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 지음/ 브레히트 학회/ 연극과 인간


묘한 우연이다. 마르크스의 <자본>1권을 읽고 나서 잡은 책이 '브레히트'라니. 브레히트의 사회주의적인 성향과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도축장의 성 요한나>는 아주 직설적이다.


자본의 끊임없는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결국 그 스스로가 탐욕의 희생자가 되는 모순. 거기에 더해 빈민 노동자들은 착취를 당하다가, 쓸모없다 싶으면 그냥 길거리에 내동댕이쳐진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의 절망, 분노. 폭동을 일으키는 노동자를 사정없이 진압하는 경찰.

빈민 노동자들의 마지막 동아줄이 되려고 하는 종교의 노력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종교는 돈을 가진 자들과 타협하려 한다.

구세군  소위 요한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자본가들은 요한나를 이용하여 사욕을 추구한다. 노동자들은 요한나에 등을 돌리고 폭력적인 방법에 호소한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요한나는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간다. '성 요한나'로 추앙을 받으면서.


작품의 배경이 '도축장'이란 것은 작가의 복심인 듯하다. 도축장이란 소나 돼지를 잡는 곳이지만, 상징적으로 자본이 난무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현장은 마치 빈민 노동자들을 도축하여 이익을 남기려는 곳과 같다는 의미인 듯하다.


다섯마리의 황소의 아이러니한 대사는 노동자들이 할 말을 대신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인간들에게 쓸모 있지 않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청하노라. 소고기를 먹어달라고." 노동자들은 도축장의 짐승과 같은 신세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살아 보려고 하지. 그런데 당신들에게 쓸모 있지 않아서 당신들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그래서 우리 같은 사내와 여자와 아이는 부탁하는 거요. 우리를 사가라고!"


요안나는 죽어가 면서 이렇게 말한다. "항상 그렇듯이 선함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더 이상 명예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은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거죠. 그래서 천직을 받은 것처럼 나는 억압받은 사람들에게 왔어요. 그러나 결실 없는 선행을 베풀었던 거죠. 감지될 수 없는 신념만을 주었던 겁니다. 난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요안나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자신의 순진성을 후회하는 말처럼 보인다. 종교적인 신념은 세상을 바꾸기기엔 역부족이다. 요안나가 그토록 기피했던 폭력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동력일지도 모른다고 요안나는 후회하는 것 같다. 이것은 아마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고무하는 말처럼 들린다.


지인이 이야기했다. 마르크스의 인간애, 휴머니즘만은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며, 우리가 들고가야할 유산이라고. 하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은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함으로 결딴이 나 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바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위태하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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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브레히트학회편/ 연극과 인간

 

바알

남자는 남자다

서푼짜리 오페라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린드버그들의 비행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조처

 

 

희곡은 낯설다. 연극을 본 적이 있었던가 돌이켜 본다. 아니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 기억이 희미하다. 희곡을 읽은 일은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렇게 두 편을 읽었다. 그 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읽을 때 황당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건 뭐지??? 다 읽고 나서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밤으로의 긴 여로>의 불행한 가족 이야기는 인상적이긴 했다.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자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의 난감함에 다시 마주친다. 그래서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통에 세세한 그림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권을 다 읽은 시점에서 생각하면, 브레히트가 이러한 희곡을 통해 말하려고 했던 무언가가 있구나하는 것을 느낀다.

 

<바알>에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시인의 방탕한 생활을 묘사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악용하여 여자를 농락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당한다.

 

<남자는 남자다>는 꼬드김에 빠진 한 남자가 전쟁터에서 용맹을 보이게 된다는 이야기.

 

<서푼짜리 오페라> ???

 

<마하고니 시의 번영과 몰락> 아마도 미국의 라스베가스를 은유한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글쎄 뭔가 자본주의를 풍자하는 내용인 듯...

 

<린드버그들의 비행> 비행기를 타고 처음 대서양을 가로 질렀던 린드버그의 이야기인데, 자연과의 사투에서 승리한 인간의 모습.

 

<동의에 관한 바덴의 학습극> 추락한 비행사들을 도와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토의하는 내용이다. 서로 돕는다는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서로 도울 필요가 없는 세상을 꿈꾼다. 세상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도와야 할 필요가 생기고, 돕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폭력이라고... 사실 모르는 사람을 돕는 것은 위험성이 상존한다. 만일 어떤 사람을 도왔는데 이 사람이 살인마가 되어 다른 사람을 해친다면, 이 도움은 옳은 것인가? 내가 그 사람을 돕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일은 없었을텐데...

 

<예라고 하는 사람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 동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참신하다.  병든 동네 사람들을 위해 함께 먼 곳에 있는 의사를 찾아 가는 일행의 이야기이다. 일행중 한 사람이 아프게 된다. 이 사람을 데리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도 어렵다. 관습에 따르면 이 사람을 내버려두고 가야한다. 그리고 아픈 사람은 이러한 조처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가지 길이 있다.

 

첫째,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황이 변하지는 않겠지만,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 자체가 필요하다. 또한 당사자는 동의하기 싫더라도 일반적인 관습에 의해 동의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된다.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내 놓아야 한다.

 

둘째, <아니오라고 하는 사람>에서는 그와는 다른 상황이다.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물론 필요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해야만 한다는 전통이나 관습에 반기를 든다.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관습에 의해 행동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한다. 즉 아니오라고 말함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극 중에서 아픈 사람은 자신이 죽도록 버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일행들은 이 사람의 부동의에 동의하여 아픈 사람을 데리고 마을로 돌아간다. 새로운 행동 양식이 시작된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가? 어느 것이 바람직한가?

 

<조처>중국의 공산화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선동가들과 동행하는 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인정을 베푸는 바람에 공산화 작업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된다. 그가 죽어야만 공산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죽음에 동의한다.

 

이러한 동의에 의한 죽음은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겠다. 비인간적이다. 하지만 조직과 사회 즉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만 한다면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대이고 무엇이 소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대'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도 어떤 인식의 테두리내의 일이라면, 다른 인식의 틀을 기준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아니면 그 인식의 틀을 거두어내버리면, 그래도 그것이 '대'일까?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다 상대적일 뿐이다. 이 희곡에서 처럼 공산화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한, 그 틀에서 결정된 것이 절대적인 선 또는 '대'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절대적인 것일까? 그 무엇이 있기는 있을텐데...

 

브레히트의 희곡을 읽고 생각하게 된 점들이 있다고 해도, 희곡의 낯섬은 가시지 않는다. 단 상연할 연극의 시나리오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묘사에 있어 소설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한계내에서 그 한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는 시도,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도 같은 노력이 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 놀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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