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최인호 지음/ 열림원

 

최인호 작가는 <유림>을 쓰기 위해 3년동안 수십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유림이란 유학의 숲이란 뜻이다. 이 책 <유림>에서는 유학의 창시자인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맹자, 주자, 조광조, 이율곡, 이퇴계등의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정점은 퇴계 이황이다. 공자와 맹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주자, 주자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조선은 수많은 성리학자들을 낳는다. 그 중에 퇴계 이황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의 사상을 충실히 발전시켜 성리학 최고봉의 자리에 앉아 '해동주자'라 불린다.

 

유학은 오랫동안 거대한 중국의 통치이념으로서 역할을 했고, 조선의 건국 이념이기도 했지만, 정작 우리네가 유학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많지 않다는데 순간 깜짝 놀란다. 서구 문명과 문물에 밀려 보이지 않는 구석에 초라하게 자리한 유학의 실체는 무엇일까? 예로부터 충효를 중시하는 정신은 유학에서 비롯된 것이며, 조선의 철학사를 풍미하던 성리학이니, 또는 양명학이니, 퇴계 이황의 이기이원론, 이율곡의 이기일원론이니 하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도대체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도통 알지를 못했다는 점을 실토해야겠다. 최인호의 유림 1~6권은 유학의 숲이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하여 아시아의 동쪽 작은 나라인 조선에서 이황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유림 1권은 유학의 왕도를 현실 정치에 접목하려다 실패한 정치가 조광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공자가 자신의 사상을 정치에 접목하려다 실패하였고, 맹자 역시 동일한 길을 밟았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한일까?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를 받고 혜성처럼 등장하여 유학의 정신을 바탕으로 정치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훈구파에 밀려 생명을 내어 놓아야 했던 비운의 정치가이다. 조광조와 함께 한 사림파의 앞날이 촉망되던 수많은 젊은 선비들도 사화에 말려 추풍낙엽처럼 스러져 간다.

 

 

 

유림 2권은 공자의 이야기이다. 최인호의 <소설 공자>와 거의 같다. 18년동안 수많은 나라들을 주유하며 자신의 뜻을 펴 보이려 했지만, 패도정치가 만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공자의 꿈은 허망하기만 하다. 고향 노나로 돌아온 공자는 현실정치에 대한 열망을 접고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며 저술에 힘쓴다. 

 

 

 

유림 3권은 퇴계 이황의 이야기. 퇴계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노후에 나비처럼 날아든 사랑 - 퇴계를 향한 기생 두향의 일편단심을 이야기한다. 이황의 부인 권씨 부인은 어릴 때 받은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여자였다. 사화로 인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퇴계는 권질이라는 분을 존경하고 있었는데, 유배되어 간 권질을 방문했다가 그로 부터 간곡한 요청을 받는다. 염치없지만 모자란 딸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퇴계의 부인 권씨부인은 바로 권질의 딸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정신적으로 모자란 부인때문에 평생 마음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 번도 이를 내색하지 않고 군자의 도로 한결같은 정성으로 부인을 대한다. 퇴계는 가정생활에서 먼저 군자의 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러한 상황을 오히려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고 한다.

 

퇴계는 나이 사십후반에 임금의 명으로 단양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19세의 기생 두향은 퇴계를 존경하며 연모한다. 퇴계도 두향을 지극히 아낀다. 9개월간의 두향과 꿈같은 세월을 보낸 후 퇴계는 단양을 떠나게 되고 두향과는 영원한 이별을 맞는다.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던 퇴계에게는 두향의 사랑이 오히려 거침돌이 될 것이라 여겼던 탓이리라. 이후 두향은 퇴계를 그리워하며 평생 수절하며 지내다 퇴계가 죽은 해 물위에 몸을 날린다. 그리워하면서도 더 이상 만나지 않았던 그들. 퇴계가 두향을 이별하며 남긴 전별시는 가슴이 아린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서로 보고 한 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4권은 맹자의 이야기, <소설맹자>와 거의 동일한 내용이다. 맹자는 성선설로 공자의 유학을 형이상학의 경지로 끌어 올렸으며, 제자쟁명의 시대에 수많은 사상가들과의 논쟁을 통해 유학을 지켜내고 유학을 발전시킨 맹장이다. 맹자가 성선설의 근거로 제시했던 사단 -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인의예지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공자는 성인이라 불리고, 맹자는 아성으로 불린다. 유교사상을 공맹사상으로 부를 정도로 유교에 대한 맹자의 기여도는 지대했다.

