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언어학강의/ 페르디낭 드 소쉬르/ 최승언/ 민음사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꼭 읽어야할 책 100권)


예감이 적중했다. 읽기 어려울 거라 생각 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꾸역 꾸역 읽었다. 꼭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일까? 혹은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일까? 하는 의문이 내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어렵게 일독한 후 그것으로 만족하고 지나치려니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았다. 현대 사상사에 미쳤다는 엄청난 영향을 생각하면 그랬다. 다시 한 번 읽기로 작정했다. 처음 읽을 때 짙게 시야를 가로막았던 안개가 두번째 읽을 때는 한결 옅어졌다. 안개속에 싸여 애초에는 보이지 않았던 문장들이 불쑥 눈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두번째 읽을 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첫번 째 뜬 구름 잡듯이 읽는 것과는 달랐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난 언어학자이다. 소쉬르의 언어학 연구는 언어학뿐만이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에까지 큰 공헌을 하였다. 소쉬르는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기호학의 원류, 구조주의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소쉬르는 학위 논문 외에는 남긴 저서가 하나도 없다. 소쉬르는 강의가 끝나면 자신의 강의 노트를 잘게 찢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일반언어학강의>도 소쉬르가 쓴 책이 아니라, 소쉬르 사후에 제자들이 그의 3차에 걸친 강의를 재구성해 낸 책이다. 


그러면 <일반언어학강의>는 어떤 중요성이 있는 것일까? 


첫째 소쉬르는 <일반언어학강의>을 통해 현대언어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소쉬르는 언어 활동(langage)을 언어(랑그 langue)와 화언(파롤 parole)로 구분했다. 소쉬르는 랑그를 언어활동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랑그란 인간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사회적 산물로 두뇌에 형성되는 언어 규범이라고 정의된다. 다시 말하면 개개인이 언어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사회집단이 채택한 필요한 약정의 총체이다. 소쉬르는 이러한 랑그를 연구 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을 언어(langue)의 언어학이라 부르며 그의 언어학은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파롤은 언어 활동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행위이다. 화자가 개인적 사고를 표현하기 위해 말을 하는 행위를 파롤이라한다. 여기에는 두뇌에서 하고 싶은 말을 결합해 내는 과정과 그것을 표출하는 일련의 발성행위 모두를 포함한다. 이 파롤(화언)은 모든 언어 변화의 요람이다. 이 파롤을 연구 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을 화언의 언어학이라 부른다.


사회내의 수많은 사람들의 언어행위(파롤)을 통해 사회속의 개개인의 뇌속에는 하나의 언어체계 즉 랑그가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개인이 자신의 사고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머리속에 형성된 랑그라는 체계에 따라 말을 한다. 이렇게 랑그와 파롤은 서로 대립되는 요소이지만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랑그)의 언어학만을 다루었으나, 아마도 시간이 더 허락되었다면 화언(파롤)의 언어학도 다루었을 것이다. 

 

언어의 언어학은 또 다시 공시언어학, 통시언어학, 지리언어학, 회고언어학 등으로 나누어진다. 시간의 개입을 배제하고 언어 체계상에 공존하는 사항 간의 관계 및 상태를 연구하는 언어학을 정태언어학 또는 공시언어학이라 한다. 대조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어를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게 하는 현상들을 연구하는 언어학을 진화언어학 또는 통시언어학이라 한다. 언어현상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있다. 지리적 차이에 기인한 언어의 차이와 언어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언어학은 지리언어학이다. 또한 통시언어학에는 두 관짐이 있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전망적 관점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회고적 관점이 있다. 주어진 하나의 시기에 입각하여 하나의 형태에서 무엇이 나왔는가를 연구하는 관점이 전망적 관점이며, 그와는 반대로 주어진 하나의 시기에 존재하는 하나의 형태가 있을 때 어떤 더 오랜 형태가 이 형태를 만들었는지를 찾는 관점이 회고적 관점이다.  


<일반언어학강의>는 언어학 개론서로써, 언어학의 용어를 정의하고 언어학의 연구 대상을 명백히 하여 과학적 연구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를 기초로 현대언어학이 세워져 왔다는 사실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가 현대언어학에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해 왔는지 말해준다.    



