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 이난아 / 민음사


오르한 파묵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소설가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은 16세기 오스만제국에 살던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이 화가들이 소속되어 있는 술탄의 화원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충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비단 그 당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터키는 동양에 위치해 있고, 이슬람권에 속해 있기때문에 서양과는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서양에 인접해 있어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럽연합인 EU에 가입하기를 오랫동안 염원해 왔습니다. 


그러면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터키의 서양 지향적인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오스만 제국 술탄의 화원입니다. 술탄의 화원에서는 책의 겉표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책에 삽입될 그림을 그릴 때, 나무나 꽃, 동물등을 아주 섬세하게 그리는 장인들인 세밀화가들이 술탄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밀화가라는 이름값에 맞게, 쌀알등 아주 작은 물체위에도 깨알같은 그림을 그릴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오래전 헤라트파의 거장 비흐자드의 아름다운 그림을 원본으로 하여 온 평생 그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 완벽한 모사품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눈이 멀고 난 후에도 손으로 익힌 기억을 그것을 완벽하게 복사해 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여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이 보는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신이 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탈이아 베네치아에서 들어온 서양 화풍은 그와 달랐습니다. 서양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그림속에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인간의 눈에 비치는 대로 사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원근법도 사용하고, 인물을 그릴 때는 그 인물의 개성을 온전히 살려 그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양의 화풍을 술탄의 화풍에 소개하려는 에니시테의 시도와 세밀화의 화풍을 지키려는 화원장 오스만사이에는 알력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스테르는 술탄을 설득하여 서양 화풍을 사용한 그림이 포함된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술탄의 화원에서 일하는 장인 황새,나비, 올리브와 금박세공사 엘레강스가 오스만 몰래 이 작업에 참여합니다. 이 와중에 엘레강스가 살해되고, 2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온 카라는 삼촌 에니시테와 함께 살인자를 찾습니다. 이 도중 에니시테마저 살해를 당하자, 술탄은 오스만과 카라가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명을 내립니다. 이러한 추리소설적인 전개에 더하여 에니시테의 딸이자, 카라의 예전 연인이었던 세큐레가 등장하여 소설의 흥미를 더 돋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화풍이 충돌하면서 살인사건까지 터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두 화풍의 충돌은 단지 회화부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교의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의 전통은 우상숭배를 혐오하였고, 초상화를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에, 화면의 중앙에 인물을 크게 배치하고, 그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넣는 서양의 초상화는 이단적이며 신성모독적인 것이라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에 종교적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47장 '나는 악마다'라는 장에서는 서양풍의 그림이 악마의 영향, 또는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회화 전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한 점을 제시합니다. 세밀화가들은 전통적으로 세밀화를 완성한 대가들은 눈이 멀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떤 나이든 장인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눈이 멀지 않으면 그만큼 그림에 덜 열중했다는 표시가 된다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눈이 멀지 않으면 세인들과 세밀화가들로 부터 대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때문에 명예를 얻기 위해 눈 먼채 행동하거나,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술탄의 화원장 오스만도 결국 바늘로 스스로의 눈을 찔러 눈이 멀게 됩니다. 


그림이란 단순히 사물을 그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인지, 아니면 신 중심의 시각인지와 같이 말입니다. 회화는 그런 의미에서 종교, 철학과 나란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묘하게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겹쳐집니다. 살인자를 쫓는 구성도 그러하며, 더우기 살인자와 에니시테의 대화는, 윌리엄수사와 호르헤수사와의 종교,철학,예술을 넘나드는 격조높으면서도 격렬한 대화가 오버랩됩니다. 주관적 당위성에 근거한 광신적 신념은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수사와 같은 괴물을 양산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내이름은 빨강>에서도 <장미의 이름>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림과 관련된 살인사건에는 주관적 당위성에 근거한 광신적 신념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세밀화가, 종교성에 투철한 세밀화가들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등의 당위성을 내세우는 장면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토마스가 생각납니다. 토마스는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그래야만 한다'는 외부의 도덕적 의무 또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일종의 구속이라 생각하고 그를 거부합니다. 주관적 당위성 안에 안주하는 거장 화원장 오스만과 그 당위성을 부정하며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에니시테, 그렇다면 에니시테는 '토마스'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테죠.




