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지음/


'꼬리에 꼬리는 무는 영어'라는 책이 있었다. 책의 선택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아가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사실 장 그르니에의 섬도 어떻게 보면 꼬리를 물다가 알게 된 셈이다. 도서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든 독서에 관한 책에서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된다. 그것이 바로 독서다."라는 장 그르니에의 말을 읽게 되었다. 매력적인 말이었다. 기억할 좋은 문구라 생각하고 SNS에 올렸더니, 어떤 분이 "장 그르니에 '섬'의 첫 문장이... '저마다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새잉 동 터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 순간이 있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천해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라는 글을 주셔서, '섬'이라는 작품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또 다시 주신 "제자 알베르 까뮈가 극찬했더군요."라는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움직였다. 까뮈의 <이방인>을 읽어 본 나로서는, 그리고 작가로서의 까뮈의 위상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까뮈의 극찬을 받았다는 말을 쉽사리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책의 첫 부분에 까뮈의 글이 실려 있었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 대한 극찬의 글이었다. 1920년대 젊은 날의 까뮈는 <섬>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지만 <섬>을 읽고 그 결심을 다시 한 번 굳게 다졌다고도 한다. 글을 쓰도록 동기를 주는 여러 책들이 있었지만, 세월에 묻혀 잊어버렸다 한다. 하지만 <섬>은 평생을 지니고 다니면서 열어보고 또 열어보는 책이었다고 한다. <섬>이 자신에게 주었던 충격에 비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앙드레 지이드의 <지상의 양식>에 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실은 <지상의 양식>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책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섬>의 첫 부분을 읽고는 얼른 책을 덮고 가슴에 안은 채 조용한 곳에서 읽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다는 말을 보고서, 나도 책을 덮었다. 무슨 내용, 어떤 표현이길래 이토록 소중하게 생각하였단 말인가?


나도 책을 덮고 먼저 <지상의 양식>을 읽기로 했다. 이건 또 뭐야? 의아한 책이었다. 까뮈가 <지상의 양식>을 평하면서 말했던 의아함과는 좀 결이 달랐겠지만, 수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닌 처음 보는 장르의 글이었는데, 이건 완전히 기존의 가치관을 부수어뜨리는 뽕망치였다. 인생을 즐기라. 우리의 감각을 채워주는 자연의 아름다움, 인생의 매력에 탐닉하라. 죽고나면 아무 것도 없나니 탐닉하라. 지이드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으로 먹고사는 걱정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느 정도 논리는 있지마는 온전히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절대 빈곤에 허덕이며 하루 하루 생존하는 것 조차 벅찬 사람들에게 지이드의 말은 사치를 넘어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지상의 양식>을 읽었다. 이 책에 대한 까뮈의 평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이제 까뮈가 극찬을 했던 <섬>을 읽었다. 그런데 이건 또 뭐야? 소설이 아니잖아. 이 책을 번역한 이화영씨는 자신이 사랑하는 산문집이라고 언급하였다. 끝까지 읽었지만 ...음...이건 무얼 이야기하고자 함인가? 일독이 주는 몰이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두 번을 읽을 때 그 느낌, 그리고 이해가 찾아 오는 경우가 많았다. 두번째 읽을 때...음...이 책은 <空>, 없음, 절대, 無에 대한 이야기인데, 첫 제목 <空의 매력> 아래에는 어릴 때부터 장 그르니에게 경험했던 모든 것이 빨려들어가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장 그르니에에게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아주 색다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수 차례의 환상도 아닌, 그런 일을 겪는다. 아무 것도 없음, 무, 공, 이런 것에 대한 초기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고양이 물루>에서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이야기이다.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동물적인 삶을 사는 것을 동경하는 듯한 투다. 계산이 없는 동물의 삶, 하고자 하는 일에 초집중하여 다른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단순한 삶, 뭐 그런 것에 대한 동경...그리고 고양이의 죽음, 안락사...결국은 무로 돌아간 고양이 물루...

<케르켈렌 군도>는 한 백정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다지 생각나는 것은 없다. <상상의 인도>에서는 작가의 생각이 가장 많이 묻어있다. 회색빛 하늘을 보며 살던 사람들은 일년에 한 번 바캉스를 떠난다. 정말 그러해야 할 삶을 찾아서, 남유럽의 태양이 빛나고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밝고 명랑한 곳을 찾아간다. 그러면 이미 그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디로 향할까? 상상의 여행 외에는 갈 곳이 없다. 인도가 바로 그러한 나라, 상상 속에 사는 나라가 인도이다. 인도의 모든 문화와 사회는 서구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고통스런 삶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인간의 삶에 기대지 말고 피안의 세계조차 넘어선 절대무에 도달하려는 열망을 북돋아 준다는 사실.

가장 절대적인 것은 <  >이다. <보로메의 섬>들...기억나는 것 없음


<섬>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삶을 즐기라는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을 찾아 보기란 어렵다. 하지만 까뮈는 <섬>에서 인생은 그저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닌 양, 무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삶을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통찰을 주는 책으로 평가하고 있다. <섬>에 드러나 있는 종교는 사후의 세계를 논하는 종교가 아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절대무에 도달하려는 인도의 종교적 견지를 취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을 논증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어쨌건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뭔가 도달해야 할 저 절대의 세계가 있다는 것만은 인식하자고 하는 건지...다시 읽어 볼지 말지...다만 아름다운 표현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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