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피스 지음

 

뉴턴은 흥미롭게도 갈릴레오가 사망한 1642년에 태어났다. 그는 1665-1666년에 미적분을 발견해내며 광학 색채이론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해에 달 궤도에까지 미치는 중력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이작 뉴턴 경(1642~1727)은 어떻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는가?

그는 "언제나 그에 대해 사색함으로써" 그러한 발견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베이컨적인 실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데카르트적인 명석함에 의지하여 그 발견을 이루었다. 그가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은 단순한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된다. 뉴턴의 물리학의 특징은 수학적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론 물리학이나 수리 물리학은 갈릴레오와 뉴턴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뉴턴은 실험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밝혀진 사실들을 통합하고 그 이면을 들여야 보는 능력과 그것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사실 뉴턴은 갈릴레오, 케플러, 데카르트, 호이겐스(1625~1695)등의 연구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선택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갈릴레오로부터는 단순히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운동의 변화가 수학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케플러의 제3법칙 즉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그 궤도 중심에서의 평균거리의 세 제곱에 비례한다는 법칙으로 부터 행성에 작용하는 힘은 그 궤도 중심에서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계산해내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또한 뉴턴은 데카르트로의 관성과 곡선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에 관심을 가졌다. 뉴턴보다 조금 앞서 호이겐스(1625~1695)는 원운동은 중심방향으로 가속된 관성 운동이라는 분석을 내 놓았다. 뉴턴도 호이겐스와는 별도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뉴턴이 호이겐스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것은, 뉴턴은 호이겐스가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즉 달이 그 궤도를 도는 것과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같은 현상이라고 생각을 한 것이다. 만약 달과 사과가 같은 힘에 의하여 움직인다면 천체의 움직임은 만유인력의 법칙하에 있는 관성 운동의 웅대한 예가 된다는 것을 알아 차렸던 것이다. 모든 천체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그 관성 운동은 만유인력에 의해 가속되어 원운동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개념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것은 서로 달라 보이는 것을 하나로 결합하는 뉴턴의 창의적 사색과 명석함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엄밀한 증명은 1685년에 이루어진다. 그는 케플러의 법칙과 호이겐스의 원심력을 결합한 엄밀한 기하학적 연역으로 그는 중력의 법칙을 천체의 규모로 증명한다. "나는 행성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원심력에 의하여 타원위를 회전한다는 명제를 발견했다." 당시 후크는 분명히 인력은 천체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며,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할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거장들 중 한 사람인 크리스토퍼 렌(1632~1723)과 젊은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1656~1742)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힘의 법칙으로 부터 천체의 운동을 연역해 낼 수학적 능력이 없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저술한다. 이 때 핼리 혜성으로 널리 알려진 천문학자 핼리가 이 책을 발행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후 그는 조폐국 장관으로 취임하며, 왕립 학회 회장이 된다. 기사 작위도 수여받고 1727년에 사망한다.   

 

 

뉴턴의 광학이론

1665년 뉴턴은 일차 프리즘을 통과한 각 색깔의 광선을 다시 이차 프리즘에 통과시키는 실험을 통해서 각 색채의 광선은 특유의 굴절량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굴절량은 보라색으로 갈수록 커지고 빨간색으로 갈수록 작아진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이에 뉴턴이 내린 결론은 백색광은 여러 종류의 색채를 가진 혼합광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빛과 색채에 관한 발견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빛에 대한 이러한 발견은, 빛은 단일하며 기본적인 것인 것으로 나뉠 수 없다는 뿌리깊은 직관에 반하는 것이었기에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뉴턴은 그의 색채이론에 반대하는 로버트 후크(1635~1703)와 그 외 많은 사람들과의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1675년 뉴턴은 빛과 색채에 관한 두번째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에테르 가설을 내세웠다. 이것은 에테르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론을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도입한 것이었다. 그는 에테르 가설을 물리학의 구조상의 필요에서가 아니라 물리학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한 조건으로 도입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뉴턴의 빛 이론은 기본은 빛의 입자설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뉴턴 빛 이론의 핵심은 그 입자적 구조보다는 오히려 빛의 복합적 본성에 있다. 뉴턴의 빛은 단일 색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광선의 혼합광이다. 뉴턴의 빛은 입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일한 광선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었다. 뉴턴의 광학적 원자론은 오해받고 있는 것이다. 물질의 구성 성분이 원자로 이루어진 것 처럼 빛의 구성 성분이 광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광학적 원자론은 철학적 원자론과의 구조적 일치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빛의 입자설을 뉴턴이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오해인 것이다. 뉴턴은 경우에 따라서 빛을 입자로 보는 것이 더 유용할 때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으로 보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뉴턴은 빛 파동을 횡진동이 아니라 종진동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적인 저술 <프린키피아>

