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한문- 계몽편, 동몽선습/ 이재황 지음/ 안나푸르나

 

언제부터일까? 한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초등 6학년 때 친구 따라 신문 배달을 했다. 가까운 곳을 배달했던 나는 먼 지역을 배달하던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신문지국에서 기다렸다. 

아마 그 때였을 것이다. 신문을 보기 시작한 것이.

 

그 당시 신문은 한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 한자를 몰랐지만 어쨌든 신문을 더듬 더듬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기억 나는 건 '駐韓美軍'이라는 글자이다. 아마도 네 글자중 한 두 글자는 어떤 영문인지는 몰라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첫 글자 駐는 도통 음도 뜻도 모르는 글자였다. 사실 지금도 그 글자의 음이 '주'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그것이 '말이 머무르다'란 뜻이란 건 방금 검색해 보고 나서 알게 된 것이다. 

그래도 그 단어가 '주한미군'이란 것을 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아뭏든 이렇게 저렇게 끼워 맞춰가면서 신문을 읽었던 옛 기억이 아련하다.

한자에 관심을 가진 것이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중학교에서 '한문'과목을 공부하면서 기본적인 글자와 '주술'관계니 뭐니 하는 문장의 구성에 대해 배웠다.

누구는 참 싫어하는 과목이기는 했지만 난 적어도 한문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한자를 멋지게 쓰는 것을 좋아해서

낙서를 할 때도 한자 낙서를 좋아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한시가 있다.

 

春水滿四澤 춘수만사택

夏雲多奇峰 하운다기봉

秋月揚明輝 추월양명휘

冬嶺秀孤松 동령수고송

 

봄에 눈이 녹아 흘러든 물이 사방 못에 가득하고

여름에 봉우리를 덮은 구름이 여러 모양이구나

가을 창공에 뜬 달은 밝은 빛을 내 비취고

찬 바람 부는 겨울 언덕위에는 외로운 소나무만 아름답구나

 

 

아마도 중학교 한문시간에 배웠던 시 같은데, 마지막 연은 확실치 않다. 그래도 시 한 수만큼의 관심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후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느 때엔가 한자를 알면 많은 것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실 때 그 한문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더라면 더 잘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사 시간에 불상의 종류를 배울 때 나온 '반가사유상 , 이 이름을 외우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뜻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 의미가 '반만 책상다리를 하고 생각에 잠겨있는 불상'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그렇게 무작정 외우지는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뒤 늦게 이런 것을 알게 된 나는 딸아이에게도 한자를 가르치고 싶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한자를 좀 더 많이 알고, 동양의 고전을 원전으로 읽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무위당님의 블로그 '나물먹고 물마시며'에서 천자문도 끝까지 읽어보고, 노자의 도덕경도 접해보면서 한문을 읽고 그 뜻을 파악하는 데 재미가 들렸다.

처음으로 중국어를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중국어 회화, 중국어 문법을 훓어 보기도 했다. 

 

서점에서 '처음 읽는 한문'이란 책을 발견했다.

소설가 김훈님의 추천의 말씀.  "이제 , 이재황 선생이 펴내는 ... 이 책으로 공부할 때 우리는 서당에 갓 입학한 조선 시대의 어린이가 된다. 이슬비에 땅이 젖고 군불에 아랫목이 따뜻해지듯이, 따라가면 저절로 문리가 트이니, 작은 것을 바탕으로 큰 것을 알게 되고 배우면 스스로 즐겁다는 말이 진실로 옳다." 이 말에 홀랑 빠져서 덜컥 가져다가 읽다가 중단하고, 다시 읽기 시작하여 끝을 내게 되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그냥 소설 읽듯이 읽었다. 한자를 외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한문과 해석을 비교해가며 읽었다. 죽죽 읽었다. 공부는 하지도 않고.

 

한자, 한문. 어렵다. 쉽게 이해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어려운 부분은 역시나 어렵다. 글자도 어렵거니와 문맥을 통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하는 것도 어렵다.

