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페수스/에페스/에베소]

에페수스의 유적을 찍은 사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가이드의 설명을 듣지 않고 사진 찍느라 허둥대는 통에 정작 무슨 유적인지는 모르겠습니다.ㅋㅋ

시간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흔적들이라 생각하는데, 무심한 고양이들은 그냥 늘어지게 자고 있네요. 

 

정말 여행의 고수라면 필름에만 사진을 박아넣는 일에 분주할 것이 아니라, 머리속에 영상과 그 분위기, 느낌과 향기등을 담았을텐데...여행 초보자는 표가 나게 마련인지라 여기 저기 분주히 사진을 찍어댔습니다. 그 통에 다시 볼 수 있어 좋기는 한데... 

 

 

 

 

 

 

 

 

 

 

 

 

 

 

 

 

 

 

 

 

 

터키의 수도는 아니지만 터키 제1의 도시 이스탄불을 떠나 샤프란볼루 마을로 향합니다. 여기서 간단히 우리의 일정을 소개하겠습니다.

 

■  인천 →이스탄불  → 샤프란볼루  → 앙카라  → 소금호수  →  카파도기아  → 콘야 

→ 안탈리아  →  파묵카레  →  에페스  →  트로이  → 차라카레해협 → 이스탄불→ 인천

 

 

 

샤프란볼루마을은 샤프란꽃의 군락지로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습니다.

 

 

 

옛날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교역이 활발했던 시절, 서쪽으로 여행하는 교역상들이 마지막으로 경유하던 곳이 샤프란볼루입니다. 

당시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인 석조건물은 견고하기가 성읍과 같습니다. 

도적떼로부터 귀중한 보물을 보호하려면 이정도의 수비력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즈음은 아래에 보는 것처럼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말이죠.

 

 

오늘날 샤프란볼루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오스만투르크시대의 목조건물 1000여채가 잘 보존되어 있기때문입니다.

이 건물들은 건축시기가 14세기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마을의 작은 골목길에는 갖가지 기념품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오밀조밀 예쁘게 늘어서 있습니다.

많은 사진 작가들이 좋은 사진을 찍으러 샤프란볼루마을에 온다고도 합니다.

 

 

골목위를 덮고 있는 초록색 덩굴잎들이 햇살에 반짝이고, 그 아래 골목에 서 있으면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이 됩니다.

 

샤프란볼루 가게에서 파는 과일조차 싱그럽고 먹음직스럽습니다.

 

카메라에 빛이 파고 들지 않고, 눈에 실제로 보이는 것처럼 보다 선명하게 화면이 나온다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샤프란볼루에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아쉽게도 허용된 자유시간이 30~40분밖에 없어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들러 자유롭게 마을을 둘러보고 초록빛 그늘진 길가에 나앉은 테이블에 앉아 커피라도 한 잔 하면서,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사진에 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샤프란볼루 안녕~^^

여행이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익숙함과의 결별은 필연적으로 미지의 세계와의 만남을 의미하겠죠. 미지의 세계는 불확실의 영역에 속하기때문에 여행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한편 모험적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와의 만남이 오히려 호기심과 짜릿한 흥분을 주기도 합니다. 어쨌건 주사위는 던져졌으며 이미 비행기는 날개를 펼쳤습니다. 

 

