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오닐/ 민승남 옮김/ 민음사

 

 

유진의 부인 칼로타는 "들어갈 때보다 십 년은 늙은 듯한 수척한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빨갛게 부은 채로"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던 유진을 회상한다. 유진 오닐은 자신의 사후 이십오 년 동안 이 작품을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이야기하면서 오닐은 얼마나 울었으면 눈이 부은 채로 나왔을까? 왜 아픈 이야기를 썼어야만 했을까? 

 

목련꽃이 꽃봉우리를 막 피우기 시작할 때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의 절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목련꽃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인생의 내리막길은 막을 수가 없다. 희곡 <밤으로의 여로>에 나오는 제임스 티론의 가족들 처럼... 

 

 

제임스 티론은 아름다운 아내 메리, 첫째 아들 제이미, 둘째 아들 에드먼드와 함께 여름별장에 와 있다.  이 여름 별장의 거실에서 1912년 8월의 어느 하루에 있었던 가족간의 애증이 담긴 대화가 오고간다. 아름답고 건강해 보이지만 묘하게 병색이 있어 보이는 부인에게 티론씨는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주방에서는 두 아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희곡이 시작된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티론씨네 가족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이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강해진다. 별장 밖에 자욱한 안개가 거실에까지 스며들어 뿌엿게 가리고 있는 듯한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점점 안달이 난다.

 

벗꽃이 활짝 피기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아니 그와는 다른 초조함으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여로>의 극중 인물 에드먼드는 유진 오닐 그 자신이다. 티론씨의 가족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불행한 역사인 것이다. 티론씨 가족은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어려운 치부를 가지고 있다. 제이미는 인생의 실패자요,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창녀에게로 달려가는 알콜중독자, 티론씨는 자수성가한 부유한 사람이었음에도 지독한 수전노이다. 가족의 건강이나 안위보다는 노후를 보장해 줄 돈이나 토지에만 열을 올리는 속물이다. 그리고 메리도 차마 입밖으로 말하기가 부끄러운 수치스러운 입장에 있다. 자신의 가족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을 감당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런 가족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왜 써야만 했을까? 왜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흘려가며 그것을 쓰야만 했을까?

 

인생의 슬픔에 아랑곳 하지 않고 꽃은 피었다 지는 것을...  

 

<밤으로의 여로>는 부끄러운, 그리고 야속했던 가족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시각을 보여준다. 오닐의 가족은 최소한 혈육간의 애정도 버린 악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운명이 짊어지운 그 비극 속에서도 끈끈한 가족간의 사랑을 눈물겹게 나타내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오닐은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의 불행을 초래했던 아버지, 어머니, 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그들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미노처럼 연속되는 많은 불행의 씨앗을 뿌렸던 아버지의 구두쇠짓을 마냥 그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아일랜드에서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생존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온 극빈민출신인 그는 구두쇠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던 것이었다.  오닐의 가족 문제는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대에 태어난 운명의 장난과 같은 것이었다.

 

아마 이 희곡을 쓰면서 유진 오닐은 불행의 원인, 수치를 초래한 책임을 더 이상 가족 들에게 짊어지우기를 거부한 것 같다. 그들 모두는 비난보다는 동정을 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오닐이 사랑했고, 오닐을 사랑했던 그들은 모두 희생자들이었던 것이다. 오닐에게는 그들을 힐난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토록 불행한 가운데서도 어쩔 수 없이 묻어나는 혈육간의 애정을 확인하고 눈이 충혈되고 붓도록 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닐을 수렁에거 꺼집어 내 줄 밧줄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를 위한 밧줄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고단한 인생길에서 우리를 끌어 올려 줄 수 있는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 유진 오닐이 이야기하고자 한 것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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