한자에는 정해진 품사가 없어서 더 어렵다. 한 문장에서 어떤 글자가 명사로 쓰인 것인지 동사로 쓰인 것인지는 순전히 문맥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라니 더욱 어렵다.

한자의 음은 알지만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기도 많다. 음과 뜻 둘 다 모르는 글자도 꽤 있다. 누군가의 말에 "맹자를 100번을 읽으면 문리를 깨친다"고.

그래도 계몽편과 동몽선습을 읽고 나니 간단한 문장은 눈에 들어온다. 반복적으로 한문을 읽다보면 깨치는 것도 있겠지. 

 

갈 길은 먼데, 방향과 방법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니라면 그 때 가서 궤도 수정을 해야겠지. 

도덕경 읽는 즐거움/ 박영규 지음/ 이가서


도덕경은 무위당님의 블로그에서 일독한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taoshi

도덕경의 핵심 내용에 인상은 깊었지만, 그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도서관에서 서가를 뒤적이던 중 "도덕경 읽는 즐거움"이란 책을 발견하고 머리말을 보니 '노자와의 즐거운 전투를 기억하며'라는 표제가 눈에 띄었다.

게다가 도덕경을 비판적으로 살피면서 노자의 사상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였다. 또한 도덕경의 원문이 실려 있으며

어려운 한자의 음과 뜻을 알려주어 한문 공부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였다. 


제1부는 도덕경을 즐기기 위한 예비지식으로 도덕경에 대한 개관적인 정보, 노자와 공자의 본질적인 차이, 노자 이전의 도가 사상가들, 노자의 제자들, 열자와 장자의 삶과 사상을 다룬다.

제2부는 지식으로 읽는 도덕경으로 1~20장까지의 내용을 세밀하고 해석하면서, 다른 주석서와 비교하고 있다. 또한 다른 종교와 철학을 노자의 사상과 대립시켜 설명하면서 객관적으로 도덕경을 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제3부는 명상으로 읽는 도덕경으로 21~37장까지를 다루면서 필자의 잛은 명상을 덧붙여 놓았다.

제4부는 반론으로 읽는 도덕경이란 제목아래 덕경에 해당하는 38~81장까지를 다루고 있다. 각 장 아래 짧은 반론을 제시하는 형식으로 도덕경 내용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비판적인 눈으로 도덕경을 보도록 하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생각나는 구절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외 몇가지 밖에 없다. 

하지만 도덕경에서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도'를 따르는 길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자 함이란 것을 알겠다. 

그리고 노자의 '무위사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무위無爲'란 '하지 않음'으로 번역하는데,

이 '무위'란 것이 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되는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뭔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정의하려면 죽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가치있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일을 하는데 있어, 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무위'가 아닐까? 즉 일을 함에 있어서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위사앙이 아닐런지.

다만 자연의 순리에 맞게끔 일을 해 나가는 것이 '무위자연'사상일 것이다. 이렇게 일을 순리대로 자연의 도리에 맞게 해 나가는 행위를 '위무위爲無爲'일 것이다.

이런 '무위자연' 또는 '위무위'를 실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된 것이 자신을 한껏 낮추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일을 하게끔 하라는 것일테다. 물론 일을 잘 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박영규님의 도덕경 연구는 초반부에 세심히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그의 도덕경 비판은 노자 사상의 올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노자의 생각의 틀과 박영규님의 생각의 틀은 상당히 달르다는 것을 느낀다. 서양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우리 시대의 생각의 틀은 이분법적이며 논리적인 면이 강하다. 하지만 동양사상을 서양사상의 틀에 따라 논하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한 예로 '위爲'라는 글자 하나가 문맥에서 갖는 의미가 각각 다르다. 그러나 서양학문의 전제에서 본다면 두 개의 다른 개념에 하나의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마도 도덕경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러함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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