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레이 지음/ 김승진 옮김/ 이후 출판사


이건 뭐지?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지인이 추천해 주면서 '진보'의 신화를 깨뜨리는 책이라고 이야기한 게 생각났지만 도대체 그레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다 읽고서도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그레이의 의도를 거의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읽기로 했다. 한결 내용이 쉽게 들어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레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손에 잡을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진보'란 없다는 것만 잡힐 뿐. 물론 3부로 나누어져 있는 큰 줄거리를 희미하게 잡을 수 있었다고 느꼈지만, 그걸 느끼는 순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손에 잡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1장 [오래된 혼돈]에서는 진보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는 데 주력하고 있는 것 같다.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 인류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 나은 질서와 삶을 만들고 있다. 이른바 '진보'. 이것은 신화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레이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또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타난 미래사회는 진보란 어떤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말만 진보일 뿐 전혀 진보하지 않은 사회이다. 오히려 퇴보한 사회일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축적되지만 정치와 윤리는 축적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레이의 지론이다. 과거의 악덕 예를 들면 노예제 같은 것이 사라졌다고 믿을 지 모르지만, 다시 말해 인류 세상은 진보해 왔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러한 악덕은 다른 형태로 우리 현대 사회에 침투해 있다. "지식에 있어서는 진보가 있지만 윤리에서는 진보가 없다." 인간은 역사로 부터 배우는 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지식은 축적이 되지만 윤리는 한 사람이 죽으면 끝이난다. 새로 태어난 사람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2장 [마지막 생각의 너머로] 프로이드와 융의 심리학을 소개한다. 진보의 신화를 깨뜨리고 그 너머로 향하는 그레이의 생각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어딘지 동양 노자철학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생각들이 펼쳐진다. 서양의 주류 사상계에서 벗어난 생각들이 두서 없이 등장하는데, 한편으로는 서양의 비주류 사상가들이 합리주의나 계몽주의에 비추어 볼 때 신비적인 색채를 지닌 사상들을 가지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러한 사상들 가운데 언어란 불완전한 것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언어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언어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나 종교, 혹은 자연세계에 빠져든다."그레이는 열렬한 독서광이다. 그는 조명받지 못한 작가들과 사상가들의 말에 기대어 자신의 생각을 넌짓이 제시하는 것 같다. 


3장 [또 다른 햇빛] 주류의 시각과는 관점이 존재함을 깨닫게 해 준다. 송골매를 쫓는 한 사람의 기록, 그의 기록은 송골매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각이 아닌, 송골매의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 기록이다. 왜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인간의 관점과 다른 동물들의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유독 인간의 관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이다. "관점을 이동하니 또 다른 장소가 드러났다." "또 다른 햇빛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든다. 달라지는 빛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계가 있다." "인간이 만든 것들은 보통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인간이 만든 장소들도 숲속에서 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신비롭고 찰라적이다.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만드는 주문을 깨면, 탐험가들이 지도에 나오지 않는 곳을 다니면서 발견하는 것처럼 도시안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제레미 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있다. 동물들의 침묵과 엔트로피는 유사한 면이 있다. 진보의 신화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엔트로피를 읽다 보니 동물들의 침묵이 그리워진다. 난해한 문체가 아름다웠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동물들의 침묵에 비하면 엔트로피는 너무 심한 동의반복적이라 느껴진다. 그만큼 동물들의 침묵은 새로운 읽을 거리였다. 그 속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 생경한 생각들이 넘쳐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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