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군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는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햇볕의 신선한 밝음과 살갗에 탄력을 주는 정도의 공기의 저온 그리고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 이 세가지만 합성해서 수면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지상에 있는 모든 약방의 진열장안에 있는 어떠한 약보다도 가장 상쾌한 약이 될 것이고..."
김승옥식 표현법이 당시 문인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작금의 문학에 비하여도 그 현대적인 감각이 결코 뒤 떨어지지 않는 글 솜씨다. 무진기행을 읽으면서 곳곳에 펼쳐지는 그의 섬세한 감성과 표현에 새삼 놀란다. 하지만 김승옥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대답할 말문이 막힌다.
이제 그의 글을 돌이켜 보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아 본다. 먼저 이 주인공 윤희중, 그의 이름은 단 한 번 나온다. 어쨌든 그는 무진 출신으로는 드물게 서울에서 출세를 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자수성가한 입지적인 사람은 아니다. 사랑하던 여인과 헤어지고 난 후 부자집 과부에게 장가들어 큰 제약회사 간사가 되었다. 아마 돈 많은 과부는 겉치레를 멋드러지게 만들어줄 그런 번드르한 인물이 필요했나 보다. 능력도 결단력도 없지만 서울 남자의 이미지가 필요했겠지. 그의 이력중에 빛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한 때 독서광이었다는 것 정도. 그에게서는 나약함이 배여있다. 625 전쟁 때는 징집되지 않으려고 골방에 숨어 있었다. 덕분에 공산군으로 징발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무진이 국군에 의해 수복된 후 선배들과 친구들이 학도병으로 전선을 향해 갈 때, 그리고 그들의 전사통지서가 고향에 도착할 때에도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어머니가 만류하는 통에 그랬겠지만, 그는 뛰쳐나가 친구들과 함께 조국을 위해 싸우려는 간절한 마음에도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그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는 서울에서 뭔가 실패할 때면 어김없이 무진으로 찾아들곤 했다. 무진에 와서는 독한 담배냄새 배이도록 골방에만 쳐 박혀 있었다. 뭔가 일을 해결하기 위한 몸짓이나 생각, 결단은 그와는 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여인이 떠날 때도 잡지 못했으리라. 이러함에도 주위의 지원속에 떳떳한 성공인으로서의 이미지를 갖추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인정해 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인숙, 무진중학교의 음악선생, 무진에서 성공한 두 사람중 한 사람인 세무서장인 조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여자, 하지만 조씨는 그냥 그녀를 노리개로만 여긴다. 같은 학교의 선생인 선량한 박선생이 좋아하던 여자, 그 여자는 박선생을 꽁생원같다고 한다. 주인공에게 자기를 서울로 데려가 달라던 여자, 그 부탁의 댓가로 몸을 바친 것일까? 그 여자는 바닷가에 있던 한 때 서울 남자가 젊은 시절 폐병에 들었을 때 하숙하였던 집에서 몸을 허락한다. 그는, 칼을 빼앗지 않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찌를 사람처럼, 조바심을 느끼던 여자에게서 조바심을 빼앗아 버렸다. 조바심을 빼앗긴 여자는 서울로 가지 않겠다고 하고, 서울 남자는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끝내 그 여자를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하는데, 다 거짓말이다. 당장 그 때는 거짓이 아니었겠지만, 어차피 이런 부류의 사람이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못하는 법. 그게 바로 그다.
급히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에 또 다시 움직이는 그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힘이 없다. 하인숙에게 남기는 편지, 지금 당장은 같이 올라갈 수 없지만, 언제가는 그녀를 서울로 부를 것이라는 편지, 그리고 사랑한다는 편지는 결국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찢어버렸다. 도대체 그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진 기행의 키워드는 안개,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뿌옇게 사라져 버린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되어 버리고 없다.
수치도, 책임도 무책임도 모든 것이 유배되어 버리고 없는 세상, 그 세상이 무진이다.
자살한 여자, 술집작부, 독해서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여자, 이 여자의 죽음을 지켜 주고 있었던 불면의 밤, 이 남자는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생각하는가 보다. 생면부지의 여자가 술집 여자가 자살하던 밤 자신이 잠 못들어 하던 것을 어찌 그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여자가 죽지못하도록 막지도 못한 남자이면서...길거리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던 미친 여자를 구해주지도 못했었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지도 못하고 숨어 있었지. 1년동안 폐병을 고치기 위해 바닷가의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쓸쓸한 느낌을 엽서에 써서 사방으로 보내는 것 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산소에 들러 이슬비 내리는 산소 앞에서 절을 한다. 긴 풀을 뽑는다. 그는 태어날 때 어머니에게 빚졌을 뿐 아니라 전쟁의 위험에서도 그의 어머니 덕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대체 뭔가? 어머니가 죽고 난 후 폐병이 든 것은 그가 어머니 없이 무엇이라도 제대로 해 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일까?
개구리 울음 소리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로 화하는 청각이 시각으로 변하는 이상한 현상. 개구리 울음이라고 답하며 하늘의 별들을 쳐다 본다. 그리고는 또렷이 깨닫는다. 나와 별 사이의 거리를,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그는 홀로이다.
이런 인간상, 김승옥 자신의 모습이었을까? 아니면 당시를 살아가던 지식인의 나약한 모습이 다 이랬을까?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세상을 버릴 수도 없고, 그냥 세상에 기대어 살아가는 기생충같은 모습의 지식인들의 모습을 슬픈 눈길로 바라보는 그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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