둘째, 소쉬르는 언어를 일종의 기호로 보았다. 언어기호는 하나의 개념과 하나의 청각영상치 결합된 것이다. 언어기호는 개념과 청각연상이라는 양면을 가진 정신적 실체이다. 이 실체를 기호(signe)라고 하고, 개념은 기의(시니피에 signifie), 청각영상은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라고 부른다. 언어기호는 기의와 기표의 결합체인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기호의 근원적인 특성도 밝힌다. 기표를 기의에 결합시키는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기호의 자의성', 기표는 그 청각적인 본질 때문에 시간 속에서 전개되며 또한 시간의 속성에서 비롯되는 특징을 지닌다는 '기표의 선적인 특성'. 이 두가지 특성외에도 기호의 불변성과 가변성도 논한다. 소쉬르의 언어 연구는 필연적으로 기호 연구로 이어진다. 이 연구는 기호학이라는 학문을 탄생시킨다. 


 "언어는 관념을 나타내는 기호 체계이며, 따라서 문자체계, 수화법, 상징적 의식, 예법, 군용신호등에 비견할 만하다. 언어란 단지 이들 체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 생활속에 있는 기호의 삶을 연구하는 과학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심리학의 일부분을 이룰 것이며, 따라서 일반심리학의 일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호학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기호학은 우리에게 기호가 무엇이며 어떤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기호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될지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할 권리가 있고 그 위치는 미리 정해져 있다. 언어학은 이러한 일반 과학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기호학이 발견하게 될 법칙들은 언어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세째,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는 구조주의 탄생의 요람이다. 어떤 사물의 가치는 구조속의 관계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가진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근본적으로 구조적이다. 소쉬르는 언어 자체를 거대한 하나의 체계로 보았고, 그 체계속의 하위단위들은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구조속의 관계를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나타내준다. "언어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언어학이 연구하는 것은 언어를 구성하는 기호들과 이 기호들 사이의 관계이다.", "전체는 부분 때문에 그 가치가 있고, 부분 역시 전체 속에서의 그 위치 때문에 가치가 있다."


언어 가치를 논하는 소쉬르의 설명을 잠깐 살펴보자.


" 언어기호는 개념(시니피에)과 청각영상(시니피앙)의 대칭물로 나타난다.



또 한 편으로는 이 기호 자체, 즉 개념과 청각영상의 결합체도 역시 언어의 다른 기호들에 대한 대칭물이다. 다음 도식이 보여주듯이, 언어는 하나의 체계로서 이 체계의 모든 사항이 연대적이고, 한 사항의 가치는 다른 모든 사항의 존재에서 비롯된다."


또 서로의 관계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든 아주 흥미로운 예가 있다.

"불어의 mouton이 영어의 sheep과 의미는 같으나 가치는 같지 않다. 요리되어 식탁에 놓인 한 점의 고기에 대해 영어에서는 mutton이라고 하지 sheep이라 하지 않는다. sheep과 mouton 사이의 가치 차이는 sheep이 mutton이라는 말과 병존하는 데 비해 불어 낱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동일 언어 내부에서 유사한 개념을 표현해 주는 모든 낱말들은 서로를 한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 경외하다, 겁내다 등의 동의어는 상호 대립에 의해서만 그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 만일 '두려워하다'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내용은 모두 경쟁어들에게로 가버릴 것이다. 어떠한 사항의 가치도 그를 둘러싼 주위에 의해 결정된다."


두 개의 하위단위가 결합하여 상위단위을 형성한다는 연사관계를 설명하면서 든 다음의 예도 흥미가 있다.

" desireux 는 두개의 하위 단위로 구분된다. desir-eux.  [desir과 eux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가지며 존재하는 낱말이 아니다. desireux는 독립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두 요소가 연대하여 만들어진 산물이다.] 이 두 요소는 독립적으로는 의미가 없지만 서로 결합하여 상호 작용을 함으로써만 그 가치를 가지게 된다. eux와 같은 접미사란 혼자 떼오놓고 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접미사가 언어 속에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chaleur-eux, chanc-eux ...과 같은 계열의 낱말 때문이다. desir 이라는 어간도 자율적이 아니다. 접미사와의 결합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roul-is라는 낱말에서도 roul-요소는 접미사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는 부분 때문에 그 가치가 있고, 부분 역시 전체 속에서의 그 위치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 사이의 연사 관계는 각 부분 사이의 관계와 똑 같이 중요하다."

 

소쉬르의 파악한 언어는 거대한 체계속에 있는 다양한 하위요소들의 대립, 차이, 관계들로 형성된 구조체이다. 이러한 소쉬르의 구조에 대한 통찰은 구조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일반언어학강의>에 나타난 소쉬르의 언어 연구는 그 치밀성이 돋보인다. 범인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깊은 사색과 통찰로 언어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지성은 감탄스럽다. 다양한 예와 증거자료로 뒷받침되는 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리자면 불완전하며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놀라움이 될 것이며, 언어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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