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 박성완 옮김/ 창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2

 

생존만이 지상 과제였던 시대가 있었다. 또한 지금도 생존만을 당면 과제로 여기는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들에게도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원초적인 본능이 없을리야 없겠지만, 어차피 예술이란 풍요와 더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술의 발전은 풍요로 말미암은 바가 크다. 예술가들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예술 소비자들의 구미에 맞추어 작품을 만들어 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정당화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을 사용해 왔다. 그 때는 예술이 권력에 봉사하던 시대였다. 시민사회가 등장하고 권력자에 버금가는 부를 쌓은 시민들이 나타남에 따라 이들도 예술의 소비자가 된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시민들의 요구에 예술도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의 변화에 예술은 큰 영향을 받지만, 반대로 예술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그렇게 크지 않은 듯 보인다.

 

시간의 흐름을 역행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없다는 면에서 예술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고 형식화하는 시대가 있었고, 권력의 시녀였던 때도 있었다. 예술이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어 예술품을 생산하는 때가 있었다면, 오늘날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이 표방하는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은 고객의 요구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자기 성취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미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해 왔음을 보여준다. 객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에서 주관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예술, 뭔가 근본적인 것을 형상화 하려는 시도, 더 나아가 '자기 표현' 자체를 미라고 생기에 이르렀다. 예술의 본래 목적이 미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의 미래는 어떠할까? 미에 대한 관념은 어떻게 바뀔까? 순환의 고리 속에서 돌고 도는 것일까? 아니면 무한의 시공간을 직전하는 것처럼 계속 새로운 미적 개념이 등장하게 될까?  

 

하우저가 제시하는 르네쌍스의 개념이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사뭇 다르다. 르네쌍스는 한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역사적 시대라고 배웠던 것 같은데, 신 중심의 중세세계에서 인간 중심의 세계로의 전환, 고대 인간본위의 세계로의 복귀를 뜻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우저는 르네쌍스도 시대의 흐름의 일부분일뿐 칼로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아마 하우저의 말이 맞을 것이다. 역사란 원래 시대 구분을 허용하지 않는 연속체이다. 시대의 구분이란 역사가들의 인위적인 재단일 뿐이다. 역사란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질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입체적이다. 앞에서 보는 모습 다르고, 뒤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며, 위에서 보는 모습이 다르고 옆에서 보는 모습이 다를 것이다. 아래에서 보는 모습은 더 다를 것이다. 보는 시각이 다양한 만큼 역사 해석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다양한 역사 해석 심지어는 서로 상반되는 역사 해석은 역사를 올바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소일까? 긍정적으로 보자면 다양한 해석의 종합은 객관적 실체에 다가가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 왜 책을 읽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한다. 책을 많이 읽고 교만하게 되는 일을 경계하는 말이다. 진정한 책읽기는 지식을 쌓는 것에 있지 않고, 그 지식을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는데 있는 것이리라. 세계와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이 책을 잘 읽은 사람이리라. 신영복씨의 <담론>에 '한 발로 뛰기'라는 표현이 있다. 책을 읽기만 하는 것은 한 발로 뛰는 것과 같이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이다. '두발로 뛰기'위해서는 책을 읽는 행위와 자기 변화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술이 역사와 분리될 수 없듯이, 우리의 살아가는 삶도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은 예술과도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의 예술 이야기로 부터 삶을 읽어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끊임없는 상호작용, 관계속에 지속되는 삶은 어떤 원리,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예술을 변화시키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는 무엇을 동력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불가해한 시공간을 부유하는 역사는 인간 본성을 추진력으로 삼는다. 그 본성 중에서도 역사에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향한 지독스러운 집착이다. 인간사의 가장 비참한 역사적 사건들이 바로 그 집착 때문에 발생하였다. 비참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 본성의 그 추악함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집착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어야 한다. 

 

 

제1장 르네쌍스

 

1. 르네쌍스의 개념

자유주의적 르네쌍스관/ 관능주의적 르네쌍스관/ 국민적 민족적 특징들/ 형식원리로서의 통일성/ 중세와 르네쌍스의 연속성/ 르네쌍스의 합리주의

 

2.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예술과 궁정적 예술의 감상자층

중세말기의 이탈리아의 계급투쟁/ 길드를 둘러싼 투쟁/ 메디치가의 지배/ 자본주의의 발전/ 지오또와 뜨레첸또/ 르네쌍스의 궁정예술/

꾸아뜨로첸또의 시민적 자연주의와 양식의 혼합/ 자연주의의 변모/ 꾸아뜨로첸또 후기의 미술/ 길드의 예술활동/ 헌납자에서 수집가로/

메디치가의 예술보호/ 르네쌍스의 궁정문화/ 예술감상자와 여러 계층/ 르네쌍스 문화의 엘리뜨층

 

3. 르네쌍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

르네쌍스의 아틀리에 활동/ 예술 시장/ 길드로부터의 예술가의 해방/ 예술가와 인문주의자/ 새로운 미술이론/ 예술가의 전설/ 르네쌍스의 천재 개념과 독창성에의 의지/

스케치에 대한 평가/ 예술의 자율성/ 예술의 과학화/ 전문화와 다면성/ 인문주의의 사회적 가원/ 인문주의자들의 소외

 

4. 친꾸에첸또의 고전주의

예술중심지로서의 로마/ 고전주의와 자연주의/ 르네쌍스의 형식주의와 규범성/ 깔로까가티아

 

제2장 매너리즘

1. 매너리즘의 개념

매너리즘과 고전주의/ 매너리즘의 발견/ 자연주의와 정신주의/ 매너리즘과 바로끄/ 매너리즘과 고딕

 

2.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

외세지배하의 이딸리아/ 근대 자본주의의 시작/ 종교개혁/ 카톨릭의 개혁운동/ 미껠란젤로 / 현실주의 정치의 이념/ 마끼아벨리/ 뜨렌또 종교회의와 예술/

종교개혁과 예술/ 반종교개혁운동과 예술/ 매너리즘의 예술이론/미술아카데미 이념의 전개/ 아마추어 비평의 문제/ 피렌쩨에서의 매너리즘/ 매너리즘의 공간묘사/

띤또레또/ 그레꼬/ 브뢰겔

 

3. 기사도의 두번째 패배

세르반떼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국/ 세익스피어의 정치적 세계관/ 셰익스피어와 기사계급/ 작가와 패트런/ 셰익스피어의 관객층/ 엘리자베스 시대의 민중극장/

셰익스피어적 형식의 전제조건/ 셰익스피어와 인문주의 희곡/ 셰익스피어의 자연주의. 셰익스피어의 매너리즘

 

제3장 바로끄

1. 바로끄이 개념

인상주의를 통한 바로끄의 재평가/ 뵐플린의 근본개념들/ 통일성의 원리/ 예술사의 논리/ 우주적인 세계감정

 

2. 궁정적 카톨릭적 바로끄

근대적 교회예술의 성립/ 바로끄 시대의 로마/ 절대군주제/ 프랑스의 귀족/ 프랑스의 궁정예술/ 고전주의/ 아카데미/ 왕실의 매뉴펙쳐

아카데미즘/ 공인 예술과 비공인 예술/ 시민계급과 고전주의/ 근대적 심리학의 시초/ 쌀롱

 

3. 시님적 개신교적 바로끄

플랑드르와 홀란드/ 홀란드의 시민적 문화/ 시민적 자연주의/ 시믽거 예술감상자층/ 홀란드이 미술품 매매/ 홀란드 화가의 경제상태/ 루벤스와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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