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완만하지만은 않은 오르막길은 갈비뼈를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흙속에 덮여 있어야 할 나무뿌리가 얽기설기 얽혀 기괴하게 표면에 다 드러나 있다. 뿌리를 계단 삼아 힘들게 올라갔다. 문득 다산 선 이 뿌리 길을 라가면서 무슨 각을 을까? 

자신의 꼬인 인생 한탄했을까? 아니면 ' 이상 잃을 것은 없다. 다시 시작이다.'라고 생각했을까?


<뿌리길 - 출처: 전라남도 SNS 통합사이트>


다산초당을 방문했던 여행을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자리에서 다산선생이 체취제대로 감지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단지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편액에서만 희미하게 다산의 흔적을 느꼈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었다.


다산의 흔적을 진하게 느끼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의 기대가 어긋난 때문이었을까? 초가지붕이 아닌 기와지붕을 보 '다산초당이 아니라 다산와당이었어?'하는 생각? 다산선생의 영정을 보고 왠 안경? 고독하고 적막해야 할 유배지에 이런 북적임이란? 기대와는 다른 이질감 다산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의 삶을 되돌아보려는 마음을 흩트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산의 삶을 느끼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지였다.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면 뭔가 실마리가 있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은 그의 삶을 상상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을 놓치고 말았다. 적어도 다산 4경은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다산 선생이 남긴 흔적들, 정석丁石, 약천藥泉, 다조茶竈,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말이다.  



18년간의 오랜 유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다산. 10년간 고운 정 미운 정 다 들었을 다산초당을 떠나려다 문득 돌아서서 망치와 정을 가지고 초당 뒤 바위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 자신의 성을 바위에 새긴다. 다산초당의 제1경 '정석丁石'이다. 선생이 그 글을 새길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정석을 새기고 난 뒤에도 한참을 머뭇거리지 않았을까? 가다 멈춰서서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나는 다산초당 방문을 되돌아보는 지금에야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 본다.


<정석>


다산초당의 제2경과 제3경은 약천藥泉과 다조茶竈이다. 초당 주위를 살펴보던 선생 초당 뒤에서 물기가 축축이 새어나오는 곳을 보게 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손가락으로 이곳을 헤집어 본다.  그랬더니 바위들이 드러나고 그 틈에서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선생은 그 물을 마시기도 하고 그 물로 차를 끓이기도 했다. 이 물과 차는 유배생활로 초췌해진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이 샘을 '약천藥泉'이라 한다. 또한 초당 앞 뜰에는 널찍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선생은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이 바위 위에서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여 마시곤 했다. 이 바위가  다조茶竈이다   


<약천>


<다조>


선생을 이야기하자면 차를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선생에게는 '사암'이라는 호가 있다. 하지만 '다산'이라는 호가 더 널리 알려져 사용된다. 선생이 생활을 하던 초당은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덕산을 '차가 많이 나는 산'이라는 뜻의 '다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생이 기거하던 초당도 그래서 다산초당이라 불렸고, 선생도 역시 '다산'이란 호를 얻게 되었다.  


선생과 6년간 절친한 벗이었던 백련사의 혜장선사도 차로 맺어진 인연이었다. 혜장이 보내준 차는 선생의 건강과 마음을 다스리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억울하게 유배되어 온 선생, 큰 형 약전은 흑산도, 자신은 이 곳 강진에 유배되고, 작은 형 약종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목숨을 다. 이렇게 가족이 풍비박산 나는 통에 그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얼마나 컸을까? 게다가 열악한 유배생활은 선생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이런 선생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준 것이 바로 차였던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에 이르러 거의 절멸 상태에 있었던 차문화는 다산과 초의선사를 거쳐 추사에 의해 다시 부흥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산은 차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 돌이켜 보니 다산초당의 선생의 흔적들은 실은 차향의 흔적이 었음을 깨닫는다. 다산 선생과 차는 뿌리길의 뿌리들처럼 깊이 얽혀 있  선생 산인지 다시 생각해본다.