밤 11시 부산을 떠나 터키의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터키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반입니다. 터키는 우리와 6시간 시차가 나기때문에 우리 시간으로는 밤 10시반에 도착한 셈입니다. 부산에서 이스탄불까지 30분 모자라는 24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꽤 먼 길입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 튀르크 공항까지 8000km가 넘는 거리를 장장 12시간을 쉬지 않고 날았습니다.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의 종착지입니다. 옛날에는 도보로 몇달을 걸리던 이 길이라 생각하면, 단 12시간만에 날아온 것은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터키 제1의 도시 이스탄불의 관문은 아타 튀르크 공항입니다. 아타는 '아버지'란 뜻이고, '튀르크'는 터키를 말하기때문에 아타 튀르크는 '국부'란 뜻입니다. 터키의 아타 튀르크는 터키 민주공화국의 설립자인 케말 무스타파를 가리킵니다. 터키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타 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입니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연합국에 점령당한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되찾아 터키 민주 공화국을 설립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아랍나라들이 이슬람 국가인데 반해 터키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국민의 98%가 무슬림이긴 하지만 이슬람교를 터키의 국교라 부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아랍의 이슬람국가와는 달리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무슬림들도 이슬람교의를 따를 것을 강제받지 않습니다. 여성들도 히잡이나 차도르를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합니다. 히잡은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와 같은 것이고, 차도르는 눈을 제외한 다른 부분을 모두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체제는 모두가 아타 튀르크 무스타파 케말덕분인 것입니다.   

 

아타 튀르크 공항에 도착한 후 첫번째 방문지는 '그랜드 바자르'입니다. '그랜드 바자르'를 향하는 길의 오른쪽으로 '마르마라해'를 끼고 달리다 보니, 해안가에 거의 6km나 뻗어 있는 하드리아누스 성벽도 보입니다. 또한 여기저기 둥근 지붕을 한 모스크들이 눈에 띕니다. 

 

'그랜드 바자르'는 154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561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만도 450년정도가 되네요. 관광객을 위한 수많은 상점이 밀집되어 있는 '그랜드 바자르'에서 우리 일행은 일차 쇼핑을 합니다. 길거리에서 많은 아이들이 물이나 기념품을 팔기위해 분주합니다.

 

터키에서의 첫날밤 새벽 3~4시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더워서일까요, 아니면 가이드말처럼 시차때문일까요?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 매일 1시간씩 시차가 적응된다고 하니, 집에 갈 때쯤이면 완전히 시차에 적응이 되겠군요. 이제 첫째날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합니다.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 이난아 / 민음사


오르한 파묵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터키의 소설가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은 16세기 오스만제국에 살던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르한 파묵은 이 화가들이 소속되어 있는 술탄의 화원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통해 동양과 서양의 문화 충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비단 그 당시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터키는 동양에 위치해 있고, 이슬람권에 속해 있기때문에 서양과는 이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면서도 서양에 인접해 있어 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럽연합인 EU에 가입하기를 오랫동안 염원해 왔습니다. 