  

 

 

<유림> 5권은 율곡 이이의 이야기이다. 율곡의 어머니는 유명한 신사임당, 율곡은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명석함을 보여주었다. 태몽으로 용을 보았다고 해서 아명은 몽룡이었다. 율곡의 나이 15세에 신사임당이 죽고, 새로 들어온 새어머니와 형과의 갈등으로 가정에 우환이 있어 고통스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아마 나이 19세에 불문에 귀의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니련가. 하지만 1여년의 방황끝에 율곡은 다시 유교로 돌아온다. 율곡은 퇴계를 찾아가 2박3일을 머물며 이야기를 나눈다. 퇴계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은 율곡은 퇴계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유학에 정진하고자 하는 듯을 굳히게 된다. 이후 과거시험에 <천도책>으로 장원급제하게 되는데, 그 과거시험의 답안지였던 <천도책>이 소개되고 있다.  

 

 

 

6권, 다시 이퇴계의 이야기이다. <유림> 6권에서는 조선 성리학 역사상 최대의 이슈였던 기대승과과 사단칠정논변이 전개된다. 한참 연배가 아래인 기대승과 편지를 통해

심도깊은 철학적 논의가 이루어진다. 퇴계의 사상에 대한 기대승의 의문제기에 퇴계는 자신의 사상을 돌아보고 미흡하고 잘못된 점은 겸손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한다. 참 대인배다운 모습이다. <유림> 6권에서는 이기론의 역사가 실려있다. 주돈이의 태극사상, 정이 정호 두 형제의 성리론, 유학의 전통과 당시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성리학, 육구연으로 부터 왕양명에 이르는 양명학등등...일종의 정치사상으로 시작된 유학이 어떻게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발전되었는지 그 경위를 흥미있게 보여준다. 성즉리(性卽理)는 성리학의 신조, 심즉리(心卽理 )는 양명학의 신조...양명학은 선불교와 유사하다. 주자 역시 젊어서는 선에 심취했으나 이연평을 만나 성현들의 책을 읽은 이후 유학의 오묘함에 눈을 뜬다. 아버지 주송으로부터 천자문을 배우던 중 아버지가 하늘을 가리키며 '천'이라고 이야기하자, 하늘위에는 무엇이 있느냐고 질문한 주희는 어른이 되어 물질적인 우주의 배후에는 더 높은 근본 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십년이 지난 후에 그것이 '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퇴계가 9살때 숙부로부터 '성즉리'를 배우다가, '리'가 무엇인가라고 숙부에게 물어 숙부를 당황케 하였다. 숙부는 대답을 미루고, '직접 생각해 보아라'고 말한다. 퇴계는 몇일을 생각한 끝에 '리'는 '마땅히 그래야 할 (시)라고 생각된다'고 숙부에게 대답한다. 퇴계는 이후 평생 '리'라는 화두를 붙잡고 파들어간다. 퇴계의 이기이원론의 원류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매화를 극진히 좋아했던 퇴계는 '매화에 물을 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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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미, 김영우의 <다산, 그에게로 가는 길>에서 발췌 정리 

 

■ 당파의 발생과 당쟁

임진왜란에 앞서서 왜란의 발발 위험이 있다고 본 당파는 서인이었고, 왜란의 발발 위험이 없다고 본 쪽은 동인이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동인은 전쟁을 극복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유성룡이나 이순신은 남인 계열이었다.

북인은 의병활동을 통해 나라의 위기 해결에 기여한다.

선조의 아들 광해군이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광해군은 후에 북인의 지지를 받아 집권하게 된다.   