장님이 되어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 깊었습니다. 그린다는 행위는 기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즉 대상과 그림을 동시에 볼 수 없기때문에, 그린다는 행위는 첫째 대상을 보고 기억한 다음, 둘째 그 기억에 의지하여 그린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수십년간 같은 그림을 그리며 몸에 익힌 기억은 눈을 감고서 단지 몸의 기억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읽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과자'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주 사소한 행동에 의해 기억이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터키여행을 다녀왔더랬습니다. 이 여행에서 <빨강>의 의미를 약간 짐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 이 제목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먼저 눈에 뛴 것은 터키 국기입니다. 그 국기를 월성기라고 하지요. 초승달과 별로 되어 있기때문이지요. 이 국기에서 눈에 확 띄는 점은 바탕의 빨강색입니다. 



또 한가지 터키의 집들입니다. 지붕이 한결같이 붉은 색 계통입니다. 



아래는 보스포러스해협에 면한 해안가에 있는 건물입니다. 역시 붉은 색 지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블루모스크의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입니다. 



터키를 대표하는 색깔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빨강색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은 빨강>이란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비록 터키가 서구화를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터키일뿐이다라고 소리치는 오르한 파묵의 고함이 들리는 듯합니다. 터키가 서구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터키의 정신, 문화가 남아 있을 거라는 소리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서양화풍을 도입하려했던 에니시테나 이슬람 전통화풍을 유지하려했던 오스만이나, 둘 다 오르한 파묵의 분신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은 <내 이름은 빨강>에서 발췌한 몇 구절들입니다.  


◆ 책에 대해서

'책은 영원히 남아." 1권 293쪽

<내 이름은 빨강>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니시테는 책은 영원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책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을 듣자 살인자는 정신없이 에니시테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과연 책은 영원할까요?


책은 우리의 슬픔에 스스로 위안이라고 착각하는 깊이를 더해줄 뿐이다. 

2권 221쪽 (카라)


◆ 사랑과 행복에 대해서 

"사랑은 결혼한 뒤에도 생기니까요. 잊지 말아요. 결혼하기 전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결혼과 함께 꺼져 버려요. 그 다음은 공허하고 슬픈 흔적만 남게 되죠. 결혼한 후에 느끼는 사랑도 물론 언젠간 끝나기 마련이지만 행복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죠. 그런데도 성미 급한 바보들은 결혼하기 전에 사랑을 활활 태워서 모든 사랑을 소진해 버리고 말죠. 왜냐고요?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예요." 


"그럼 가장 중요한 게 뭐란 말이요?" 


"행복이죠. 사랑과 결혼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1권 329쪽(세큐레와 카라의 대화중에서)


사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머리를 짜내는 저 같은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 2권 327쪽 세큐레


나의 모든 생애를 세밀화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화원이 예헤라트파 거장들이 이룩해 낸 아름다움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는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다.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삶이 쉬워진다. 이런 겸양이 우리에게 고귀한 미덕이 되는 까닭은 그 것이 삶을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권 56쪽


◆ 종교와 철학, 미술에 대해서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1권 321쪽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씌어 있지. 1권 323쪽


갑자기 세상이 서로 통하는 문이 달린, 수많은 방을 가진 궁전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기억하며, 상상하며 드나들 수 있지만, 대부분 게을러서 조금만 움직일 뿐 항상 같은 방에 머무르고 있는 거지요. 2권 326쪽 세큐레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려는 바보 같은 제 아들 오르한은 시간을 멈추게 한 헤라트파의 장인들은 절대로 저를 저처럼 그릴 수 없다는 걸 상기시켰어요. 반면에 아들을 안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유럽화가들은 절대로 시간을 멈추게 하지 못할 거라며, 아무튼 저의 행복의 그림은 절대로 그려질 수 없다고 수년간 줄기차게 제게 말했지요. 2권 333 세큐레

 

서양화속에 우리가 그려진다면 우리는 그림과 테두리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될 것이다. 헤라트파 장인들이 그린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우리는 신께서 우리를 보시는 곳으로 인도될 것이다. 만일 중국 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그림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의 그림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기때문이다. 2권 57쪽


오르한은 현재 연금상태에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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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김창석/국일미디어

-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할 책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장황함과 난해함을 무기삼아 독자를 잠의 무자비한 손아귀로 끌고가는, 그러나 명료한 정신으로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맑은 에메랄드빛 바다속에 각양각색의 산호초와 그 사이로 형형색색의 크고 작은 열대어들이 노니는 바다속 풍경을 보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책,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입니다.