그러면 오르한 파묵은 이러한 터키의 서양 지향적인 모습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소설의 배경은 16세기 오스만 제국 술탄의 화원입니다. 술탄의 화원에서는 책의 겉표지를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책에 삽입될 그림을 그릴 때, 나무나 꽃, 동물등을 아주 섬세하게 그리는 장인들인 세밀화가들이 술탄을 위해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밀화가라는 이름값에 맞게, 쌀알등 아주 작은 물체위에도 깨알같은 그림을 그릴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오래전 헤라트파의 거장 비흐자드의 아름다운 그림을 원본으로 하여 온 평생 그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 완벽한 모사품을 만들어내는 장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눈이 멀고 난 후에도 손으로 익힌 기억을 그것을 완벽하게 복사해 내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여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이 보는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신이 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이탈이아 베네치아에서 들어온 서양 화풍은 그와 달랐습니다. 서양화가들은 자신의 개성을 그림속에 나타내고자 하였으며, 인간의 눈에 비치는 대로 사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원근법도 사용하고, 인물을 그릴 때는 그 인물의 개성을 온전히 살려 그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서양의 화풍을 술탄의 화풍에 소개하려는 에니시테의 시도와 세밀화의 화풍을 지키려는 화원장 오스만사이에는 알력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에스테르는 술탄을 설득하여 서양 화풍을 사용한 그림이 포함된 책을 만들고자 합니다. 술탄의 화원에서 일하는 장인 황새,나비, 올리브와 금박세공사 엘레강스가 오스만 몰래 이 작업에 참여합니다. 이 와중에 엘레강스가 살해되고, 20여년만에 고향을 찾아온 카라는 삼촌 에니시테와 함께 살인자를 찾습니다. 이 도중 에니시테마저 살해를 당하자, 술탄은 오스만과 카라가 이 사건을 해결하도록 명을 내립니다. 이러한 추리소설적인 전개에 더하여 에니시테의 딸이자, 카라의 예전 연인이었던 세큐레가 등장하여 소설의 흥미를 더 돋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의 화풍이 충돌하면서 살인사건까지 터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두 화풍의 충돌은 단지 회화부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교의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슬람교의 전통은 우상숭배를 혐오하였고, 초상화를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기에, 화면의 중앙에 인물을 크게 배치하고, 그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넣는 서양의 초상화는 이단적이며 신성모독적인 것이라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에 종교적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47장 '나는 악마다'라는 장에서는 서양풍의 그림이 악마의 영향, 또는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회화 전통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만한 점을 제시합니다. 세밀화가들은 전통적으로 세밀화를 완성한 대가들은 눈이 멀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떤 나이든 장인들은 다른 사람의 이목을 두려워합니다. 마치 눈이 멀지 않으면 그만큼 그림에 덜 열중했다는 표시가 된다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눈이 멀지 않으면 세인들과 세밀화가들로 부터 대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때문에 명예를 얻기 위해 눈 먼채 행동하거나, 일부러 눈을 멀게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술탄의 화원장 오스만도 결국 바늘로 스스로의 눈을 찔러 눈이 멀게 됩니다. 


그림이란 단순히 사물을 그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인간 중심의 시각인지, 아니면 신 중심의 시각인지와 같이 말입니다. 회화는 그런 의미에서 종교, 철학과 나란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묘하게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겹쳐집니다. 살인자를 쫓는 구성도 그러하며, 더우기 살인자와 에니시테의 대화는, 윌리엄수사와 호르헤수사와의 종교,철학,예술을 넘나드는 격조높으면서도 격렬한 대화가 오버랩됩니다. 주관적 당위성에 근거한 광신적 신념은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수사와 같은 괴물을 양산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내이름은 빨강>에서도 <장미의 이름>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림과 관련된 살인사건에는 주관적 당위성에 근거한 광신적 신념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세밀화가, 종교성에 투철한 세밀화가들이 그림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등의 당위성을 내세우는 장면에서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토마스가 생각납니다. 토마스는 스스로의 결정이 아닌 '그래야만 한다'는 외부의 도덕적 의무 또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일종의 구속이라 생각하고 그를 거부합니다. 주관적 당위성 안에 안주하는 거장 화원장 오스만과 그 당위성을 부정하며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는 에니시테, 그렇다면 에니시테는 '토마스'와 같은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테죠.




장님이 되어 기억으로 그림을 그리는 대가에 대한 이야기는 인상 깊었습니다. 그린다는 행위는 기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즉 대상과 그림을 동시에 볼 수 없기때문에, 그린다는 행위는 첫째 대상을 보고 기억한 다음, 둘째 그 기억에 의지하여 그린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수십년간 같은 그림을 그리며 몸에 익힌 기억은 눈을 감고서 단지 몸의 기억만으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점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읽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과자'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주 사소한 행동에 의해 기억이 되살아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터키여행을 다녀왔더랬습니다. 이 여행에서 <빨강>의 의미를 약간 짐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내 이름은 빨강> 이 제목의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했었거든요. 먼저 눈에 뛴 것은 터키 국기입니다. 그 국기를 월성기라고 하지요. 초승달과 별로 되어 있기때문이지요. 이 국기에서 눈에 확 띄는 점은 바탕의 빨강색입니다. 



또 한가지 터키의 집들입니다. 지붕이 한결같이 붉은 색 계통입니다. 



