. 이벽은 이승훈을 북경으로 보내 최초로 영세를 받게 하는데,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다. 그리고 천주교 백서사건의 주요인물인 황사영은 조카 사위,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해서 죽임을 당한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 윤지충의 외사촌인 권상연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순교를 당하였다. 

 

천주교 박해의 이면을 들여다 보면, 이는 딩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이 천주교를 빌미삼아 남인들을 공격한 것임을 알게 된다. 특히 남인이었던 정약용을 공격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탄압이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약용 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해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 유배길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정약용을 총애하던 정조가 죽은 이후 그를 막아줄 방패막이가 없었던 것이다.  

 

 

4 언제나 마음은 - 강진 유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되어 갔을 때, 처음에는 거처를 구하기조차 힘이 들었다. 마침 주막집 노파가 방 한 칸을 내 주어 4년을 보내게 되는 데 이 방을 '사의재'라고 한다. '사의'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이후에 고성암이라는 절의 한 쪽 방인 보은 산방에서 2년을 거처했다가 제자인 이학래의 집으로 가게 되고, 유배당한 지 8년만에 다산 초당으로 자리를 옮긴다. 귤동마을에 살던 귤림처사 윤단과 그의 아들 귤원처사 윤규가 정약용을 다산 초당으로 초대하였다. 다산 초당은 윤단의 아버지 윤취서가 지었으며, 다산 초당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였다.

 

강진은 정약용의 어머니 해남 윤씨의 고택이 가까운 곳이었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가 유명한 화가 윤두서이고, 윤두서의 증손자가 정약용이다. 어쨌든 이 고택에는 엄청난 책이 있었고 정약용은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되어 있을 당시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강진에 있을 때 정약용이 친하게 지내던 아암 혜장이라는 승려가 있었으며, 혜장의 제자 초의 선사는 정약용과 친분이 깊었을 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와는 동갑으로 친구 사이였다. 강진에서 정약용을 수발하던 홍씨라는 여인이 있었으며, 정약용과의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동안의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마재에 살고 있을 때, 홍씨와 홍임이 정약용을 찾아 왔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다시 강진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마재로 돌아온 때가 57세인 1818년, 그리고 그가 1836년 75세로 사망할 때까지 노소론계의 여러 학자들과 교우관계를 유지하며 학문에 매진하며 저술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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