 

 

위대한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결정체이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유독 독자의 시선을 끄는 정수 즉 백미가 있기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중 '눈(雪)'의 풍경이 그러합니다. 

 

알프스 산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요양원, 한스 카르도르프는 눈이 내리는 날 혼자서 스키를 타고 온 산을 돌아다닙니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경사진 전나무 숲은 눈으로 뒤덮여 온통 하얗습니다. 눈 외투를 두툼하게 걸친 자연은 절대 침묵으로 도도한 장엄함을 뿜어내고, 점차 심해지는 눈보라로 땅과 하늘은 물론 그 사이의 공간도 온통 하얗게 뒤덮여버립니다. 한 치 앞도 분별할 수 없는 백색의 어둠속에서 한스는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입니다. 마침내 아무도 없는 작은 오두막집을 발견하고는 통나무벽에 기대어 쉬는 순간 한스는 깜박 까무라치고 맙니다. 그 짧은 까무라침속에 한스는 밝은 햇살이 가득한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뛰노는 꿈을 꿉니다. 

 

이 장면은 완전히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와, 조금 과장하자면, 나 자신이 거의 무아지경에서, 고요하고도 장엄한 그 눈의 풍경속에 한스가 되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나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알베르틴이 잠든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 왔습니다. 그 때는 온 몸의 신경이 책의 지면을 뚫을 듯이 모아지면서,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며 영상을 그려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비 갠 투명한 대기속을 날아온 선명한 빛깔의 풍경이 망막에 꽂히듯이, 잠든 알베르틴의 모습이 내 마음의 막위에 생생한 모습으로 새겨졌습니다. 마르셀은 잠자는 알베르틴의 모습에서 수많은 알베르틴의 얼굴이 숨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Sleeping Beauty Colored by PinkParasol

 

오랫동안 마르셀는 지나간 시간속에 사라져 버린 시간의 기억을 찾아서 그것을 생생하게 형상화하기를 바랬지만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인해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을 되찾게 됩니다.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 레이나 고모집에서 먹었던 마들렌 과자의 맛이 되살아나는 동시에 그 때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후에도 우연한 사건들에 의해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 하나 되살아나면서 그는 이를 형상화하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됩니다. 

 

마들렌 과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다양하게 회자되고 재현되고 있습니다. 생쥐 요리사 이야기 <라따뚜이>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입니다만, 여기에서도 마들렌 과자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라따뚜이의 요리를 맛 본 요리 전문 감식가의 눈이 순간적으로 휘둥레집니다. 순식간에 그의 기억은 어린 시절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어머니를 생각하게 되죠.

 

☞ 라따투이 장면 감상 (주요장면 1:00 ~ 2:2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에는 마르셀의 유머, 재치, 위트가 반짝인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구절이 그 중 하나일까요?

 

어느 생면부지가 전재산을 자기에게 남겨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말라빠진 빵만 있는 식탁에 떨어뜨리는 눈물이 덜 나오는 가난뱅이와도 나는 같았다. 현실을 견딜만하게 만들려면,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서 뭔가 철없는 사소한 말을 이야기해야 한다. 92쪽

 

 

마르셀은 평생 천식으로 고생을 합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그에게는 계속되었습니다. 그에게 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날마다 24시간의 절반을 쪼개서 봉사해야 하는 또 하나의 주인이 나를 부르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기때문에. 우리를 속박하는 이 노무는, 우리가 눈 감으면 완수한다. 아침마다 또 하나의 주인에게 우리는 돌아간다. 그렇지 않으면 밤의 강제 노무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641쪽

 

그는 공쿠르의 미간일기(未刊日記)를 읽고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는 예술적 감동이라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자문해 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예술의 감동은 어떻게 오는가? 평범한 사람들을, 보도 듣도 못한 매력을 가진, 방문해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고,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은 사람으로 만드는 놀라운 마법과도 같은 힘을 느낄 때 감동이 오는 것일까?

