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지은이 이문구/ 문학과 지성사


어이가 없다. 관촌수필이라 하여 수필인줄만 알았다. 연작 소설집이었다.


관촌수필에는 총 여덟개의 회고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성인이 된 후에 있었던 몇가지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네글자로 된 한자로 제목이 붙어 있다. 이문구님은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어휘들을 많이 구사하고 있지만 한자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 제목에 각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첫번째 이야기인 일락서산日落西山은 할아버지에 얽힌 기억들이다. 할아버지는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 그리움은 지나간 시절,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이기도 하다. 세월이야 잡을 수 없고, 시간 속에 변하지 않는 것도 없을테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은 남아 있어야 하건만, 지난 시절의 가치들은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유효한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작가가 고향 관촌을 찾은 날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는 저녁 어름이다. 더 큰 시간의 영역에서 보면 지나간 시절의 전통적인 인간관계나 사회가 저물어가는 그런 때이기도 하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선 작가의 눈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를 향한 눈은 미래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찾고 있는 지도 모른다.


둘째 화무십일花無十日은 육이오동란중에 행랑채에 살게 된 윤영감네 이야기이다. 며느리의 가출과 윤영감 아들의 자살로 끝난 비극적 이야기이다. 윤영감네는 피난내려오다 부모를 다 잃게된 여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녀는 윤영감의 며느리가 된다. 국군이 북진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윤영감네는 작가의 집에 빌붙어 살게된다. 윤영감은 온갖 잡일과 들일을 다 돌봐 주면서 그 몫을 해내고, 며느리는 읍네로 가서 여관 부엌에서 할 일자리를 찾게된다. 어렵게 살아가던 중 찾아온 아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하면서 삶이 좀 나아졌나 싶더니, 며느리가 바람이 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다. 며느리는 야반도주를 하고 아들은 뒤산에서 목을 매단다.   


세째 행운유수行雲流水는 노래 잘하고 씩씩하고 어린 '나'를 잘 돌봐 주었던 옹점이 이야기이다. 작품 전체에서 옹점이는 자주 등장하지만 이 편에서는 옹점이가 주인공이다. 옹점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언니(누나)처럼 나를 위해 주었다. 옹점이에 대한 그리움은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버금간다. 나이가 들어 시집갈 때가 되자, 옹점이는 눈물을 흘리며 시집을 간다. 잘 사는가 싶었더니, 전쟁나간 남편의 소식이 끊어지자 군식구를 줄이려는 시집 식구들의 등쌀에 못이겨 옹점이 집을 뛰쳐나온다. 옹점이 결국 떠돌이 패와 어울려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는 소문을 듣게 되는데, 결국 나는 시장판에서 노래하는 옹점이를 보고 눈물을 훔치며 되돌아 집으로 달려간다.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던 옹점이의 떠돌이 삶에 나는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 글에는 옹점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과 아쉬움이 철철 넘친다.


네째 녹수청산綠水靑山은 대복이 이야기이다. 행랑살이를 하던 대복이네 가족. 대복이는 친구라기 보다는 언제나 든든한 형처럼 나를 대해 준다. 대복이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복이는 나쁜 길로 빠져든다. 대복이가 절도죄로 유치소에 있을 때 공산군이 들어오게 되고, 그 길로 풀려난 대복이는 공산당의 앞잡이가 된다. 그러다 상 것인 대복이가 감히 넘어다 볼 수 없는 순심이란 처녀를 겁탈하려다 대복이는 다시 철창 신세를 지게 되고, 국군이 북상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대복인 자유의 몸이 된다. 공산치하에 아이들에게 혁명가등 노래를 가르치며 부역하던 순심이는 수복이 된 후 행적이 오리무중이 되고, 어찌된 일인지 대복이는 순심이네 집의 하인으로 자청하고 나선다. 몸을 사리지 않고 순심이네 가족을 돌봐주는 대복이는 전쟁터로 떠난다. 깊은 지하실에 숨어 있던 순심이는 떠나는 대복이의 뒤 모습이라도 보려고 몰래 나왔다가 사람의 눈에 띄어 경찰서로 잡혀간다.  