광해군 때는 북인의 일당 독재 체제였다. 북인이 추앙하는 사람은 진주를 기반으로 하던 남명 조식선생이다. 남명은 퇴계와 쌍벽을 이루고 있던 야인 유학자이었다.

북인 정인홍은 당시 거유인 퇴계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조식을 문묘에 올리자고 주장하나 이 요청은 수락되지 않고, 이후 정인홍의 권력도 위축된다.

이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한 인조반정이 성공함으로 북인은 몰락하고 만다.

연립정권을 구성한 서인과 남인은 자주 충돌하게 되는데, 북벌론이나 예송 논쟁이 그것이다.

당시 서인의 영수는 우암 송시열이었는데,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송시열의 제자 윤중을 중심으로한 소론으로 분열된다.

남인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고, 노론은 신권을 더 중시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로 인한 입장 차이가 예송논쟁의 격화에 원인이 된다. 왕의 예법을 신하의 예법과 동일하게 볼거냐, 아니면 왕은 특별한 존재이니까 신하의 예법과는 다르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별 역할을 못한 서인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이나 오랑캐 나라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론으로 자존감을 높이려 한다.

북벌론의 결과 서인은 청나라의 발달한 문물을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 성리학의 이기론이란?

조선시대를 지배하던 유교 사상은 성리학이다. 송나라의 주자로 부터 시작된 성리학은 조선의 이퇴계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게 된다. 이퇴계는 '해동주자'란 별칭으로 불릴 만큼 주자를 따랐던 조선 최고의 유학자이다. 성리학의 이기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과 기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이론이다. 눈에 보이고 형체로 드러나며 운동하는 것을 '기'라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 새가 알을 낳는 것, 나무에 꽃이 피는 것, 이런 것이 모두 기의 작용이다. 그러나 새가 알을 낳기는 하지만 타조가 참새 알을 낳을 수 없는 것이고, 배나무에 꽃이 피지만 배나무에 사과 꽃이 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듯 타조는 꼭 타조 알을 낳고, 배나무에는 배꽃이 피도록 만들어 주는 어떤 원리나 법칙, 어떤 현상의 근거가 되는 것을 일컬어 '리'라고 한다. 

 

■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이기론

여기서 기를 더 강조한 것이 기발설, 이를 강조하는 것이 이발설이다. 퇴계 이황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감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사단은 완전히 선한 감정이기 때문에 '리'에 속하고, 칠정은 선악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에 '기'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사단을 '리'가 발현한 것이며,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사단은 <맹자>에 나오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가리킨다. 칠정은 '희노애구애오욕'으로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을 말한다.  

 

퇴계보다 36년 늦게 태어난 율곡 이이는 퇴계의 이론에 반론을 제시한다. '리'는 원리이니까 이건 '기'처럼 운동하는 것이 아니며, 운동을 하지 않으니 발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기'는 운동을 하지만, '리'는 운동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운동할 수 없는 '리'가 발현한다는 퇴계의 설명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구분하는 데 치중했다면, 율곡은 기는 운동하지만 리는 운동할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퇴계의 이발설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퇴계로서는 리와 기를 마음의 본성의 문제에 국한시켜 말한 반면, 율곡은 리와 기에 대한 규정을 들어 퇴계설을 바판한 것이다. 퇴계가 주로 인간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와 기를 이해하고 있다면 율곡은 리와 기를 존재의 문제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퇴계의 '이기이원론'과 율곡의 '이기일원론'이 나오게 된다.

 

■ 정약용의 유교 사상

정약용은 실학자이기에 앞서 유학자였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의 영향을 받아 리와 기를 달리 해석하였다. 율곡은 운동을 하느냐 안하느냐를 가지고 리와 기를 설명했다면, <천주실의>에서는 자랍성을 가지고 판단했다. 기는 자립적인 존재이고, 리는 그 자립적인 존재의 속성으로 보았다. 성리학에서는 최고의 존재 원리였던 리가 기의 속성으로 전락한 것이다. 리가 기의 속성이라면 운동의 주체는 기가 된다. 그러므로 기발은 성립하지만 리발은 성립할 수가 없다. 움직이는 것은 주체일 뿐, 속성은 그 주체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율곡의 기발설에 더 가깝다고 보여진다. 