 

 

때로는 그의 글 가운데 동양의 노장사상과도 비슷한 생각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 세계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감촉하고, 생각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 두 세계 사이에 서로 부합하는 다리를 걸 수 있으나, 그 헤아리지 못할 간격을 메우지 못한다. 277쪽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전 7권으로 집필된 대작입니다. 번역자 김창석씨는 독자들의 요청에 부응하여 한권으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 놓았습니다. 전체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원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한권으로 꾸몄다고 합니다.

 

 

아름다움과 깊이를 소유한 그의 생각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다고 하건만, 나에게는 그저 희뿌연 안개속에 언뜻 언뜻 보일 뿐, 그것을 다 찾지는 못하였습니다. 언젠가는 또 다시 이 책을 집어들고, 아마 그 때는 한 권으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아니라 7권으로 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되겠지만, 일종의 보물 찾기를 할 기회가 찾아 오기는 하겠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중 각 권은 그 독자적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작품처럼 느껴지기때문에, 때로는 한 권씩 읽어도 그 아름다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고 하니, 천천히 기회를 내어 전권에 하나씩 도전해 보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문학 고전의 감동을 만화로 만난다.

(서울대 선정 문학 고전 15)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그림 한종천/ 글 최윤정/ 학산문학사 (채우리)

 

만화! 초등학교때 무척 만화를 좋아했었다. 멋진 그림을 근사하게 베끼는 것도 좋아했었다. 이제 초등4학년인 딸애도 만화의 캐릭터를 즐겨 그린다.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만 매일 그리고 또 그린다. <쵸파>는 가끔... 부전자전인가? 하하

 

그러다 20대엔 <슬램덩크>에 푹 빠져 신간이 출간될 때마다 서점에서 사서 동생과 함께 보던 재미란... 새 만화책을 펼 때 느끼던 두근거리는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러다 우연히 40대 중반에 <로지코믹스>라는 버트란트 러셀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만화를 만났다. 그 부제가 아마 <토대를 찾아서> 였지.

 

로지 코믹스를 보면서...와~ 이런 만화도 가능하다니,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러셀을 만화로 다시 살려내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리논리학자로 수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수학사에서 '러셀의 역설'을 모른다면 그는 이단아일 정도이다. 러셀의 역설은 수학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러셀은 수학을 가장 견고한 기초가 있는 학문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흔든 그 기초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결과 나온 책이 화이트 헤드라는 수학자와 공동집필한 <수학원리>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아뭏든 그의 범상치 않은 일생과 그의 논리, 사고를 한 권의 만화책에 담아 내다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었다. 

 

로지코믹스

 

그 이후 오늘 도서관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찾다가 우연히 또 진주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게 바로 이 책이다. 만화다. '원작의 재미와 가치를 이렇게 충실하게 살려낸 만화책이 또 있을까요?' 어떤 교사는 이렇게 말하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전에 <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조금 읽었는데, 상당히 어렵운 책이라고 느꼈었다. 그 때 미처 다 읽지 못하고 반납을 했었는데, 이 번에 다시 읽어보려고 찾는 중에 내 눈에 문득 들어온 책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만화를 다 보고나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온통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흐름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프루스트의 정신 - 흘러간 시간을 어떻게 되찾게 되는지 그의 긴 여정을 알게 되었다.

 

이제 <한권으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다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 7권으로 된 전권을 읽어보려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든다. 

 

 

제목에도 나타나 있듯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시간이라는 불가해한 대상물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시간의 신비라고나 할까, 그 불가해한 성질을 해독해 보려는 프루스트의 집념이 담겨있다. 프루스트는 과거의 기억들이 시간에 의한 망각의 작용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 마르셀은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 우연찮게 어릴 적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시간과 결부된 그 기억들이 어떻게 현실을 구체화하는지에 대한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현실과 기억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상념의 여행을 떠난다.