다섯째, 공산토월公山吐月은 석공의 이야기이다. 우리 집 맞은 편에 사는 석공은 어릴 때부터 돌을 그렇게나 좋아했었다. 쓰임새가 있을 만한 돌을 모아 마당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가 사람들이 각종 일에 쓰임새가 있을 때는 기꺼이 그 돌들을 내어주곤 했다. 대복이와 석공은 서로 닮은 듯 다른 듯, 나를 위해주는 형과 같다는 점에서는 서로 닮았지만, 석공은 대복과는 달리 시종 성실하고 착실하기만 하다. 석공이 나이가 들어 섬처녀를 색시로 맞아들이던 날, 마을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나'의 아버지가 석공의 마당에서 술을 쭉 들이키고는 한바탕 소리를 뽑고 춤을 덩실덩실 춘다. 마을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도, 아니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을 처음 본 것이다. 석공이 아버지의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거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지도 않았건만, 왜 아버지가 아랫것인 신씨네 집의 혼사에 그런 정을 주는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석공과 그의 가족은 이에 우리 가족에 한층 더 깊은 사랑고 존경심을 갖게 된다. 전쟁을 지나면서 우리집 가세가 기울고 어려워질 때에 석공은 한결같이 온갖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는다. 공산치하에서 면사무소의 펜대를 쥐게 된 석공을 보고 석공의 아버지는 평생 원해왔던 일을 구하게 되었다고 좋아한다. 그것이 비록 아무 힘도 없는 말단의 일이었지만서도. 하지만 공산당이 물러간 후 석공은 부역자로 몰려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형기를 마치고 나온 후 성심을 다해 마을을 위해 일하고 성실하게 집안을 일구어 나간다. 그 와중에 몰락한 우리 집은 모든 가산을 팔고 도시로 이사하게 된다. 고향에 사는 모든 사람과의 연락은 끊어졌지만 석공의 가족과는 끈끈한 이어짐이 계속된다. 석공의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가세는 일어서게 되고 남 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되는데, 이게 왠 일? 석공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진다. 백방이 무효라고, 석공은 도시로 나와 큰 병원에 입원하지만...결국 백혈병에 걸려 죽을 운명임을 알게 된다. 석공이 도시로 나와 병원을 알아보고 치료받는데 여러 편의를 돌봐 주면서 나는 석공에 대한 감사와 따뜻함을 나타내지만, 석공이 죽을 지경이 되도록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석공이 임종을 앞 두고 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석공이 창문 너머로 나의 손을 잡을 때, 느닷없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도저히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여섯째, 관산추정關山芻丁 일제 징용갔다 돌아온 유천만. 몸이 좋지 않아 집안일을 하지 않는 그 집의 기생충같은 존재였지만, 마을의 대소사에 몸을 아끼지 않던 사람, 닭이나, 돼지를 잡을 때면 언제나 보수도 바라지 않고 발 벗고 달라들든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복산이...


일곱째, 여요주서與謠註序 어릴 적 친구였던 신용모, 어릴 때 어리석은 용모는 어른이 되어서도 변한 것이 없다. 죄를 뒤집어 쓰고 말을 잘못하는 바람에 더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여덟재, 월곡후야月谷後夜 귀향한 김희찬이라는 친구와 그의 동생 수찬이. 희찬이는 도시에서 짜집기 책을 만들며 펜대를 굴리다 귀향한 나의 친구이다. 시골에서 과수원을 가꾸며 생활을 이어나가는데, 타지에서 이주해 온 결핵에 걸린 한 남자가 자기 초등학교 딸아이의 친구를 범하게 된다. 들통이 나자 어떻게 어떻게 돈을 써서 소녀의 어머니와 합의를 보고 감옥에 가는 것을 용케 피하지만 이 마을의 젊은이들은 이를 묵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응징하고자 하는데....


이문구님의 관촌수필에서는 옛것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배여져 있다. 그리고 옛것이 사라지고 변화해 가는 시대의 흐름이 담겨져 있다. 작가의 심중에는 변화의 모습이 부정적으로 보여진다. 옛 것에 대한 애모가 깊을 수록 변화는 부정적으로 보이기 마련인가보다. 근대를 지나 현대로 변모해가는 모습이 부정적으로 비친 것은 일단은 자연과의 교감이 옅어지는 점이다. 관촌수필 곳곳에 어린 시절 자연과의 교감이 드러나 있다. 더구나 석공의 혼인식날 밤 휘영청 밝은 달빛을 훔쳐가던 기러기 그림자를 묘사하던 밤의 풍경은 읽는 독자로서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 되었다. 관촌부락과 가까운 갯벌의 추억도 그렇고, 냇가에서 고기를 잡던 추억도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 주던 이웃의 형들과 언니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끈끈한 정이 그리운 것이다. 현대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사라진 이러한 지나간 것들의 가치를 아까워하고 아쉬워함은 현대 문명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시선은 온전히 동네에서 존경받고 재산께나 있는 문벌좋은 양반네의 손자로서의 대우받고 대접받는 입장에 매몰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천한 것, 상 것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의 삶의 팍팍함과 어려움을 읽지 못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문구님이 관촌수필에서 느낀 것 또 한가지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다. 토속어, 사투리가 가득하여 우리말이지만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작품인데, 우리말의 어휘가 이렇게 풍부했나 싶을 정도로 놀랍니다. 이 책은 다시 한 번 사전을 옆에 두고 읽으면서, 찾은 어휘들을 노트해 가면서 읽고 싶은 작품이다. 또한 이문구님의 표현 또한 감탄스럽다. 곳곳에 암초처럼 드러난 아름다운 표현들은 차마 소설이나 수필이라기 보다는 시라고 해야 올음직할 정도이다. 받드시 다시 한 번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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