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하 지음


열대우림을 비숲이라 한다. 김산하는 한국 최초의 영장류 박사이다. 그는 긴팔원숭이를 연구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열대우림으로 찾아든다.

말로만 듣던 밀림, 정글은 그야말로 사람이 손길이 미치지 않는 처녀림이다. 이 숲 바로 바깥에 너댓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은 자연과 문명의 완충지대이다.

자연과 문명이 함께 할 수는 없는 것, 인간은 자연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저 파괴할 뿐이다. 긴팔원숭이를 비롯한 열대우림의 원주민들은 절대 자연에 동화되어 그 스스로가 자연이다. 하지만 문명화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 될 수가 없다. 하늘을 가릴 지붕이 필요하고, 벗은 몸을 가릴 옷이 필요하고, 자연산이 아닌 재배하고 양식한 음식을 먹는 인간은 이미 자연을 떠난 존재이다. 자연에서 나왔으나 더 이상 절대자연 속에서는 불편해지는 인간. 그러나 인간은 원초의 자연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원초의 자연은 문명화된 인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인간은 원시자연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나아갈 길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원시자연에서 생존하려면 그것을 문명화해야 한다. 절대자연에 손상을 끼쳐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물러서면 어느듯 세월은 인간의 흔적을 지우고 절대자연으로 돌아간다. 인간이 자연을 대규모적으로 파괴하지 않는한 자연은 스스로 복구한다.


산 짐승도 자기들이 다니는 길이 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자연 길이 생긴다. 인간도 자연에 길을 낸다. 그도 긴팔원숭이를 연구하기 위해 서식지를 가로 세로로 길을 낸다. 길이 없으면 다닐 수가 없고, 다닐 수 없으면 긴팔 원숭이를 쫓아갈 수 없고, 긴팔 원숭이를 쫓지 않으면 연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최소한의 길을 내고 그 길을 따라 원숭이를 쫓아 다닌다. 처음에는 원숭이들이 인간을 보고 무작정 도망을 간다. 연구팀은 죽어라고 그들을 쫓아간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여러달 이러한 쫓고 쫓기는 관계속에서 익숙함이 자란다. 어느날 긴팔 원숭이들은 돌연 쫓기는 것을 거부한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는다. 인간을 그들 주위 환경의 일부로 인식하게된다. 이 후로는 마음대로 긴팔원숭이를 관찰할 수 있다. 바로 나무 밑에서 이야기를 해도 긴팔원숭이들은 도망가지 않는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여우와 친해지는 방법이 바로 이러한 익숙함이었다. 익숙함은 그리움을 낳는다. 하지만 익숙함 속에는 독이 있다. 새로움, 신선함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삶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익숙함이라면 삶을 살만한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새로움이다. 익숙함속에 새로움을 찾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박이다.


김산하 박사는 비숲을 그리워할게다. 긴팔원숭이도 그리울게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연구팀이었던, 아리스, 싸리도 보고 싶을게다. 인간은 비숲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끈끈한 정으로 맺어진 그들과의 인연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만약 김박사가 자연과 소통할 수 있었다면, 말하자면 그냥 자연을 관찰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니 관찰이 아니라 참여, 동화되어 살면서 진정한 소통이 가능했다면 어떤 기록이 나올 수 있었을까? 밀림을 벗어난 최소한의 문명인 밀림 옆 마을의 지붕이 있는 집이 아니라 밀림속에 얽기설기 거처를 마련하여, 긴팔원숭이들과 함께 절대자연에 동화되어 살았더라면...그게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그정도까지 할 마음이 있기나 했을까?


제인구달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프리카에서 수십년을 침팬지를 연구하면서 생활한 학자인 제인구달은 침팬지를 자연의 대표로 생각하고, 자신을 인간의 대표로 여기며 자연과의 화해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역시 현재 인간은 자연과는 떨어진 문명의 존재이다. 문명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인간은 문명속에 살지만 자연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자연은 인간 숨결의 원초적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연없는 삶은 상상할 수 가 없다. 단지 감정적 미학적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생존에 자연이 필수불가결함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거꾸로 자연은 문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문명은 자연에 빚진바가 크다. 절대 부채를 지고 있다. 하지만 탐욕적인 인간은 자신들이 자연에 대한 권리를 가진 양 마음대로 파헤치고 파괴하려든다. 자연은 어느 선까지는 허허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자연은 신음 소리를 낸다. 자연이 불편해 하면 인간도 불편하다. 정도가 심해지면 자연은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기제를 작동시킨다. 가이아의 보복이다. 파괴로 급변한 자연환경은 인간에게 전혀 보도 듣도 못한 재앙들을 가져다 준다. 현재 인간들이 경험하는 여러가지 자연재해들은 사실 인간들이 자초한 면이 크다.