 

 

 

결국 이 책의 주인공 마르셀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는 그 되찾는 시간, 기억들을 잡아놓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원했던, 그러나 포기했었던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너무나 평범하고 사소한 일들에 의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된다. 그는 우연히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보다가, 아주 어린 시절 레이니 고모가 주던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맛을 기억해 내면서, 그 시절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 난다. 또한 길을 가다 반듯하지 못한 포석에 걸려 비틀거리다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행복감에 젖기도 한다. 그러한 세세한 기억들이 살아 나면서 그의 작가적 재능에 대한 의혹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는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경위이다. 

 

 

 

 

리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반백이 된 머리를 보거나, 쭈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문득 시간이 아득히 흘렀음을 느낀다. 그리고는 그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하고 의아해 한다. 시간은 파괴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적 관점에서 본 엔트로피의 법칙에도 시간의 흐름은 되돌릴 수 없으며, 시간의 흐름은 무질서를 증가시키는 방향 즉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라 한다. 그 뿐아니라 시간은 우리의 기억마저 송두리째 삼켜버리기 조차 한다. 단지 지나간 시절의 단편적인 모습들만 띄엄 띄엄 떠오를 뿐이다. ·

 

간이란 희랍어 어원으로 크로노스, 즉 자신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신이라고 한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힘을 갖고 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나는 시간 그 자체이고, 공간을 갖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지나온 장소는 되돌아 갈 수 있는 반면 지나온 시간은 되풀이 하여 살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철학자 쥘 라뇨 역시 "공간은 나의 힘의 표상이고, 시간은 나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형태"라고 말함으로써 시간의 불가역성 앞에 놓인 인간 존재의 비극적 모습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p202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의 그토록 슬펐던 일들이나 아픔들이 아련해지고 심지어 그 아픔까지도 추억이 되어 아름답다고 느껴지니 이야말로 신기한 노릇이다. 우수와 슬픔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간의 흐름 속에 파괴되어 그 온전한 형체나 느낌을 되찾을 수 없지만, 오히려 그 기억속에 아름다움이 덧붙여진다는 것은 왜 그럴까? 아름다운 슬픈 추억?

 

 

그는 세월 속에서 모든 것이 파괴되며, 그 가운데 아름다움만 남겨 놓고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수와 슬픔이라고 생각한다. p210

 

 

 

시간이란 신비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러한 시간의 가면을 벗기기를 원한 것이리라. 그는 시간의 본질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는 시간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르셀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젊었을 때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그들이 몰라보게 변신한 모습을 보고 경악한다. 프루스트는 그 광경을 마치 시간이 베푸는 가면무도회 같다고 표현한다. 프루스트는 이런 시간의 무자비한 파괴의 모습과 덧없이 사라지면서 물질적인, 감각적인, 지취를 남기는 도망자의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소설가가 시간의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p222

 

나는 생각했다. 내게 아직도 작품을 완성할 힘이 있다면, 평소 우리 눈에 안 보이는 '시간'의 꼴을 똑똑히 표시하리라고... 그리고 시간 안네 차지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보리라고...! p225

 

 

그가 발견한 시간의 정체는 무엇일까?  마르셀이 경험한 것처럼 숨어 있던 기억들이 아주 사소한 우연한 자극에 의해 되살아나는 과정은 신비로운 황홀한 경험이다. 갑자기 허영만 화백의 <식객>의 고구마편이 생각이 난다. 성찬이가 넣어준 고구마을 베어먹는 순간 사형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주루룩 흐른다. 엄마 생각이 났기때문이다. 어릴 때 엄마가 삶아주었던 고구마. 고구마는 엄마에 대한 기억을 소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엄마를 그리는 마음과 사랑에 목이 메여...

☞ 식객 고구마편 1편 감상

http://cafe.daum.net/jeju-uneedpartners/M3mR/23?q=%BD%C4%B0%B4%20%B0%ED%B1%B8%B8%B6

☞ 식객 고구마편 2편 감상

http://cafe.daum.net/jeju-uneedpartners/M3mR/23?q=%BD%C4%B0%B4%20%B0%ED%B1%B8%B8%B6

 

 

기억은 결코 지워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어딘가에서 자극을 기다리며 숨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억은 현실을 구체화하는 현존하는 그 무엇이다. 아마 프루스트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닐까?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면서 이 점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과연 프루스트는 시간의 본질을 발견한 것인지 확인해 보려한다. 자 이제 시간 여행을 떠나 보련다. 프루스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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