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문화예술회에서 회원들과 수영구민들의 글을 엮어 만든 '수영문예'를 읽었다. 참 소박하면서도 정겨운 소재의 수필들, 내 고장 작가의 수필들에 한 동안 젖어 있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글감으로 쓴 수필들과 시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부산 수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이며 사람사는 이야기들이 지면에 펼쳐져 있었다. '멀리서 빛나는 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발 밑에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들이 많다.'(Daum 브런치의 '푸른냥 이야기'에서)


유태연님의 수필 '매표구'/ '매표구'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매표구(買票口)냐, 매표구(賣票口)냐. 표를 사는 창구이나 표를 파는 창구이냐? 하나의 대상이지만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의 변화는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를 쫓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정인호님의 작품 '구청장님 전상서'/  수영구 망미동에 '정과정' 정자가 있다. 고려시대 '과정 정서'라는 인물이 수영강변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임금님에 대한 충절을 노래한 '정과정곡'이라는 고려가요를 남겼다. 이 지역 도로명에 '과정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이 이름이 이렇게 역사적인 사실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랐다. 아직 가보지 못한 '정과정'정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곳에 서면 그 옛날의 향기를 더듬어 맡을 수 있을까? '정과정'정자에 들리기 전에 '정과정곡'을 읽어봐야되지 않을까?


정인호님의 수필 '등록상표'/ 흥미롭다. 1원을 투자하여 자신만의 홍보전략을 세웠다니. 정인호님은 송금할 때는 반드시 1원을 더 보태어 보내준다고 한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표인 것이다. 상대방의 통장에 찍힌 1,000,001원. 1,000,000원보다 1원에 더 큰 신선한 충격을 받지 않을까? 나도 정인호님의 등록상표를 도용할까 보다.


박경인님의 시 '단팥죽과 팥빙수'/ 부산 용호동 이기대 입구에 있는 '할매 팥빙수'는 전국적으로 유명한가 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혼자 알고 싶은 좋은 곳도 있을 것이다. 박경인님의 시에는 자신이 즐겨가는 팥빙수집 '남천동 보성녹차'집이 나온다. 이 시를 읽고서 아마도 보성이라는 곳이 머리속에 박혔는지도, 그래서 전라도 여행 때 불쑥 보성을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벌써 입하도 지나고 소만이라고 한다. 여름이 느닷없이 눈 앞에 나선 듯 하다. 박경인님이 자주 들리는 보성녹차 팥빙수집에 가면 혹 박경인님을 우연히 만날 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사진속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 


시는 운율과 리듬이 있는 음악의 문학이다. 하지만 시는 감성의 문학이며 지성의 문학이기도 하다. 글자가 형상화하는 이미지, 소리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즐길 수 있다면 이미 시를 즐기는 사람이다. 또한 시인의 생각과 그것을 풀어내는 감성을 쫓아갈 수 있다면 시가 더 좋아질 것이다. 시인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시인이 사용한 표현의 깊은 속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곱씹어 보는 것도 시를 감상하는 한 방법이다. 그러한 즐거움을 독자에게 주려면 시를 쓰는 사람은 시 속에 최소한의 단서를 남겨 놓아야 한다. 그 단서를 잡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그런 단서 말이다. 이러한 단서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시는 어렵다 너무 어렵다.


초등학생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영구민들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생각해 본다. 좋은 글이란 깊은 생각, 그리고 수려한 문체등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사실 자신의 생각을 읽기 쉽게 풀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나도. 좋은 글.


요즈음 들어 '무진기행'의 '김승옥'님이 눈에 밟힌다. 김훈님의 '라면을 끓이며'에서도 만나고, 순천만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을 방문했을 때도 만나고, 순천출신이란다. 비록 순천문학관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Daum의 '스토리펀딩'에서도 김승옥님을 만났다. 아주 오래전에 '무진기행'을 읽었더랬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 미안할 지경이다. 이 번 토요일에는 도서관에 꼭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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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피천득/ 범우, <자전거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피천득 수필집 <수필>과 김훈의 에세이집 <자전거여행>

 

 

수필!