인간 문명은 인간을 변모시켰다. 자연인에서 문명인으로 그리고 문명인에서 야만인으로. 인간이 만든 문명의 이기들은 인간의 삶을 편하게 만들었다. 또한 인간들이 생존을 위한 고된 노동에서 구출해 주었다. 결과 인간은 시간을 부여받았고, 삶을 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해졌다. 잉여의 시간들은 퇴폐속으로 빠져들었다. 인간속에 내재된 불건전한 온갖 종류의 탐욕을 부추기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문명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잉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종류의 인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전자기기에 빠져 인간성을 상실하고 퇴폐와 쾌락만을 추구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을 양산해 내었다.


인류의 생존이 계속되려면 인간의 자연성이 회복되어야한다. 문명이 그 나락의 끝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힘은 자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박사는 집 부근에 조그만 녹지들에 눈을 돌린다. 아주 작은 모자이크 조각일지는 몰라도 이 작은 녹지를 가꾸는 일을 통해 인간의 마음 속에 최소한의 자연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자연이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해야한다. 아이들의 교육에서 자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자연을 괴롭히고 부수고 조각내고 분해하여 자연의 본질을 알려고 하는 과학을 자연이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연 교육말고 참다운 자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우리 자신의 삶이 자연에서 비롯된다는 제반 사실들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생존이냐, 아니면 멸망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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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Walden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은행나무>

 

 

아득한 그리움을 자극하던 책 월든, 서점에서 보자마자 사서, 집으로 돌아온 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을 펴본다. 자연과 벗삼아 월든 호수에 통나무집을 짓고 2년동안 살았던 소로우가 남긴 불후의 책이라는 타이틀은 단번에 나의 관심을 사로 잡았었다.

 

미국 동북부의 메사추세츠주의 아름다운 마을 콩코드에서 1817년 태어난 소로우는 거의 평생을 고향마을에서 살아가면서 주변의 숲과 강, 호수와 언덕을 다니며 자연을 관찰하기를 즐겼다. 하바드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해가 지나 1845년 그의 나이 28세때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숲 속에서의 생활을 실현에 옮긴다. 소로우는 그 해 3월말 콩코드 마을 가까운 숲 속에 있는 월든 호수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1847년 9월까지 숲속 생활을 한다. 

 

<월든>은 그 때의 생활을 기록으로 옮긴 작품이다. 초록색 책 표지에 희미하게 보이는 호수가 숲으로 둘러싸인 월든 호수이다. 월든호수는 길이가 약 800미터, 폭이 200~300미터, 둘레가 3킬로미터쯤 되는 작은 호수이다. 소로우의 표현을 빌리면 

 

"이 호수는 길이가 반 마일에다 둘레의 길이가 1 3/4마일에 이르는 맑고 깊은 초록빛의 우물이며 61에이커 반쯤되는 넓이를 가지고 있다." 265p

 

 

인근 마을과는 꽤 떨어져 인적이 거의 없는 숲속에 있는 이 작은 월든 호수는 소로우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아름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고, 오로지 소로우에게만 그 비경을 펼쳐놓았다. 소로우는 사랑하는 월든 숲속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무엇을 바랬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때문에 <월든>이라는 책을 썼던 것일까? 

 

시 한 줄을 장식하는 것이

나의 꿈은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소로우는 무엇보다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게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은 그에게는 신과 천국에 가까이 가는 행복의 길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세속적 성공을 꿈꾸며 인생을 살아가는 삶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삶의 양식을 보여주고 싶었을거다. 자연과 함께 하는 단순한 삶, 단순성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그는 노래한 것이다.

