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북학의 박제가 지음/ 박정주 옮김/ 서해문집 2012 10 21-23 읽음
'북학의'란?
'북학의'는 박제가가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조선에 실행하여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북학의'에 나오는 '북학'이라는 말은 원래 <맹자>에서 진량과 같은 남만의 지식인이 '주공공니지도' 곧 유학을 북쪽 중국에 가서 배운다고 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1778년 박제가가 이부분을 인용하여 중국의 문물을 배울 것을 주장한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라 이름한 이후 북학은 청나라에 중화의 선진문물을 배운다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게 된다. ( * 참고: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는 경학을 중시여겼으나, 남조는 노장사상이 강하여 청담(명리를 떠난 맑고 고상한 이야기)가 성행하였고 문학과 예술을 중히 여겨 시인과 문학가가 속출하였다. 북조의 북학에 대하여 이를 남학이라 한다)
그리고 '의'라는 말은 원래의 문자적인 뜻은 '의논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나, '북학의'의 '의'는 일종의 한문의 문체를 일컫는 것이다.
'의'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의'는 정도(正道)에 근거하여 이치를 밝히거나, 올바른 방향에서 정사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옳은 사례를 이끌다가 오늘의 잘못을 밝힐 수도 있고, 근원을 따져서 말류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번거로운 논리보다 분명한 사리로 펴내야 한다. 따라서, 글은 간결한 것을 으뜸으로 쳤고 번잡한 것은 잘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여러 신하들이 모여 의논을 하게 되는데, 서로 자기 주장을 내세워 떠들썩하게 되자 글을 지어 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학사들이 보는 바가 있으면 집에서 사사로이 의논을 하게 되어 이때부터 의가 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뒤 문인에 의하여 일정한 대상에 개인적인 생각으로 의논한 의가 많이 지어졌다.>
박제가가 그의 저서를 '북학의'라고 한 것은 중국의 선진문물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글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개략적 내용
'북학의'는 박제가가 청나라에 사절로 방문하여 보고 듣고 본 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그래서 기행문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차라리 일종의 과학기술소개서 또는 정책 건의서라고 보여진다. 예를 들면 경제의 혈맥과 같은 교통의 문제와 관련된 수레의 사용, 배의 사용, 그리고 도로등에 대해서 큰 비중을 두고 논한다. 그리고 경제의 기본이 되는 농사와 관련하여 농사짓는 방법, 농기구, 거름의 제조 및 사용등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벽돌을 제조하고 사용하여 성곽과 집을 건축하여 더 나은 주거생활을 장려하고 있다. 그리고 기타 중국의 발달한 기술문명등을 조선에 도입하여 백성의 가난을 물리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다. 아울러 과거제의 폐단과 그 개선책을 제안하고 있기도 하다.
읽고 난 후
첫째로 박제가의 사물을 통찰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박제가는 사물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단순히 벽돌이나 수레등의 유용성에 의거하여 이를 사용해야 한다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인프라, 즉 도로의 건설이나 표준화 문제등을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들이 경제에 어떠한 파급효과를 미칠 것인지도 통찰하고 있다. 그의 글 가운데 잘 드러나고 있는 중상주의 즉 상공업의 활성화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기술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학의를 단순한 기행문으로 규정짓는 것을 곤란하게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행문이라기 보다는 경제서 또는 기술서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그 당시 조선 백성들의 생활상,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한민족의 병폐등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백성의 의식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사상은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상공업이나 먹고사는 문제등의 실학적인 기풍이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환경하에서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고 더군다나 대충대충하는 한민족의 지워버릴 수 없는 폐단으로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이루는 정책 또는 인프라등이 조악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었다. 세종대왕시대의 과학의 장려와 발전등이 그 이후 세대에 이어지지 않고 그 명맥이 끊어진 상태로 조선의 과학기술문명은 퇴보에 퇴보를 거듭하여 아시아의 최빈국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가난한 백성들의 실정을 개선하여 의식주를 해결해 주며 국력의 신장을 꾀하고자 하는 그의 원대한 포부가 드러나 있다. 폐단이 많던 과거제를 개혁하여 생산에 참여하는 노동인구의 증가를 꾀함으로 경제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세째로 박제가의 개방성과 혁명성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사대로 대하고 있었으나 그들을 오랑캐 나라라고 말하며 그들의 문화를 천시하고 멸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자고 주장하는 것은 조선을 문화국으로 자부하는 조선의 선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며, 오랑캐의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의 조선의 상황은 이렇듯 청나라의 발전한 과학기술들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극적으로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사상은 당시에 비추어 보아 혁명적이기도 하다. 중상주의적 그의 사상은 당시의 중농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혁명적인 발상이다. 특히 근검절약과 소박한 생활을 장려하던 당시의 풍속에 반하여 소비의 진작을 통해 생산을 촉진하며 도로의 건설과 수레 및 선박의 사용, 그리고 다른 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상공업을 발전시켜 백성의 의식주생활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른바 경제발전을 도모함에 있어 국가의 역할을 부여하며, 그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당시 태동하고 있었던 실학사상과 아울러 실제 정책으로 실시되고 그러한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한민족의 치욕의 여가인 식민시대는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텐데...
사실 이 책에 나와 있는 벽돌, 수레의 제조, 선박의 구조 및 농기구의 사용등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지금의 우리들에게 큰 의미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저서에 나타나 있는 그의 사상이다. 그의 개방적이며 혁명적인 사상, 실학적인 사상, 그의 통찰하는 방식등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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