글쓰기에는 수필만한 것이 없을 듯하다. 온갖 주위의 사건이나 사물들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하여 글을 쓸 수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렇듯 자유롭게 써 내려간 수필에는 글쓴이의 인격과 개성, 생각과 사상이 아무래도 은연중에 스며들 수 밖에 없는 듯 하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에는 피천득이 진하게 배여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 소심하면서도 자상한 할아버지,

하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할아버지가 느껴진다. 그 할아버지는 딸 서영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그 할아버지는 청초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로맨티스트이다. 선생의 눈에는 더러움이라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애써 그것을 피하고 아름다움만을 노래하려는 것일까? 선생의 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일 뿐...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 것을 소재로 한 유일한 예외는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와의 세번째 만남일 것이다. 하지만 아니 만남만 못했던 만남조차, 아사코에 대한 선생의 아름다운 회상을 훼손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선생의 수필을 읽으면서, 그냥 읽어나가기에는 아깝다고 느껴졌다. 선생의 글을 아껴 하루에 하나씩 읽으면서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고, 방안 가득한 커피향에 취해듯, 수수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배여있는 유려한 문장에 취하고 싶었다. 

 

선생의 수필 중 <인연>이나 <유순이>와 같은 글은 남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스토리가 있는 선생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아주 짧은 에피소드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단편 소설 한편을 읽는 느낌을 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 때의 풋풋한 로맨스를 편안하게 그려낸 이야기는, 마치 그 이야기가 우리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인양 느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다. 우리는 피천득 선생의 글을 읽고 우리의 지나간 젊은 때를 추억한다. 기억은 지나간 시간의 두께만큼 희미해 지는 것이겠지만, 희미한 만큼 오히려 아름답고 순수해 보인다. 아픔과 슬픔은 시간의 안개에 가려 아련해지고, 추억은 다만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자전거 여행!

김훈의 글은 난해하다.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을 읽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김훈의 사유의 방식이 어렴풋이 느껴지면서, 그 사유의 깊이에 감탄한다.

여행이란 움직임과 멈춤의 반복이다. 서로 상반되는 이 동작의 반복이 여행을 만들어 내듯, 김훈의 사유는 서로 모순되는 관념들을 하나로 묶어내려는 처절한 시도로 난해하다. 치명적인 봄의 관능을 노래하는가하면, 삶의 터전에 자리 잡은 무덤, 소가 매를 맞는 낙원등의 이야기는 양극단을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자전거가 달리는 길은 이미 몸과 하나가 되고, 지친 몸을 잠시 의탁하는 곳에서 그의 사유는 시간을 거슬러 또 다른 여행을 한다. 먼 옛날 그 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서로 통합되기를 질기게 거부해온 것들의 교차점을 모색한다. 부석사에서 그는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 의상과 원효의 서로 상반되는 삶과 철학을 생각한다. 동해의 대왕암앞에 서서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무기와 악기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신라 문무왕의 호국정신을 기린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지리적 여행이면서 아울러 역사 여행이기도 하며, 그만의 독특한 사색 여행이기도 하다. <자전거 여행>에는 김훈의 모습보다는 그가 지향하는 곳을 보여준다. 자연과 역사속에 숨겨진 모순들을 한덩어리로 묶어내려는 그의 시도는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오르는 그의 자전거처럼 힘에 겨워보인다. 아니 그의 시도를 쫓아가는 나 자신이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글은 감상을 표방하는 듯하나 논리를 따르고, 논리의 형식을 빌어 감상을 표현한다. 감상은 감상으로 받아들이면 되고, 논리는 그 논리를 따라 가면 될터이나, <자전거 여행>은 감상과 논리가 분할할 수 없는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따라가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그의 글은 수정처럼 투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훈은 아마도 자신만의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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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자전거 여행>

꽃피는 해안선- 여수 돌산도 향일암...

