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하행길, 영천 떠나 부산으로 오는 길에, 순간 차를 멈추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저 멀리 보이는 산허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옆으로 길다랗게 누워있는 산허리, 엎어져 있는 산등성이, 솟아있는 봉우리들이 구불구불하게 보인다. 

 

서로 달음박질하듯 멀어져 가는 산등성이들, 가장 멀리 달아난 산등성이는 희미하게, 가장 가까이 있는 녀석은 진한 뒷모습을 남기고 달아나고 있다. 멀리 달아난 녀석과 가장 가까이 있는 놈 사이엔 얼마나 깊은 대기가 자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깊이에 따라 어스프레한 희미함에서 시커먼 짙음에 이르기까지 마치 스펙트럼과 같은 층층구조를 보여준다. 산등성이간의 깊이가 깊을 수록 서로의 차이는 분명해지고, 깊이가 얕을 수록 서로의 차이는 희미해진다. 산등성이가 이루는 푸른색 계열의 스펙트럼은 멀어질수록 점차 희미해져 마침내 하늘 속으로 사라진다.

 

희미한 구름으로 덮인 하늘 아래 멀리 달아나는 산들은 한폭의 동양 산수화의 모습을 닮았다. 오로지 담묵색의 농담으로 공간의 깊이를 드러내는 산수화를 보는 느낌처럼 마음은 담백한 색깔의 욕망을 갖는다. 편한 마음으로 산수화를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으로, 달아나는 산등성이들의 스펙트럼을 아무런 욕망없이 대면하고 싶어 차를 세워둘 만한 곳을 찾아보지만, 마땅한 곳이 없다.

 

경부선 하행선, 건천과 경주사이를 달릴 때, 전방 먼 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 한 폭의 산수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바라보고 싶은 그런 풍경이다. 차마 고속도로에 차를 멈추지 못해 경주휴게소에 이르러서야, 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저 먼 곳 하늘 아래 멀어져 가는 산등성이를 바라본다. 하지만 오롯이 그 느낌을 재현해 줄 풍경이 아니라 아쉽기만하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생각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절경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기억에 남는 길이 하나 있다. 언젠가는 다시 그 길을 달리면서 그 풍경을 대면하고 싶은 길이 있는데, 첩첩산중 산허리를 돌아 돌아 달리는 중앙고속도로, 아마도 중앙고속도로였을 것이다. 그것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사이로 비구름을 헤치며 달리는 길이다. 초행길이라 구간은 모르겠지만, 아뭏든 그 날 비오는 고속도로 하행선를 달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 온 공간은 피어오르는 비구름으로 꿈결같이 몽롱한데, 희미한 산들이 마주 달려와 부딪힐 것만 같은 순간, 차는 산 사이의 길을 휘감아 돌아나가고, 다시 첩첩히 앞을 가로 막고 둘러싸는 산, 산, 산... 피어오르는지, 흐르는 지 알 수 없는 비안개는 희미한 산의 자태를 숨길 듯 말 듯 하며 연기처럼 흐르는데, 희뿌엿게 솟아오른 산 봉우리는 꿈 속 여인의 하얗게 피어오른 살결처럼 신비롭다. 산 사이로 질주하는 차는 점점 짙어가는 무릎사이를 몽롱하게 빠져들어간다. 

 

산수화가 따로 없다. 순간 순간이 여백으로 가득찬 산수화이다. 비와 구름은 동양 산수화만이 가지고 있는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하얀 비구름은 피어올라 산의 아랫도리를 어슴프레하게 베어낸다. 여백이다. 희뿌연 공간 위로 솟아있는 산봉우리, 그리고 그 너머 또 산... 억수같은 비는 희뿌연 비안개를 뿌려대고, 비안개는 사방으로 퍼져 흩어지면서 앞 산등성이의 존재를 선명하게 그려내며, 뒤쪽 산 가슴께에 다시 옅은 여백을 그려낸다. 빈 공간의 피어오르는 향연이다. 

   

산허리는 피어오르는 연기속에 수줍은 새색씨의 얼굴처럼 부끄러워하고, 우뚝 선 산봉우리는 무에서 피어나듯 솟아오른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언듯 언듯 드러난 산등성이는 마치 고운 천에 비치는 여인의 잘룩한 허리처럼 흐르고, 얼핏 보이는 봉우리는 여인의 벗은 어깨처럼 둥글게 올랐다가 흘러내린다. 눈 내리는 밤의 '먼 곳의 여인의 옷벗는 소리'를 비오는 산중도로 위에서도 본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는 것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여백의 정서를 넉넉하게 느끼는 그 순간에 대한 기약없는 기대를 마음에 고이 간직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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