다산초당의 제 4경은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이다. 풀이하면 '연꽃이 핀 연못에 돌로 만든 산'이란 뜻이다. 다산초당 인근은 물이 많은 지역이다. 차나무도 습하고 일교차가 큰 지역에서 잘 자란다고 하는데, 바로 다산이 그러한 곳이었다. 다산초당 왼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선생은 연못을 조금 더 크게 만들고 연못 중앙에 돌을 쌓아 작은 산을 조성하였다.


<연지석가산>


초당에서 연못 쪽으로는 '관어제觀魚齊'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작은 문이 있다. 선생은 글을 읽거나 쓰다가 피로해질 때면 이 문을 열고 연지석가산을 보기도 하고, 연못 속을 노니는 잉어도 쳐다보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을 것이다. 좁은 연못을 헤엄치고 있는 잉어를 보면서 자신도 그 잉어와 같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산초당을 방문했다면 이렇듯 다산이 남긴 흔적들에 묻어나는 다산의 삶의 향기를 느꼈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을 살아남은 실마리의 꼬리를 잡고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산의 삶을 그려보는 시간여행을 했어야 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유홍준 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 장소를 답사할 때 기억해야 할 가장 기본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일정이었기에 아쉬움은 피할 수 없었던 일이었고, 다산초당의 방문을 계기로 뒤늦게라도 선생의 삶의 흔적을 좇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 아쉬움을 달래 본다.   


다산초 4경외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은 다산초당의 편액이다. 언제인가 이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것임을 읽은 기억이 있었다. 추사의 글씨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 글씨는 특별해 보였다. 하지만 자꾸 들여다보니 정이 가는 글씨이다. 각 글자는 모두 다른 필체낌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어우러진 조화는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다산과 추사가 한 시대를 살았다는 우연과 다산과 추사의 인연이 만들어낸 다산의 흔적이 바로 '다산초당' 편액이 아닐까?


이 우연은 다산동암의 편액에서 또다시 조우한다. 다산동암의 편액은 다산선생의 글씨이다. 다산과 추사의 글씨는 이렇게 나란히 서로 만남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산동암을 지나다산초당의 백미 백련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 길과는 달리 이 길은 그다지 가파르지는 않다. 숲의 향기에 취해 40여분을 걸어 800여 미터를 가면 고갯마루를 넘어 백련사에 도착한다. 선생은 혜장을 만나러 이 길을 무던히도 걸었을 것이다. 혜장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함께 이야기하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계절마다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는 길도 선생의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동백꽃 가득한 봄날의 숲, 동백꽃 떨어지고 초록의 향연이 짙어지는 늦봄의  숲, 매미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어대는 한 여름의 숲, 모든 잎들이 꽃이 되는 가을의 숲,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늦가을의 숲, 눈 덮힌 겨울의 숲, 선생은 이 숲 사이로 난 백련사 가는 길을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밤에는 부드러운 달빛을 초롱 삼아 달그림자 밟으며 길을 걸었을 것이다. 때로는 혜장이 이 길을 거슬러 선생을 찾았을 것이다. 선생은 혹 밤늦게라도 자신을 찾아 올 혜장을 위해 평소에도 문걸이를 걸지 않았다. 다산보다 14살이 어린 혜장이 초당을 찾아, "선생님 계십니까?" 하고 부르며 들어섰을 때, 다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혜장을 맞이 했을 것이며, 약천에서 물을 떠다가 다조에서 차를 끓이고, 찻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아 차향과 맛을 음미하며 대화를 즐겼을 것이다. 찾는 이 드문 외로운 유배지에서 선생의 마음에 위로가 된 것은 백련사 가는 길로 이어진 혜장과의 사귐이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서야 다산초당에 남아 있는 선생의 흔적을 찾아 선생의 삶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다. 아 무상한 세월이여, 선생은 가고 없고 그 흔적만 남아 있고, 난 그 향기를 좇아 나대로의 방식으로 선생의 삶으로 상상의 여행을 떠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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