김훈은 겨우내 자전거를 타고 달려 달려 남해안에 도착한다. 겨울 장구를 벗어 버리고 가벼운 티셔츠로 꽃피는 해안선을 달리는 자전거, 책 속에서 봄 기운이 화락 달려든다. 어제는 봄 비 속에서 봄을 느꼈지만, 오늘은 책 속에서 봄을 느낀다. 김훈이 봄을 느끼는 방식은 정말 봄 스럽다. 김훈의 꽃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수 돌산도 해안선에 가득한 동백꽃 이야기. 그리고 매화, 산수유, 목련꽃 이야기. 이 꽃 이야기속에 봄을 대하는 김훈만의 독특한 시각이 숨어 있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21쪽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 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품어져 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이 꽃구름은 그 경계선이 흔들리는 봄의 대기 속에서 풀어져 있다. 그래서 매화의 구름은 혼곤하고 몽롱하다. 이것은 신기루다. 매화는 질 때, 곷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당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21쪽

 

<매화> 

 

<꽃잎이 벚꽃처럼 날릴 때>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끊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이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23쪽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 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 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24쪽

 

 

김훈은 봄을 이야기하면서 꽃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봄을 이야기할라 치면 꽃 이야기를 빼 놓지 않는다. 

봄은 생명의 태동이며, 만물의 시작으로 누구나에게나 봄은 시작의 의미로 다가 온다. 그러나 봄을 대하는 김훈의 생각은 다르다. 

김훈은 봄을 시작과 끝이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는 봄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꽃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생명의 부활을 찬미하는 이 봄에 말이다.

봄에 이런 사정없는 칼날을 들이댄 이가 또 있었을까?  하지만 봄도 가 버리고 만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훈은 봄의 관능을 노래한다. 절대 고승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감성의 선을 건드려, 사람의 냄새가 그리워 견딜 수 없게 하는 봄, 출가한 여승의 마음을 헤집어놓고 속세로 돌아서게 하는 봄의 관능을 이야기한다. 

 

13세기 고려 선종 불교의 6대 조사인 충지는 지눌 문중의 대선사였다. 충지는 초봄에 입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평탄하구나. 너희들은 잘 있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 지팡이 하나로 삶을 마친 이 고승도 때때로 봄날의 적막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인 지 산사의 어느 봄날 충지는 시 한 줄을 썼다.

아침 내내 오는 이 없어

귀촉도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이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이다. 충지 대선사가 봄 산사의 마루에 앉아 햇빛 가득한 마당과 숲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봄 기운이 숲에 넘실거리고, 나무들이 두런 두런 깨어나는 봄의 적막 속에, 아침 태양 빛은 마당에 가득했겠지. 봄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분주하고, 발걸음도 논으로 밭으로 달려가지만, 반면 산사는 인적없이 조용했을 것이다. 귀촉도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인지 '귀촉 귀촉' 하고 자기의 이름을 불러대며 우는데, 아마도 선사 마음은 고향으로 달려 갔다보다. 도를 깨치는 선사도 한 순간 봄의 품에서 몽롱해졌나 보다.

 

 

설요는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이다. 아름다운 이 여승은 꽃피는 봄의 관능을 마냥 산사에 앉아서 견디기가 어려웠나 보다. 시 한 줄 써 놓고 절을 떠나 속세로 내려와 어느 시인의 첩이 되었다고 한다.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그 때 이 여승의 나이는 스물하나. "이 여승이 견딜 수 없었던 생의 충동, 위태롭고도 무질서한 생의 충동의 주범은 봄이다. 7세기의 봄이나 13세기의 봄이 다르지 않듯, 올 봄 또한 다르지 않다. 꽃들이 해마다 새롭게 피었다 지고, 지금은 지천으로 피어있다." 김훈도 생의 대책없는 충동을 숨기고 있는 것이리라. 어찌 설요나 충지, 김훈만 그러랴.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김훈은 동백꽃 피어있는 여수 돌산도 해변 도로를 따라 달려 금오산 향일암에 이른다. 높은 암벽위에 자리한 향일암에 오르려면 간신히 한 사람만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돌틈 사이를 수직으로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꽉 끼이는 틈을 통과해 암벽위에 도달한 순간 갑자기 남해가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진다. 수직적 고양감과 수평적 무한감으로 가득한 향일암에서 김훈은 봄 바다를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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