 

정약용의 철학을 말하라고 한다면 아마 성기호설쯤 될 것이다. 성리학은 본성이 리라고 본다. 성기호설은 본성을 리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라고 보는 것이다. 인간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성기호설에 따르면 본성이 성향을 따라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굳센 의지, 구체적 실천, 이런 것이 종요하다. 성리학은 천(하늘)도 '리'라고 한다. 정약용은 천(하늘)은 '리'가 아닌 절대적 인격자인 상제(하느님)로 보았다.

 

정약용은 현실과 동떨어진 채 내면의 인격만을 도야하는 것은 유학자의 수양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수기(자신을 닦는 것)이 반이고 목민(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반이라고 주장했다. 성리학의 내면의 수양으로는 수기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백성을 사랑하는 목자된 자의 윤리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주장이었다.

 

성리학을 비판하던 다른 실학자들과 정약용의 실학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약용은 이전 것을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던 고전적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윤리적 수양론을 만들어 냈다는 데 특징이 있다. 박지원이나 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실학자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새로운 것으로 기존의 것을 대체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과거와의 연결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약용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전통을 재검토하고 그 바탕위에서 새로운 비전을 열려고 했다. 이런 점에는 정약용은 동양 지성사나 한국 사상사와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정약용이 여러 실학자 중 한 사람이라는 말은 어떤 점에서는 맞지만 경학 연구를 놓고 볼 때, 학문적 전통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고 거기서 출발한 것으로 보면 정약용은 분명히 실학의 중심인물이고 실학을 집대성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 정약용의 실학사상

박지원은 정약용보다 서른 살 정도가 많으며, 박지원은 노론의 자제로 당색도 달랐고 서로간의 교유가 없었다. 박제가도 정약용보다 10년정도 빠른데, 화성이 벽돌로 만들어 진 것은 박제가의 공로가 크다고 한다. 박제가의 <북학의>에 보면 벽돌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학자는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등 두 파로 나누어진다. 경제치용학파는 농업중심의 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용후생학파는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경세치용학파로 반계수록의 유형원, 성호 이익의 뒤를 잇는 실학자이었다. 한편 이용후생학파에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등이 있으며 이들은 북학파로 알려져 있다.  

 

 

■ 정약용의 삼근

황상이라는 정약용의 제자가 배움을 중단하려 하면서 스승 정약용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가지 병통을 언급하였다. 

1. 머리가 둔하고

2. 앞뒤가 꽉 막혔고,

3. 분별력이 없다.

 

정약용은 황상에게 배우는 사람에게 있는 세가지 병통을 이야기해 준다.

1. 기억력이 좋은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게 하고

2. 글짓는 재주가 좋은 사람은 가벼이 들떠 허황한 대로 흐르게 하고

3.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깊이 공부하지 않아 거칠게 된다. 

 

그런데 황상에게는 이와 같은 세가지 병통이 하나도 없음을 지적하면서 "머리가 둔하지만 공부를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앞뒤가 막히나 그것을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어지며, 분별력이 없으나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빛이 난다. 이 세가지는 모두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부지런히 한다는 것은 마음을 확고히 하는데 있다. 이렇게 즉 네가 부지런히만 공부한다면 네가 생각한 병통들이 오히려 너의 장점이 될 것이다." 라고 조언한다. 황상은 이 말을 깊이 간직한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그러려면 마음을 확고히 하라." 마음을 확고히 하라는 듯의 '병심확'과 부지런히 하라는 '삼근'이 여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 정약용 연구 정약용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1930년대 조선학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운동의 일환으로 정약용 서거 100주년에 맞추어 정인보, 안재홍, 최익한의 주도로 정약용의 저술을 모아 <여유당전서>를 발간한다. 정약용은 이 세사람에 의해 조선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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