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집 <꽃이 되어 새가 되어> / 문학사상사 

 

시집을 통독한다. 한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는 한 편, 한 편을 음미해 가며 읽어야 하는 것이거늘,

시집의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줄줄 읽어간다는 것은 시를 모르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주옥같은 시라도 단 한 편으로는 전하지 못하는, 아니 전할 수 없는 것을

시집에 실려 있는 여러 수의 시들이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들이 하나 하나 모여서 모자이크로 된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을 알겠다. 

시인의 삶과 생각의 풍경 말이다. 

그것은 한 편의 시를 통해서는 감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전에 꼭 한 번 시집을 통독한 적이 있었다. 고은 시인의 시집이었다.

고은 시인의 투쟁하는 삶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고은 시인이 사용한 시어들이

그가 살아온 삶을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아마도 고은 시인은 일생의 목표를 향해 올라가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고초도 마다하지 않으며 앞뒤 좌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오직 위만 바라보고 걸었을 것이다.

길가에 난 작은 꽃을 볼 만한 여유가 어디 있었을까?

하지만 나이가 들어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그 때에야 시인의 눈에는 길가에 핀 꽃을 보였다. 

아니 시인이 그 꽃을 보았다.

 

올라가는 삶에만 의미가 있을까? 

내려가는 삶에도 의미가 있다. 올라가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의미가.

세월의 무게를 진 나이듦의 통찰이 빚어낸 울림이, 나이듦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얼마만한 울림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나태주의 시집 <꽃이 되어 새가 되어>

 

여동생부부가 놀러왔었다. 막 이 시집을 읽고 느낌이 있은지라 한 번 읽어 보라고 건네주었다.

몇 편의 시를 읽은 동생이 하는 말, "시가 이렇다면, 나도 시를 쓰겠네."

하하하...대단한 자신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다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렇게 진솔하게 마음을 토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잔잔하게 압도해 들어오는 묵직한 울림.

 

 

 

이 시집 속에는 시인의 삶과 감정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시인은 - 다행이 시인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

- 지나간 날들을 회고하며 추억을 더듬는다.  

과하지는 않게, 다만 희미한 바람에 들꽃이 부끄럽게 흔들리듯, 그러한 잔잔함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

누구나 한 번쯤은 살았던 그 나라

우리는 추억이라 부르네

사랑이라고 부른다네."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 일부

 

 

<눈 오는 옛날>

 

이른 아침부터 오던 눈 점심때가 되어도 그치지 않고

저녁때가 되어도 그치지 않는다

새하얀 눈의 절벽에 갇힌 날 전화 한 통화 오는 일 없고

갈곳도 없고 할 일 또한 마땅찮다

어제저녁 잠까지 늘어지게 잤으니 낮잠 잘 일 또한 없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날 고구마를 쪄먹었을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무밥을 해먹었을 것이고

배추진잎밥도 해먹을 것이다

아이들은 배추꼬랑이를 깍아먹었을 것이고

일 없는 어른들은 눈 덮인 산에서 생솔가지 척척 쪄다가

사랑채 부엌 쇠죽 끓이는 솥에 매운 연기 모락모락 나게

군불을 지펴 물을 데워 식구들 밀린 목욕물도 푼더분하게 마련했을 것이다

 

한쪽에는 어이 뜨거 어이 뜨거 물을 끼얹으며

호들갑스럽게 목욕을 했을 것이고

또 한 쪽에서는 배불리 밥을 먹고 목욕도 하고 방바닥까지 뜨시겠다

사랑방 바닥에 등을 지지며 낮잠을 자기도 했을 것이다

 

더러는 마실 와서 하루 종일 자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눌러 지내는 이웃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눈치를 보이거나 가라는 말은 더군다나 하지 않았다

끼니때가 되면 한 상에 끼어 밥을 나누어 먹었고

밥이 모자라면 남은 밥 솥에 물을 붓고 흥덩흥덩 다시 삶아서

한 대접씩 퍼서 후루룩후루룩 소리를 내면서 먹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면 그칠 것 같지 않던 눈발도 멈추고 밤도 돌아오고 불도 켜지고

이웃은 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한마디 인사말도 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시인은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젊은 시절 독불 장군 같았던 시절을 돌이켜 본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았던 삶. 그 때문에 고통받았을 가족.

나이가 들면 눈은 침침해지고 인쇄된 글자도 아른아른하고 투명하게 맑은 대기속에 비친 산의 풍경도 흐릿하건만

 나이가 들면 보이는 것이 있는가 보다.나이가 들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관객을 위하여>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아니, 주인공이고 싶었다

주인공이 아닐 때도 구경꾼이기를 거부하고

주인공이려고 노력했다

관객은 언제나 넘쳐났다

결혼을 한 뒤에는 우선 아내가 관객이었고

아이들이 관객이었다

한 번도 주인공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관객의 외로움이나 고달픔 같은 건

생각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 자라고 결혼도 하고

43년이나 타고 온 기나긴 교직열차에서도 하차하려고 하니

네기 결코 끝까지 주인공일 수는 없는 일이구나

그 동안 나 하나만의 일인극을 줄기차게 바라보아준 사람들

그 누구보다도 아내의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된다

관객의 외로움, 그것이 이제는 내 몫으로 떨어지다니....

어 염치없음이여! 어이없음이여!

두려움이여!

 

 

 

시인은 가족에 대한 애정을 담담히 풀어낸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시인은 이렇게 하나 보다.

 

 <잡은 손>

 

손을 잡는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손을 잡는다

 

나이 들어 쭈글쭈글해진 손

핏기 없는 손

 

그동안 애 많이 쓰시었소

조금만 더 우리 손을 놓지 맙시다

 

유리창 밖 산들도 눈을 맞고 있다

나무들도 옷을 벗은 지 오래다.

 

 

아들에 대한 무심한 애정이 돋보이는 시도 있다.

 

 

사귀던 여자아이와 헤어지고 난 아들아이가

처음으로 집에 돌아온 날 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

밤사이 내린 눈도 많은데 눈은 계속해서 내린다

아들아이와 이마를 맞대고 아무 말 없이 아침밥을 먹을 때에도

아들아이 등 뒤로 눈은 내리고 또 내리고

...

나도 저 아이만 한 때 서울 여자한테 버림받고 돌아와 운 일이 있는데

나 그만 나이 든 사람이 되어 저 아이  마음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

 

<눈은 또 내린다> 중에서

 

 

그리고 미안함과 고마움, 부끄러움

 

<카네이션>

 

나 같은 것도 어버이라고

꽃을 받는다

병원 침대에 누워

어질어질한 정신으로

어버이날 꽃을 받는다

하얀 꽃 카네이션이 아니라

붉은 꽃 카네이션

고맙고 눈물 겹지만

실은 많이 부끄럽다

 

딸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 

파리 에펠탑 앞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며 문득 자신이 닮은 키가 작은 아버지가 생각난다.

오래전에 가 버린 아버지가.

아! 어머니...

 

 

<꽃이 되어 새가 되어>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긴다

 

날마다 하루해는 사람들을 비껴서

강물 되어 저만큼 멀어지지만

 

들판 가득 꽃들은 피어서 붉고

하늘가로 스치는 새들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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