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 지음/ 정희성 옮김/


 

아담은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 

카인은 하느님께 농산물을 제물로 바쳤고, 아벨은 양을 제물로 바쳤다.

하느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아들이고, 카인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인은 분노한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말했다.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났고 낙심하였느냐?

네가 돌이켜 선을 행하면 호의를 얻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돌이켜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죄가 문에서 도사리고 있으니 죄의 욕망이 너를 지배할 것이다.

네가 그것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4:6,7)


"네가 그것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이 문구를 이루는 원래의 히브리어 단어 '팀벨'은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몇가지 표현으로 번역된다.

 

미국 표준역에서는 '너는 죄를 다스려라.'로 번역한다. 이 말는 '명령'의 느낌이 담겨져 있다. 

다시 말해 신은 인간에게 죄를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극복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다.

신과 인간사이의 관계는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설정이 된다.


흠정역 성경은 '너는 죄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을 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예정을 시사한다. 

인간이 죄를 극복할 것을 예정해 놓으셨고,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뉘앙스가 전해진다. 


하지만 스타인벡은 '네가 그것을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번역을 제안한다. 

이것은 "네가 그것을 다스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카인이 '죄를 다스릴 것인지 아닌지'는 카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스타인벡이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은 비록 유한하기는 하지만 무한한 신에 비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자유 의지이다. 

인간은 약하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은 위대하다.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으로 돌아가 보자.

아담은 두 아이를 낳는다. 큰 아들 아론과 작은 아들 칼렙, 이들은 스타인벡표 카인과 아벨이다.   

하지만 원래 성서의 이야기와는 달리 큰 아들 아론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엄마를 닮아 사악한 면이 있는 작은 아들 칼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두 아이의 엄마인 케이시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사악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담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간다.

못 나가도록 길을 막아서는 아담에게 총을 쏘고 중상을 입힌 후 도시로 도망쳐 창녀가 된다. 


케이시의 본질에 눈이 먼 아담은 페인이 되다시피한다.  

케이시가 도시에서 창녀로 살아간다는 것을 아무도 그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노인 사무엘씨는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는 아담을 찾아가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한다.

사무엘씨가 창세기 4:7의 자유 의지의 위대성을 깨닫지 못했더라면 전혀 할 수 없었던 일을 한다.


"내가 자네에게 줄 약이 하나 있네. 그것은 자네를 죽일 수도 있고, 자네를 살릴 수도 있네. 자네는 이 약을 먹을텐가?"

그리고는 사무엘은 아담에게 케이시의 실체를 폭로한다. 

적어도 아담은 선택할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아담의 몫이었다.


그것은 아담에게는 약이 되었다.


이후 칼은 자신의 어머니가 창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칼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홧김에 형 아론을 데려다가 창녀인 어머니를 만나도록 주선한다.

불 같은 충격을 받은 아론은 자원 입대하게 되고 유럽의 전쟁터에서 죽고 만다.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아버지 아담은 쓰러지고,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된다.

예상치 못한 비극적 상황에서 칼은 괴로워한다.


임종을 지켜보는 칼에게 아담은 "팀벨"이라 한 마디 말을 남기도 세상을 떠나고 만다. 

"너는 너의 죄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인벡이 <에덴의 동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극복해야 할 고귀한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케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악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케이시를 닮은 칼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에덴의 동쪽은 아벨을 죽인 카인이 쫓겨나 살아야 했던 곳이었다.

하느님의 "너는 죄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란 말을 들은 카인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드러내야 했던 영역이었다.

<에덴의 동쪽>은 소설 속에서는 칼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드러내냐 했던 남겨진 시간이었다.

칼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백지이다. 칼은 이 백지 위에 자신의 삶을 그려나가야 했다.

정해진 것은 없다. 단 그의 자유 의지만이 그의 삶의 연필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아담이 칼에게 남겼던 말, 팀벨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라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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