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골 장대 - 청소년 수련원 - 구름고개산장 - 금련산 헬기장 - 금련사 - 도시고속도로 굴다리

2시간 반...


산 길을 걷는다. 사방에 온통 호흡하는 존재가 지천이다. 땅 속에 뿌리를 박은 채 싹을 낸 이후로 지금껏 한 자리에서 평생을 보낸 존재들. 사월 중순의 신록에 햇빛이 비치니 밝은 초록이 바람에 펄렁거리며 부드럽게 펼쳐지는데, 한 가지로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잎 모양이 서로 달라 수많은 개체들이 엉겨 있음을 알게된다. 이 모든 풀들은 제 이름이 있겠지만,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름을 모르는 나는 그 개별성을 인지하지도 못한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존재의 확인이며, 다시 만남의 기반이다.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지 않는가? 존재를 인지하여 이름을 붙여 다른 것과 구별할 수 있다면, 이후에라도 다시 만났을 때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다시 만남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는 이 풀들을 다시 만나고 싶으나, 수 많은 풀들을 구별하는 것 조차 힘들다.


개별적으로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이는 이 사태에 예외가 되는 것은 꽃이다. 분명히 구별되는 도드라진 색으로 꽃은 잎사귀와는 다르다. 연분홍 진달래는 숨어 있지만, 주위의 초록빛속에 숨어 있다. 숨어 있는 초록을 찾기는 힘들어도 연분홍 진달래는 숨어 있지만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꽃은 다시 눈길을 잡아 당긴다.


진달래는 왜 숨어 있는가? 사실은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진달래는 군락을 이루지 않을 뿐이다. 하나의 개체에서도 꽃은 군락을 이루지 않고 개별적으로 핀다. 한 가지에 진달래 한 꽃, 게다가 진달래는 수줍게 홀로 핀다. 철쭉은 군락을 이루어 철쭉제니 뭐니 하지만, 진달래제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드넓은 숲 속에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이 가까이에 한 두개, 저 멀리 하나, 이렇게 개별적으로 피다 보니 숨어 핀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가? 진달래의 소박한 색도 그렇다. 철쭉은 진한 분홍으로 자랑하지만 진달래는 연분홍으로 수줍다. 숲 속에서 도드라지기 보다는 숲 속에 스며 있는 진달래다 보니 마치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연인같다.


산을 오르다 시야가 툭 트인 곳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저 아래에 보여야할 수평선이 훌쩍 키가 커져서 내 눈 높이에까지 올라와 있다. 높이 오를 수록 수평선은 높아진다. 사람의 꿈도 자꾸 커지는 걸까?


청소년 수련원 운동장이 저 위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난다. 아이들은 꽃을 보기보다는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넘치는 힘을 발산하려면 저렇게 소리치고 뛰어야 하리라. 하지만 인생의 저녁에 접어들면 힘을 발산하기 보다는 힘을 아껴야 한다. 뛰어다니고 소리치는 것 보다는 느긋하게 바라볼 뿐이다. 꽃은 적극적인 행동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관조의 대상이다. 그래서 아마 나이가 들면 꽃이 좋아지나 보다.


키가 작아 땅 가까이 낮은 곳에 핀 보라색 꽃에 흙이 묻어 있다. 어제 밤 비 방울에 튄 흙이 묻었나 보다. 숲을 흔드는 바람은 땅 가까이에서는 약해지겠지만, 그래도 꽃잎을 조금이나마 흔들어 대겠지. 질량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존재하는 잡아당기는 힘, 중력은 어김없이 흙을 지면으로 잡아 당긴다. 좌우로 흔드는 힘과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은 결국 흙을 꽃잎으로부터 분리해 내고 땅에 떨어지게 하리라. 그리고 결국은 꽃도 떨어진다. 꽃에 묻어 있는 흙은 꽃에 동화되지 못하고, 표면에서만 잠시 어울리다가 결국 헤어진다. 꽃은 본체인 듯 하나, 그 역시 줄기로부터 떨어진다. 꽃은 본체가 아니었다. 단지 생식의 계절에 생식을 목적으로 피어나 아름다움을 흘리다가 떨어져 버리는 수단인 것을, 그러면 본체는 뿌리? 줄기? 풀은, 나무는 그 무엇을 위해 뿌리를 내리고 물과 양분을 빨아 당기는가? 풀은, 나무는 그 무엇을 위해 초록 엽록체로 빛을 받아들이고 물과 양분을 사용하여 열매를 만들어 내는가? 본체는 생명이로구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갈 때, 이마와 등줄기에는 땀이 축축하고, 허파는 가쁜 숨을 몰아쉰다. 이럴 때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아무 생각이 없다. 단지 오르는 일에만 모든 것이 집중될 뿐, 인생의 힘든 여정에서도 아마 그럴 것이다. 생각할 시간이나 여유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사치이다. 먹고 사는 것이 바쁜 사람에게는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하지만 그런 사치를 즐기고 싶다. 생각하며 살고 싶다. 왜 내가 살고 있는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인공적으로 숲을 조성해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식이 있을까?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는 것이 그 표식중 하나이다. 또한 단일 수종이 자라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자연적으로 조성된 숲은 제 마음대로 자라난다. 얼키설키 얽혀져 있기도 하다. 불균질은 자연의 표식이라면 균질은 인공의 표시이다.


내려오는 길이 더 험하다. 아래로 잡아 당기는 힘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서는 안된다. 어느정도 그 힘에 반발하며 움직임을 통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넘어지고 미끄러질 수 밖에 없다. 내려오는 길에 작용하는 힘...내려오는 길은 통제가 어렵다. 오르고 내리는 길보다는 가파르지 않은 둘레길이 좋다. 오늘도 나는 정상을 외면해 버리고 만다. 정상을 버리고 둘레를 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그렇다. 정상을 노크하기보다는 둘러간다. 정상으로 향한 가파른 길보다는 멋지게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걷는다. 중력이 잡아당기는 힘을 극복하는 길보다는 중력을 즐기며 걷는 길이 좋다. 이것도 내 인생인 것을 누가 뭐라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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