아래는 보스포러스해협에 면한 해안가에 있는 건물입니다. 역시 붉은 색 지붕을 볼 수 있습니다. 



아래는 블루모스크의 바닥에 깔려 있는 양탄자입니다. 



터키를 대표하는 색깔을 말하라고 하면 단연 빨강색일 것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은 빨강>이란 제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비록 터키가 서구화를 추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뭐래도 우리는 터키일뿐이다라고 소리치는 오르한 파묵의 고함이 들리는 듯합니다. 터키가 서구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속에는 터키의 정신, 문화가 남아 있을 거라는 소리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서양화풍을 도입하려했던 에니시테나 이슬람 전통화풍을 유지하려했던 오스만이나, 둘 다 오르한 파묵의 분신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은 <내 이름은 빨강>에서 발췌한 몇 구절들입니다.  


◆ 책에 대해서

'책은 영원히 남아." 1권 293쪽

<내 이름은 빨강>은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니시테는 책은 영원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책이 영원하지 않다는 말을 듣자 살인자는 정신없이 에니시테의 머리를 내리칩니다. 과연 책은 영원할까요?


책은 우리의 슬픔에 스스로 위안이라고 착각하는 깊이를 더해줄 뿐이다. 

2권 221쪽 (카라)


◆ 사랑과 행복에 대해서 

"사랑은 결혼한 뒤에도 생기니까요. 잊지 말아요. 결혼하기 전에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결혼과 함께 꺼져 버려요. 그 다음은 공허하고 슬픈 흔적만 남게 되죠. 결혼한 후에 느끼는 사랑도 물론 언젠간 끝나기 마련이지만 행복이 그 자리를 대신해 주죠. 그런데도 성미 급한 바보들은 결혼하기 전에 사랑을 활활 태워서 모든 사랑을 소진해 버리고 말죠. 왜냐고요?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예요." 


"그럼 가장 중요한 게 뭐란 말이요?" 


"행복이죠. 사랑과 결혼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1권 329쪽(세큐레와 카라의 대화중에서)


사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머리를 짜내는 저 같은 사람의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그 무엇인 것 같습니다. 2권 327쪽 세큐레


나의 모든 생애를 세밀화에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화원이 예헤라트파 거장들이 이룩해 낸 아름다움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음을 나는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다. 이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삶이 쉬워진다. 이런 겸양이 우리에게 고귀한 미덕이 되는 까닭은 그 것이 삶을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2권 56쪽


◆ 종교와 철학, 미술에 대해서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1권 321쪽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씌어 있지. 1권 323쪽


갑자기 세상이 서로 통하는 문이 달린, 수많은 방을 가진 궁전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기억하며, 상상하며 드나들 수 있지만, 대부분 게을러서 조금만 움직일 뿐 항상 같은 방에 머무르고 있는 거지요. 2권 326쪽 세큐레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려는 바보 같은 제 아들 오르한은 시간을 멈추게 한 헤라트파의 장인들은 절대로 저를 저처럼 그릴 수 없다는 걸 상기시켰어요. 반면에 아들을 안은 아름다운 어머니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유럽화가들은 절대로 시간을 멈추게 하지 못할 거라며, 아무튼 저의 행복의 그림은 절대로 그려질 수 없다고 수년간 줄기차게 제게 말했지요. 2권 333 세큐레

 

서양화속에 우리가 그려진다면 우리는 그림과 테두리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될 것이다. 헤라트파 장인들이 그린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우리는 신께서 우리를 보시는 곳으로 인도될 것이다. 만일 중국 그림에 들어가 있다면 그림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의 그림은 끝나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기때문이다. 2권 57쪽


오르한은 현재 연금상태에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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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 / 이희철 지음/ 도서출판 리수

 

언젠가 한 외국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가장 여행하고 싶은 나라는 터키라고... 왜?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이한 자연경관은 잊을 수 없는 풍광이라고...

