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 민음사

 

북 아프리카 알제리 해변의 모래 사장... 태양은 사정없이 내려 쪼인다. 그러나 아랑곳 없이 출렁이는 바닷물은 상쾌하다.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은 달구어진 백사장 위를 겅중겅중거리며 달린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힌다. 눈썹가로 흐르는 땀방울이 눈가로 스며 든다. 눈이 따갑다. 저 놈의 태양...눈을 찡거리며 가늘게 태양을 치어다 본다. 

 

뫼르소는 살인의 동기를 해명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우스꽝스러운 대답인 줄은 알지만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장례식날도, 총으로 아랍인을 살해한 그 날도, 예비 심문을 받는 날도, 재판이 진행되는 날도 어김없이 피부에 스며나오는 끈적끈적한 땀으로 몸은 너덜 너덜하다. 뫼르소가 사형을 당하는 날도 그럴 것이다. 뫼르소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작열하는 태양의 숨막히는 열기는 떨어지지 않는 허물처럼 따라 다닐 것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일까? 뫼르소에게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소설 전체에 걸쳐 의미가 있는 것,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 집요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사랑이야말로 살아가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최소한 뫼르소에게는 그렇지 않다. 뫼르소는 야망도, 결혼도, 엄마를 사랑한 것도...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학생 때에는 그런 종류의 야심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그러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중요성이 없다는 것을 나는 곧 깨달았던 것이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요?"하고 마리는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중요성도 없는 것이지만 정 원한다면 결혼을 해도 좋다고 설명을 했다. ...마리는 결혼이란 건 중대한 일이라고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아니야"하고 대답했다." 51-52쪽

나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거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75쪽

 

그렇다면 뫼르소에겐 아니 <이방인>의 작가 카뮈에게는 무엇이 중요한 것이었을까? 죽음이다. 카뮈의 철학적 에세이 [시지프 신화]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란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 된다." 카뮈의 최대 관심사는 죽음이었다. 이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 뫼르소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흥미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사형집행을 보러] 갔고, 돌아오자 아침에 먹었던 조반의 일부분을 토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버지가 좀 역겹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가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사형 집행보다 더 중대한 일은 없으며, 요컨대 그것이야말로 사람에게는 참으로 흥미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어째서 그 때 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일까!  122쪽

 

카뮈는 사형반대론자였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아마도 카뮈가 죽음을 이야기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리라. 사형집행을 당하는 사람에게도 최소한 삶에 대한 희망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사형 방법론에는 어이 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삶의 희망이라는 것이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어이없어 보이는 주장은 수형자가 사형이라는 비인간적인 제도에 어쩔 수 없이 정신적으로 동의하고 협력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있는 것 같다.   

  

예컨대 또 어떤 때는 법률의 초안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형법체계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임을 나는 알아차렸다...단두대의 칼날을 사용할 경우 결함은 그것이 아무런 기회도, 절대로 아무런 기회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수형자의 죽음은 결정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처리가 끝난 일이며 확정된 배합이요 성립된 합의여서 취소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만에 하나 어쩌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있으면 다시 할 뿐이다. 그러므로 난처한 일은, 수형자로서는 기계가 아무 고장없이 작동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내 말은, 바로 그것이 결함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수형자는 정신적으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탈없이 진행되는 것이 그에게 이로운 것이다. 123쪽

 

그렇다면 정말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 무슨 의미가 있길래 살아야 하는 것일까? 뫼르소는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죽음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 걸까? 죽든 죽지 않든 세상은 그냥 무심할 뿐이고, 달라질 것도 없는데... 뫼르소는 사형 선고를 받고 상고한다.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서 용솟음치는 삶에 대한 무서운 욕망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상고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하지만 상고가 받아들여진들 어차피 죽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사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국은 죽어야 할 인생이 아니냔 말이다. 뫼르소는 혼란을 느낀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상고가 기각되어도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 스스로 모멸감을 느낀다.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결국, 서른 살에 죽든지 예순 살에 죽든지 별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 어떤 경우에든지 당연히 그 뒤엔 다른 남자들 다른 여자들이 살아갈 것이고 여러 천년 동안 그럴 것이니까 말이다. 요컨대 그것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 지금이건 이십년 후건 언제나 죽게 될 사람은 바로 나다. 그 때 그러한 나의 추론에 있어서 좀 거북스러웠던 것은, 앞으로 올 이십년의 삶을 생각할 때 나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저 무서운 용솟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십 년 후에 어차피 그러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내 생각이 어떠할까를 상상함으로써 눌러 버리면 그만이었다. 죽는 바에야 어떻게 죽든 언제 죽든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그러므로(그리고 어려운 일은 이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타내는 모든 추론을 잊지 말도록 명심하는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상고의 기각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126-127쪽

