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일들이 예상외의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애초부터 땅끝마을에 가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언제부터인지는 희미해도 마음 한 구석 저 깊은 안쪽에는 늘 땅끝마을이 작은 소망처럼 자리 잡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 땅끝마을 여행은 순전히 즉흥적인 것이었다. 미답의 땅인 보성을 밟아보고는 어디서 힘이 났는지, 여기까지 온 김에 갈 때까지 가보자는 묘한 만용이 생긴 것일까? 율포에서 일박한 후 땅끝까지 가보자고 합의를 보았다.


가는 길에 월출산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가우도 출렁다리를 먼저 찾았다. 유홍준 님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무위사를 "한 여름에 낮잠 자다 깬 아이가 엄마 찾아 우는 절"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무위사의 유명세에 비해 볼 때, 그리고 석탄일을 일주일 앞둔 때였음에도, 무위사는 한참이나 인적이 드문 한적한 사찰이었다. 그 고적한 분위기는 한 여름 뜨거운 열기를 피해 기와지붕 아래 그늘진 마루에서 맛있게 낮잠을 자던 아이가 사방의 고요함에 문득 잠이 깨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울며 엄마를 찾을 법한 그런 분위기였다.   


무위사를 말하자면 국보 13호로 지정된 극락보전을 빼놓을 수 없다. 맞배지붕에 주심포 형식의 극락보전은 조선시대 초기의 건축형태를 보이고 있는 오래된 건물이다.

나무의 결과 색을 그대로 살린 기둥이 첫 보기에는 허름하고 낡아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이 세월의 묵직한 힘이다



극락보전 앞 널찍한 마당에 고적함이 감돈다. 극락보전 마당 건너편의 아름드리 고목나무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 극락보전과 마주하고 있었을까? 이 건물이 세종 때 지어졌다는데, 그때 심긴 나무일까? 움직이지는 못해도 한 자리에서 고스란히 그 역사를 지켜보았으리라. 그 시간의 깊이가 나이테로 쌓여 아름드리나무가 되었지만, 말이 없이 다만 어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으로 시간의 묵직함을 전한다.  


나무 그늘 아래 마루에 앉아 오월의 햇볕이 눈 부신 너른 마당 건너편의 극락보전을 한참 동안 무심히 바라본다.

어둠에 익숙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듯이 세월의 이끼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는데도 그런가 보다. 정신이 나른하게 고즈넉함에 젖어갈 무렵 시간을 거슬러 우뚝 서 있는 이 건축물이 보인다. 기둥을 붉은색으로 칠한 다른 건물들과 극락보전과의 거리는 공간 속의 거리가 아니라 시간 속의 거리임을 깨닫는다. 새 것이 옛 것보다 나을 것이란 보펀적인 생각은 때로는 무참히 깨어진다. 

 

극락보전이 지니고 있는 소박미는 맞배지붕과 주심포 형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일반적으로 대갓집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팔작지붕은 기와지붕이 전후로만이 아니라 좌우로도 날개를 폈듯 처마를 드리운다. 하지만 극락보전의 맞배지붕은 기와지붕이 용마루로부터 건물의 앞 뒤로만 펼쳐져 내린다. 기와지붕의 여러 형태 가운데 가장 단순한 형태이다.  


또한 주심포 형식은 지붕을 떠 받히는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건축 양식이다. 극락보전의 네 개의 기둥을 보면 그 위에 장식 모양의 '공포'가 놓여져 있다. 이와 같은 공포가 기둥 위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건축 형식이 '다심포'형식이다. 주심포 형식은 다심포 형식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다만 단순해 보인다.  



맞배지붕을 한 극락보전, 정면의 기와 지붕과 후면의 기와지붕이 가장 높은 중앙 용마루에서 만나 서로 배를 마주 대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을 보자고 이 곳에 들린 것일까? 역시 무위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고즈넉히 서 있는 극락보전을 보면서 찬란한 오월의 나른함을 느낄 뿐이었다. 큰 기대를 하고 무위사를 방문하는 것은 실망만 안겨 줄 뿐이지만, 무위사는 오랫동안 기억속에 남을 그런 곳이 될 것이다.   

무위사를 방문하면 반드시 그 고즈넉함과 극락보전이 아울러 내는 느낌을 놓치지 말기를...


다음 행선지는 다산초당이다. 정약용 선생은 18년 유배생활 동안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다산 초당은 땅끝까지 가는 길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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