 

 [해외여행] 터키 카파    파묵칼레 고대로마 유

 좌) 카파도기아    우) 파묵칼레

 

몇 년전에 중국 청도에 사는 지인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떠난 그 여정은 나에게 여행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복잡한 시내에 쇼핑하러 갔을 때였다. 나는 슬며시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난 중국어를 전혀 모르며, 더구나 지인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내하는 지인을 놓치면 끝장이다 싶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복잡한 군중속에서 그 지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따라가야만 했다. 아픈 기억이었다. 

 

여행에 문외한인 내가 그 때 배운 사실은 '여행의 성공여부는 오로지 사전 준비에 달려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리였다.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에서 말한 바,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만큼 보인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이번 터키여행을 즈음하여 사전준비차원에서 책을 두권 읽었다.

 

그 중 하나가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이다. 

 

 

 

 

 

왜 터키를 최고의 여행지라고 할까? 여기에는 두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터키는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라는 점과, 둘째, 터키의 독특한 자연경관때문이다. 

 

터키의 역사와 문화는 풍요롭다.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동양과 서양이 길목에 위치해 있어 두 문화가 교차하고 있는 곳이 터키이다. 유럽문명과 아시아 문명,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 등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문화들이 얽혀있는 터키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신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터키는 동서고금, 그리고 성과 속이 한자리에 얽혀 있는 다양성의 나라이다. 

 

<터키의 역사>

터키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터키가 위치안 아나톨리아 반도의 굻직한 역사적 시대는 멀리 구석시시대에까지 이른다.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히타이트 시대, 프리기아 시대, 우라르투 시대, 리디아 시대, 페르시아 지배 시대, 헬레니즘 시대,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 셀주크 시대, 오스만 제국시대를 거쳐 오늘날 터키 공화국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차탈회윅에서는 그 역사는 기원전 6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신석기시대 인류 최초의 집단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히타이트제국의 유적인 '보아즈칼레'가 있고, 프리기아왕국의 황금의 손 미다스왕의 유적인 고르디온 유적도 있다. 그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배경이 된 트로이도 오늘날 트루바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를 거쳐 BC 546년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아래 있다가 알렉산더의 정복으로 헬레니즘 문화에 편입된다. 그리고는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어 고대 그리스도교의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숨쉬는 곳이 되어 그와 관련된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AD 1071년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에 침공하자, 이로부터 그리스 로마 세계로부터 터키 이슬람 세계로 바뀌게 된다. 셀주크제국의 변두리에서 시작된 오스만제국은 1453년 비잔틴을 점령함으로 동로마제국에 종말을 고하고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후 600여년간 세계를 호령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서방 열강 세력아래 떨어진다. 이 때 터키 공화국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의 혁혁한 영토회복 전쟁의 승리로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현재 터키인들의 조상은 기원10세기경에 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온 터키족이다.  터키족은 990년 아나톨리아에 강력한 셀주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셀주크제국 말기에 부르사지역에 있던 오스만토후국이 1299년 셀주크로부터 독립하여 오스만 제국을 이룬다. 이 오스만 제국이 터키 공화국에 이어진다. 

 

흥미롭게도 터키는 튀르크라고 불리는 돌궐족의 후예라고 한다. 고대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여 만리장성을 쌓게한 장본인들인 유목민족 흉노족(훈족)과 돌궐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와 터키인의 조상이 된 것이다. 

 

아뭏든 만여년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의 숨결이 이 지역 곳곳에 산적해 있어 역사와 문화의 보고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터키를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터키-신화와 성서의 무대, 이슬람이 숨쉬는 땅>에서는 간략한 터키의 역사를 소개하면서 아울러 관광지, 휴양지등을 역사에 비추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터키인의 생활양식이나 사고 방식등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이제 하나의 욕심이 더 난다. 간단한 터키말을 구사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하는 바람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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