뉴턴의 이 책은 과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자기학, 열, 광학 등 다른 물리학 분야는 뉴턴적 원리의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이라 할 만큼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 많이 읽히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책은 읽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기하학을 사용하여 그의 이론을 전개해 나가고 증명하였기때문이다. 만일 그가 발명한 미적분등을 이용하여 17세기의 새로운 해석학으로 표현하였다면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프린키피아>는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저항 없는 매질 속에서 움직이는 물체에 대한 것이다. 2권은 저항이 있는 매질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것이다. 그 대부분이 유체역학과 관계된 것이다. 그는 유클리드처럼 몇 가지 기본 정의와 세개의 공리로부터 수학적 연역을 사용하여 결론들을 유도해 낸다. 제3권은 주로 천문학과 관련된 물리적 지식과 관련이 된다. 뉴턴은 보편적 우주관을 형이상학적인 추론에 의하지 않고, 기하학적 증명에 의해서만 설명하려 했다. 그는 운동의 법칙을 태양계에 적용시켜서, 케플러의 타원 궤도가 천체의 필연적 결과임을 증명했다. 또한 우주의 모든 물체는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만유인력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달의 운동과 조수도 이러한 기본적인 힘의 영향아래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중력의 법칙으로 무한한 우주에 놓여 있는 지상과 천체의 과학으 통일시킨다. 이로써 이전의 지상의 물리학과 천체의 물리학이 다르다는 통념을 집어 던져버렸다. 

 

뉴턴의 신학

뉴턴은 아주 종교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종교인이 사람됨이나 태도를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성경 연구에 열심을 보였다. 개인적인 성경연구의 결과 그는 후년의 많은 합리주의자들처럼 삼위일체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신이 세계를 자유롭게 창조했다는 것과 그것이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뉴턴은 태양계에 있어서 누적되고 있다고 생각한 어떤 불규칙성을 신이 조정해 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에게 있어 신은 가설도 과학의 대상도 아니며 신은 확실성이었다. "신은 영원히 존속하며 어디든지 존재한다. ...신의 본질에 관한 관념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자연현상이라는 신의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취향과 궁극 원인에 의하여 신을 알 뿐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쯔는 뉴턴의 과학이 자연신학을 파괴하는 자기충족적 유물론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상가들은 라이프니츠에 동조하여 영혼이 없고 결정론적인 세계-기계상을 수립한 책임이 뉴턴이론에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호이겐스나 퐁트넬 같은 분별있는 사람들은 뉴턴이론이 너무 추상적이고 기계론적으로 불충분하여 오히려 자연신학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뉴턴 이론의 반형이상학적 특징

뉴턴의 이론은 성공적이었지만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형이상학적 체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떻게"와 "왜"를 동시에 설명해 주는 체계를 원했었다. 하지만 뉴턴은 천체의 운동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왜 중력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중력이 확실히 존재하고 우리가 설명한 법칙에 따라 작용하며, 천체와 해양의 모든 운동을 설명하는 데 풍부한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에도 만족하지 않는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나는 현상 가운데에서 중력의 여러 성질들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 현상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것은 모두 가설이라고 불러야 하기때문이다. 가설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든 물리학적인 것이든, 신비적인 것이든 기계적인 것이든 실험 철학에서는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뉴턴의 그러한 입장에 비해 볼 때 '모든 물체에 내재해 있는 어떤 미묘한 영"에 대한 그의 입장이나, 에테르가설등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과학성과 더불어 종교성도 아울러 함께 지니고 있는 묘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뉴턴과 뉴턴의 과학

뉴턴에게서 처음으로 이론과 실험이 대등하고 가장 직접적인 수준에서 만난다. 실천에서나 원리에서나 뉴턴은 계량 과학으로서의 물리학과 수량의 언어로서의 수학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수립했다. 뉴턴은 물리학과 천문학을 운동하는 물질에 관한 단일 과학으로 종합했다. 그리고 중력을 진공으로 돌입시킴으로써 그는 공간의 연속성과 물질의 비연속성을 조화시켰다. 힘과 운동으로는 연속이고, 물질로는 불연속이다

 

과학은 과학자에 의해 창조되지만, 그것은 자연에 관한 것이지 그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일단 그것이 창조되면 그것은 예술작품처럼 독립성을 갖는다. 인간 뉴턴은 꼴 사나운 오만에 빠진 적이 있었으며, 경쟁자에 대한 불관용을 나타내면서 추악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였다. 로버트 후크와의 광학논쟁이라든가 미적분을 둘러싼 라이프니쯔와의 진흙탕 싸움에서 그런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뉴턴의 과학은 겸허하다. 데카르트는 세계는 이래야 한다고 단독적으로 규정했다. 뉴턴은 단지 그것이 어떻한 상태로 있으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만을 말했을 뿐이다.

 

뉴턴의 이론이 이후의 세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해 볼 때, 뉴턴적 세계에서 자라나는 것은 의식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은 문화의 한 요소이며, 뉴턴이 없는 문화 속에 존재하는 것은, 교양있고 깨어있으며 그만큼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연구 대상이 되는 길이다. 찰스 길리피스의 서구의 과학문명에 대한 오만한 자신감?

 

뉴턴의 세개의 얼굴

뉴턴은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논쟁자 뉴턴, 신학자 뉴턴,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자 뉴턴. 각각의 얼굴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는 대개 과학자 뉴턴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뉴턴은 이 세개의 모습이 어울러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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