 

<월든>은 산문이기에 앞서 시적인 작품이라 느껴진다. 나는 '겨울의 호수'에 뒤이은 마지막 17장 '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걷잡을 수 없이 '봄'의 풍경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수와 그 주위 숲속에 봄의 여신이 그 투명한 옷자락을 스치면서 봄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모습을 상상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 그 정경을 그려냈다. 그의 기록의 대다수가 바로 체험과 관찰과 사색의 기록이다.  

 

"숲에 들어와 사는 생활의 한 가지 큰 매력은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볼 수 잇는 여유와 기회를 갖게 된 점이었다." 447p

 

겨울 호수가 잠에서 깨어나는 "쩌-엉"하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 소리는 '호수의 천둥소리'라고 불린다.

 

"내가 도끼머리로 얼음을 치자 마치 정이라도 친 것처럼 혹은 팽팽한 북을 친 것처럼 사방 몇 십 미터에 소리가 울려퍼져서 나를 놀라게 했다. 해가 뜬 지 한 시간 후 언덕 너머로 비스듬히 비치는 태양 광선의 영향을 받으면서 호수는 울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호수는 마치 잠을 깬 사람처럼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면서 점점 더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며 이런 상태가 서너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446p

 

흥에 겨운 봄기운을 소로우는 이렇게 노래한다.

 

"마침내 햇살은 직각을 이루고 따뜻한 바람은 안개와 비를 몰고와서 눈 덮인 둑을 녹인다. 안개를 흩어버리는 태양은, 향을 피우듯이 김이 모락모락 오른 적갈색과 흰색이 교차된 풍경위에서 미소짓고 있다. 졸졸 흐르는 수많은 실개천과 개울의 음악에 흥이 겨운 나그네는 이 섬에서 저 섬으로 뛰어 건너며 이 풍경속의 길을 간다. 개울들의 혈관에는 겨울의 피가 가득차서 떠내려가고 있다." 450p

 

난 상상 속에서 소로우와 함께 숲속 생활을 한다. 그러다 자연에 대해 너무도 무지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전에 자연은 과학의 이름으로 내게 존재했었다. 이전의 자연은 나에게 진정한 자연이 아니었다. 숲 속에 있는 생물들, 나무들과 꼭과 풀들은 딴 나라, 딴 세계였었다. 

 

떡갈나무, 자작나무, 느릎나무, 밤나무, 가문비나무, 삼나무, 솔송나무, 옻나무, 사시나무, 오리나무, 월귤나무, 백송나무, 참피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감탕나무. 더러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내가 아는 건 소나무뿐...  

 

패랭이꽃, 가래풀, 심장초, 부들, 물레나물, 돼지풀, 괭이밥, 개밀, 창포, 부들, 박주가리, 허클베리, 넌출월귤, 로마풀, 노박덩굴... 숲속에 피어있는 이름없는 꽃들도 실상은 다 이름이 있다. 다만 내가 모를 뿐. 

 

되강오리, 도요새, 물수리, 개똥지빠귀, 딱새, 티티새, 들꿩, 퍼치, 피라미, 황어, 기름종개, 메기, 송어, 장어, 강꼬치고기, 소금쟁이, 물매암이.우드척, 수달, 사향쥐... 숲 속과 호수에 사는 아름다운 동물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의 이미지를 찾아 보는 것도 하나의 큰 재미였다. 밖을 나섰을 때 나의 눈은 아파트 정원에 심겨진 나무들과 꽃들의 팻말을 향하고 있었다. 

 

소로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블랙홀과 같아서, 자연과 함께 할 여유의 시간의 수분을 빨아들여 삶을 메마르게 한다.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얻으면, 그에 만족하고 나머지의 시간은 자연과 벗하여 살아가며, 영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보내라. 이것이 가치있는 행복한 삶이다. 이것이 소로우의 단순성을 향한 철학이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그리고 법정과 같은 인물들은 소로우와 같은 철학을 지니고 있다. 간디는 "나는 큰 즐거움을 가지고 <월든>을 읽었으며, 그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법정은 열반에 들기까지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의 시인 예이츠는 "한 때 나는 <월든>을 읽고 아니스프리 섬에서 소로우와 같은 생활을 해보려는 야심을 가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단순성의 미학은 제1장 숲 생활의 경제학에서 어떻게 보면 지나치리만큼 편협하게 전개되고 있다. 토를 달고 싶은 마음도 들게 된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은 우리의 마음의 우물속에 들어앉아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의 샘물을 끊임없이 솟구쳐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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