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 이윤기 / 열린 책들

 

서점에 꽂혀 있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고 설레는 마음, <월든>을 보았을 때도 이 같은 약간의 흥분을 느꼈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읽는 데 여러날이 걸렸다. 아껴서 읽는 탓은 아니다. 읽기가 힘들었다고나 할까? 무의식중에 카잔차키스의 표현에서 은유를 찾아내려한다. 표현 하나 하나에서 주인공의 심정이나 작가의 은밀한 생각을 읽어내려는 의식이 책을 읽어 나가기 힘들게 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탓이려니 생각한다. 아무 생각없이 읽고 싶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두목과 조르바의 우정이야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두목은 물주이고, 조르바는 고용인이다. 두목은 30대, 조르바 60대? 아마 그럴 것이다. 두목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책으로 향한다. 동양의 종교에 심취해 있는 듯, 매일 불경을 읽으며 뭔가를 찾는다. 조르바는 삶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다만 삶속에서 삶을 즐긴다. 관습도, 도덕도, 종교도 그를 막아 설 수가 없으리만큼 그는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에게는 원시의 처녀림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냄새가 난다. 두목은 조르바가 마음에 든다. 조르바는 두목이 가지고 있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을... 조르바는 책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진짜 생생한 삶을 살고 있는 삶의 화신인 것이다. 조르바의 삶, 조르바의 자유는 그저 모순 덩어리이다. 삶은 욕망이며, 자유는 욕망의 충족이며, 욕망의 상호 충족의 원칙만이 조르바를 구속할 뿐이다. 갈탄을 캐내려는 시도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을 날려버렸을 때에도, 조르바는 춤을 춘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두목도 함께 춤을 춘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실패도, 가난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자유란 그런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는 반 종교적인 색채가 진하게 풍긴다. 신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들, 불신. 부패하고 타락해져 가는 종교를 향한 혐오감일까? 절대적 자유를 찾기위해종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까? 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일까? 아니면 신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관습, 도덕, 종교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허물어뜨리고,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려한다. 그는 두려워한다. 자유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이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보여 줄 수 있어요?"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에 둘러 싸인 구름... 이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 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 92쪽

 

자유란 달콤한 꿀처럼 유혹적인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유가 진정한 삶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두목은 유보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목은자유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 삶을 사는 조르바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선택할 자유와 능력이 있다면 자유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틀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비록 외면적으로는 자유롭지 않아 보이겠지만, 여전히 그는 자유인이다. 그러면 물고기가 물 속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스스로가 처한 틀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유롭다고 느깐다면, 자유로운 걸까? 그것은 선택에 의해 자유를 획득한 것이 아닐텐데. 그것은 주어진 자유일텐데...물고기가 물을 의식하지 못하고 물에서 자유로운 것과, 물이라는 구속을 의식하면서도 그 가운데 자유로운 것중 어느 것이 더 큰 자유일까? 물고기가 물 밖 세상을 동경하여 물을 뛰쳐 나와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므로 자유로웠던 것일까?

 

자유란 절대 선이 아니다. 자유란 상대적 선일지도 모른다. 자유란 상대적인 악일 수도 있다. 상대적이란 것은 필시 잣대가 요구되는데, 그러면 상대적 세계에서의 잣대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이 생각난다. 자유를 한계지으려는 시도, 어차피 자유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 뿐....

 

이 길을 내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객관성의 칼날: 찰스길리피스 지음/ 이필렬 옮김

 

라마르크의 진화사상과 그 의의

 

숲 속에서는 어디를 보나 다양한 생물들이 우글거린다. 땅 속에, 풀 밑에도, 심지어 시냇물 속에도 생명은 다양한 모습으로 꿈틀거린다. 생명의 세계의 이 풍부한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마르크 이전에는 생물들이 신의 무한한 배려로 그 환경과 목적에 맞도록 설계되고 창조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른 설명이 가능할 것인가?  만일 생물이 어떤 목적에 맞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면 적응이란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자연신학적 설명을 대신할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사람이 장 밥티스트 드 라마르크(1744~1829)였다.  

 

 

 

라마르크는 다윈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진화론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의 진화원리는 다윈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객관적 과학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생물 철학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에 근거해 있는 반면에 라마르크는 용불용설과 획득 형질의 유전을 주장하였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주장을 하게 되었을까? 

 

라마르크는 한 종류의 광물이 환경의 작용에 의해 다른 종류의 광물로 변한다는 사실로 부터, 광물에는 항구적인 종이 없는다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생물계에 적용시켜 생물종도 환경의 영향아래 다른 종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물종이란 고정된 것이라는 당시의 견해와는 다르게 라마르크에 있어 종이란 생명의 흐름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형태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해 생물이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는가? 라마르크의 철학에 의하면 생물에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생물에 내재해 있는 힘이며, 둘째는 물리적 환경의 영향이다. 그리고 생물과 무생물(환경)의 투쟁의 결과로 다양한 종이 발생한다. 생명의 힘은 생물이 끊임없이 복잡한 형태로 변하도록 작용을 한다. 그리고 물리적 환경의 영향은 이 자연스러운 연속적 변화를 깨뜨리고 불연속을 초래한다. 이 불연속으로 인해 종사이의 간극이 나타난다.

 

환경의 변화는 요구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요구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낳는다. 행동의 변화는 새로운 습관이 되고 특수한 기관을 변화시켜 마침내 생물체 일반을 바뀌놓게 된다. 그는 두가지 법칙을 끌어낸다. 즉 기관은 사용 여부에 따라 발달하거나 퇴화한다는 것, 그리고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획득한 형질은 유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획득 형질의 유전은 옳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르크는 생물학의 연구 방향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당시에는 현재 보이는 자연의 모습만을 연구하고 있었던 반면에 라마르크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자연의 추이,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던 것이다.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생물이 변화되어 왔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개척하였던 것이다. 라마르크의 생물학은 객관적 과학으로 편입되지는 못했지만 생물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함으로 다윈을 위한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위 내용은 객관성의 칼날의 일부분을 요약한 것으로 본인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02499388.jpg
0.03M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