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을 나섰다. 드문 일이다. 밖에는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순간 봄을 생각한다. 이 비는 필시 봄비?

그 날 저녁 뉴스를 통해 입춘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덕도 앞 바다 매립지, 아직 입주가 덜 된 아파드 단지 하나만 덩그러니 매립지 사이에 놓여 있다.

주위는 황량한 불모지처럼 보이는 빈터에 누렇게 바랜 키 큰 잡풀만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무료하게 기다리며 보도를 천천히 걸으면서 봄 볕을 만끽하던 중 가로수에,

멀리서 보면 마치 새빨간 꽃처럼 보이는, 콩만한 빨간 열매가 포도처럼 나뭇잎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먼나무>

 

<파라칸사스>

 

먼나무일까? 파라칸사스일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문득 왜 이제사 이것을 보게 되었을까? 여기서 한 참을 왔다 갔다 했는데?

이 길을 지나는 사람 중 몇이나 이 빨간 열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을까?

도로 건너편 상가의 사람들은 이 예쁜 빨간 열매의 존재를 알고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사물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존재도 때로는 보이지 않을 때도 있는 법인가 보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다.

이 순간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된 듯 하다. 

조르바는 항상 만물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본다. 매일 보는 사물들이 그에게는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어제의 것이 오늘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르바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범인의 눈으로 보면 조르바는 바보처럼 보인다. 오늘 이 순간 보는 것이 어제 본 것과 같은 것인데, 그 새 어제 본 것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바보...

그러나 정작 바보는 조르바가 아니라 매일을  똑 같은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바보일뿐이다.

난 오늘 새삼 조르바의 눈을 가지고 봄을 느끼고 바라보고 있다.

난 봄의 도래를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불모의 매립지에는 봄이 어떤 모습으로 오고 있을까? 급관심이 생겼다. 

다 시들어 죽어버리고 그 뼈대만 남아 군데 군데 흔들거리는 잡풀들이 무성한 땅으로 발을 내 딛뎠다. 

그 땅에서 나는 생명을 이어나가려는 고단한 몸짓을 발견했다. 

도둑놈 가시가 생명을 퍼뜨려 줄 매개체를 기다리며 가시를 세우고 있었다.

지난 가을 이후로 계속 발톱을 세우고 기다렸던 것일테지.

그러다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라 비틀어져 바로 아래 땅 바닥으로 떨어져 싹을 틔울 테지.

 

<도둑놈 가시>

 

허리를 낮추고 무릎을 굽혀 가만히 앉았다. 낮은 곳에 마른 강아지 풀이 보였다. 

땅에서 20cm 자란 조그만 새끼 강아지 풀이 바람에 파르르 떨린다.

가는 줄기는 약한 바람에 조차 견디지 못하여 휘어지려하나, 물기를 잃고 말라 붙은지라 부드럽게 허리를 휘지 못하고 다만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늘게 떠는 듯 하다.

 

<강아지 풀>

 

강아지 풀 아래 습기를 머금고 있는 땅 위에 진한 초록색 이끼들이 땅을 뒤덮고 있다.

살아 있는 생생한 초록빛이 햇빛에 반짝인다. 생명은 질기게도 그 목숨을 이어가고 있구나. 

그 생명의 경탄스러운 탄생의 때가 무르 익고 있다. 

 

<이끼>

 

도서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찾았다.

책들 사이로 언듯 고개 숙인 아가씨의 붉은 입술이 보인다.

봄이라서 그럴까?  

서가 앞에 서서 고개 숙여 책을 읽는 모습이 아름답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이...

 

<러브레터>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뽑아 들고 책상에 앉았다.

춤추는 듯 현란한 문장 속에 작가의 생각이 난해하게 펼쳐져 있다.

김훈의 매력적인 글에 경탄을 발하면서 한편으로는 행간을 읽어 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편히 앉아는 있지만 머리속으로는 작가의 심중을 읽어내려고 고전분투하고 있다.

붉은 입술의 긴 생머리 아가씨가 왼쪽 옆 자리에 앉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책상에 기대어 책을 읽어 나가다 나른함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봄 기운때문일까? 

아! 편안하다. 나른한 행복감이 몸에 흐른다.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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