 

하느님, 종교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 많은 사형수들은 죽음 직전에 사제를 만나고 신을 찾고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사제는 뫼르소를 도우려고 노력하지만 뫼르소는 단호하게 그 도움을 거절한다. 뫼르소에게는 그것도 역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지금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사후의 세계는 그의 관심 밖이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점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나는, 그러한 것을 자문해 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내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128쪽

 

뫼르소는 사제와의 대화 도중 폭발한다. 뫼르소는 속 마음을 폭풍처럼 쏟아 놓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즈음 그의 내부에서는 무엇인가 터지고, 그 터뜨려짐은 절규가 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송두리채 솓아낸다.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 뿐이다.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할 수 밖에 없다. 숙명처럼 다가 오는 죽음은 모든 것을 부조리하게 만들어 버린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죽음의 불길한 바람이 항상 곁에서 냄새를 풍기는 삶은 얼마나 부조리한 것인가? 사람들은 이 엄연한 진실을 무시하고 모르는 체 살아간다. 이 풀 수 없는 부조리를 안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삶을 어떻게 할거나?

 

그 때,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속에서 그 무엇인가가 툭 터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목이 터지도록 고함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사제복 깃을 움켜 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 속을 송두리째 쏟아 버렸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 한 가치도 없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그에게는 없지 않으냐? 보기에는 내가 맨 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니, 또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 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 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그 역시 그 까닭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의 그 하느님,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세상엔 특권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른 삶들도 또한 장차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 그 역시 사형을 선고 받을 것이다. 그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었으면서 자기 어머니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받게 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말인가? 살라마노의 개나 그의 마누라나 그 가치를 따지면 매한가지다. 자동인형 같은 그 작은 여자도, 마송과 결혼한 그 파리 여자나 마찬가지로, 또 내가 결혼해 주기를 바라던 마리나 마찬가지로 죄인인 것이다. 셀레스트는 레몽보다 낫지만, 셀레스트나 마찬가지로 레몽도 나의 친구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마리가 오늘 또 다른 사람의 뫼르소에게 입술을 내바치고 있은들 그것이 어떻다는 말인가? 이 사형수야, 도대체 알기나 하느냐? 미래의저 밑바닥으로부터...이런 모든 것을 외쳐 대며, 나는 숨이 막혔다. 133-136쪽

 

먼 미래에서 불어 오는 암울한 바람이 실제 현실이 되었을 때에야 뫼르소는 이제까지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의 실체를 깨닫는다. 왜 그토록 모든 것에 냉소적이었는지, 왜 모든 것을 '의미가 없다. 가치가 없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 지를 깨닫는다. 발악에 가까운 소동이 끝난 후 뫼르소는 오히려 평온함에 잠긴다. 이 평온함 속에서 뫼르소는 또 다른 것을 깨닫는다. 그는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인생은 언젠가는 가게 되어 있는 것인데,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희망도 없지만 두려움도 없다. 뫼르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 뫼르소는 참으로 '희한한 평화'를 느끼며 세계의 무관심이 정답게 느껴진다. 그 순간 뫼르소는 언제나 자신이 행복했으며 지금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 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 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이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 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잇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133-136쪽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때에는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이 어떻게 노벨상을 수상할 정도의 대단한 작품인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읽고 났을 때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건조해 보였던 문장들이 오히려 습기 빠진 대기를 통해 비치는 별처럼 초롱 초롱함을 느꼈고, 어지러워 보였던 생각의 조각들이 짝을 맞추어 가면서 커다란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풍경화가 아닌 추상화인 듯 하지만... 이 소설의 의도를 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펄떡이는 심장을 감지한 것만 같았다. 아마도 작가도 소설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 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추상화는 죽음이 아니라 삶을 그린 것이라고 강하게 느낀다. 이방인 뫼르소의 마지막 절규와 희한한 평온 가운데의 독백은 두고 두고 곱씹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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