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신영복 지음/ 돌베개

 

<책은 도끼다> 박웅현의 책 제목이다. 아주 인상적인 제목이다. '철학은 망치로 한다. 완고한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이다. 중세인들은 알콜로 견뎠다. 최면제인 알코올이 각성제인 커피로 바뀌면서 근대가 시작되었다."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체계내에서 작업하는 것과 그 체계밖에서 판단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 바하-영원한 황금고리>도 생각난다. 물속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가 물을 좀 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체계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체계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호프스태터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체계, 그 이전에는 전혀 체계로 인정받지 못했던 체계를 인식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체계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그 체계를 떠나야 한다고 설득시키는 일에 종종 생애를 바친다."라고 지적했는데, 아마도 신영복님이 그런 소수의 사람이 아닐까 한다.

 

             담론           책은 도끼다            괴델 에셔 바흐(상)(까치글방 150)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체계는 인식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생활공간이 되었다. 이 체계내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다만 거기에 맞추어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체계 자체를 생각하는 사고방식도 있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론이 현실과 모순된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대체로 두가지의 대응 방식을 취합니다. 첫째 실사구시의 대응방식입니다. 현실에 비추어서 그것의 해답을 모색하는 방식입니다. 탁상의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방식입니다. 이론과 현실이 불일치될 때 현실 중심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 실사구시입니다. 강화학에서는 이러한 실사구시의 방식을 '물리'방식의 대응이라고 합니다. 강화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리'방식의 대응입니다. 이것은 이론의 준거를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경제 불황이라는 현실과 경제 이론이 차질을 빋을 때 실사구시적 대응방식은 현실 경제를 중심으로 구조 조정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경제를 살리는 방식이 현실의 물리를 중심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진리 방식의 대응은 '경제란 무엇인가?" "경제는 왜 살려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경제'라는 개념의 준거를 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해고와 법정관리를 통해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 과연 '경제'의 근본적 개념과 일치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경제를 살리는 이유는 사람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개념 자체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을 진리 방식의 대응이라고 합니다.'물리'방식의 대응입니다. 'Here and Now' 그리고 How가 물리 방식의 실사구시라면, 'Bottom and Tomorrow'와 Why가 진리 방식의 대응입니다. 양명학과 강화학은 근본을 천착합니다."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또한 현실이라는 틀 자체를 다시 성찰해 보는 보다 근본적인 대응방식이 있다. 완고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야만 자신을 둘러 싸고 있던 알 껍질을 바라 보듯이, 그리고 우물안의 개구리가 우물을 벗어나 우물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듯이, 상위의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해 있는 인식의 틀을 성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이 "깨닫음" 이라는 말은 신영복 <담론>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이다. 그의 강의는 깨닫게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가르치는 것은 깨닫게 하는 것, 이미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불러내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결론이다.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깨달음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공감을 불러 일으켜 냄으로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 줄 수는 있다.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이 그의 강의의 목표이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이다." 라는 말에 비추어 보면 그의 강의는 예술이어야 했다.

 

'관계'라는 말은 <담론>의 또 다른 화두이다. 근대 사회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에서 시작된다.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기초로 출발하는 자기 인식 및 세계 인식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중심으로 모든 것들이 판단하게 한다. 이러한 인식체계는 현대 사회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더불어 사는 삶 보다는 존재와 존재의 충돌에서 비롯된 치열한 경쟁속의 삶, 그리고 삶의 비인간화는 근대 존재론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런 존재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으로 '탈존재', '존재의 해체'가 이야기되고 있다. 핵심은 '존재'가 아니라 '관계'라는 것이다. 관계가 거세된 존재는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이 관계에 의해 규정되어진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관계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인문학 공부는 세계와 인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사이의 관계를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사회가 '홀로 존재하는 존재들의 집합체가 아닌 상호 공감이라는 관계속에 형성된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이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중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다. ...또 다른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다." 공부란 머리에서 시작한다. 배움이 첫번째 고리이다. 하지만 머리 속에 든 지식은 마음 속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마음에 이른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며 공감이란 대상에 대한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대상과의 관계의 형성이다. 이제는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함께 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발로의 여행이 그 다음 과정이 된다. 발로의 여행은 실천으로의 먼나먼 행로이다.

 

책읽기와 공부가 어떠해야 하는 지 자문해 보게 된다. "책은 혁명이다'라는 말이 있다. 책은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가슴과 발에 변화를 일으킨다. 공부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갈 길을 찾는 작업이어야 할 것이다. 책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길은 내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  

 

* 메모해 놓은 글귀

추억은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가다가 어느날 문득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되어 찾아 오는 것이다.

"바다를 본 사람은 물을 말하기 어려워한다." (맹자)

"대교약졸"  최고의 기교는 졸렬한 듯하다.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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