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세계 3대 허무명소중에 트로이를 포함시킵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공주상, 벨기에 브뤼셀의 상징 오줌싸개 동상과 함께 트로이는 그 명성에 비해 볼 것이 전혀, 아니 거의 없는 명소라 하여 세계 3대 허무명소라고 불린답니다.

 

그러나 <트로이>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화려함을 이야기한다면 트로이는 에페수스에 미칠 수 없습니다. 에페수스에서는 웅장하기도 하고, 정교하기도 한 유적들이 화려한 고대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트로이에서는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유적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고, 오히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돌들과 땅속에 파묻힌 성벽의 흔적들이 쓸쓸히 트로이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트로이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메로스는 그 장대한 이야기를 <일리아스>에 풀어 놓습니다. 오랫동안 신화속으로, 문학속으로, 명화속으로 파고 들어가 여러가지 형태로 회자되어 온 그 이야기의 절대적 힘 앞에서 관광객들 각자의 머리 속에 수천 수만의 트로이를 매일 새롭게 숨쉬게 만들고 있습니다. 트로이의 적막함과 황폐함은 오히려 상상을 더욱 자극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로이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아래는 트로이 입구에 만들어 놓은 목마입니다.

 

 

 

 

트로이에서는 유적이라는 말보다는 흔적이 더 알맞은 것 같습니다. 

 

 

 

고대 트로이 시대에는 저 넓다랗게 펼쳐진 평원이 존재하지 않았고, 바다가 트로이 성 가까이 위치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화산활동으로 밀려든 토사들이 바다를 저 멀리 밀어내 버렸습니다. 수백척의 그리스 전함들이 바다를 메운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봅니다. 저 평원에서 일전을 벌이던 그리스 병사과 트로이 병사들의 아우성이 귀가에 들리는 듯 합니다.   

 

 

 

트로이로 오는 도중 버스에서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를 보았던 느낌이 쓸쓸한 트로이의 흔적과 어울려 상상을 자극합니다. 아킬레우스(브래드피트)와 헥토르(에릭바나)의 전투장면은 대단하였습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를 패배시킵니다.  

 

 

 

트로이의 영웅이며 명장인 헥토르는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직감하면서도 명예롭게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에 나섭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두고서, 존경하는 아버지 프리아모스왕과 트로이 성을 뒤에 남겨두고 결연히 아킬레우스에 맞서는 헥토르는 영화 <트로이>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트로이는 전략적 요충지 및 무역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었기에, 트로이는 시대를 달리해서 같은 장소에 반복적으로 도시가 건설되었습니다. 트로이는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9층으로 이루어진 복합 유적지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이 되었던 트로이 전쟁은 기원전 1260~1250년 사이에 있었던 전쟁으로 추정되며 트로이 제7기에 있었던 사건이라 합니다. 

 

트로이는 여러 시대의 유적들이 층층이 쌓이 복합 유적이라 처음 찾는 관광객들은 뭐가 뭔지 알쏭달쏭하기만 합니다. 안내 표지판에는 그 유적이 몇 기에 속하는지를 밝혀줍니다.

 

 

 

 

 

 

 

 

 

 

아래의 유적은 트로이 유적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폐허가 된 아래의 층 위에 새로운 트로이가 건설되었음을 보여주는 층층 구조가 눈에 띕니다. 

 

 

 

 

그리스의 맹인 음유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 1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입니다. '일리아스'는 "일리오스의 이야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일리오스'는 트로이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일리아스>는 '트로이 이야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라고 말할 때의 '일리아드'는 그리스어 '일리아스'를 영어로 옮긴 말입니다. 그래서 호메로스의 작품은 그리스어로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영어로는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아>라고 부릅니다.

 

오랫동안 학자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신화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실리이만이라는 소년은 <일리아스>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실리이만은 성장하여 그의 꿈을 이룹니다. 트로이가 실제 존재했던 도시라는 것을 발굴을 통해 증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리이만은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트로이를 발견하려는 꿈을 가진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를 발견하려는 열망이 지나친 나머지, 무리하게 발굴을 진행함으로 수많은 트로이의 유적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조심스럽게 하나 하나 찾아 나가는 방법을 썼다면 더 많은 트로이의 유적을 발굴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는 수직으로 파내려가는 수직발굴을 감행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실리이만은 발굴 당시의 터키와의 약속을 어기고 발굴품들을 빼돌려 터키사람들로 부터 원성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도굴꾼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트로이를 발견한 그의 공로는 무시할 수 없었기에 고고학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문학작품은 물론이거니와 트로이를 소재로 명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음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세 여신 -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장면을 묘사한 루벤스의 명작 '파리스의 심판'입니다. 전쟁의 여신 아테나 뒤로 방패와 갑옷이 보입니다. 공작새를 데리고 있는 여신은 헤라입니다. 공작새는 헤라의 상징이기도 하죠. 그리고 가운데에는 아프로디테가 있습니다. 황금사과를 오른손에 쥐고 있는 파리스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미의 여신들이 벌거벗은 채 파리스의 심판을 기다리게 되었을까요? 누가 황금사과의 주인이 될까요?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질투의 여신 에리스가 복수심에 불타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구를 새긴 황금 사과를 두고 갑니다. 그로 인해 서로 자기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이라고 다툼이 벌어집니다. 여신들의 후환이 두려웠던 제우스는 이 판정을 파리스에게로 미루어버립니다.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합니다. 그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나입니다. 파리스가 헬레나를 데리고 트로이로 도망쳐 버리자, 화가 머리 꼭지까지 돈 메넬라오스는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트로이를 공격하나 10년이 넘도록 트로이를 함락시키지 못합니다. 마침내 오디세이왕의 계략에 의해 트로이는 함락되고 불타 버립니다. 그 계략이 잘 알려진 목마의 계략입니다.

 

이 트로이의 멸망을 살아남은 트로이인들이 로마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테티스 여신의 아들이 아킬레우스라고 하니, 신화와 역사가 맞물려 돌아가는 카오스적 질서를 보고 있는 듯 합니다.  

 

트로이는 3대허무명소중의 하나라 하지만 그 무엇도 비견할 수 없는 상상의 여행을 가능하게합니다. 지금은 멀리 뒷걸음쳐 넓다란 평지 너머로 보이는 해안가가 바로 성벽 가까이 물결치고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과 이 널찍한 평원에서 격돌했을 트로이와 그리스의 전투를 상상하는 묘한 모순에 빠지기고 합니다.

 

수많은 이야기를 남긴 트로이, 말 없이 쓸쓸히 그 흔적만이 초목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옛 시대의 영광은 전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쓸쓸함만이 그 곳을 지나치는 나그네의 상상력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트로이를 느끼고 나니, 무너진 절터에서 옛 향기를 찾는 사람과 폐허가 된 궁터에서 옛영광과 함께 사라진 비애를 슬퍼하는 시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나 알 것 같습니다. 부여를 찾아 옛 백제를 느끼는 그들처럼.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생각의 나무

 

율리시스

 

뉴욕타임지 선정 100권중의 하나. 율리시스는 20세기 문학의 이정표인 동시에, 현대 세계 소설사의 한 분수령이며,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와 함께 가장 혁신적이며 창의적인 노력을 대표하는 수작이다. 오늘날 이 작품은 20세기 최대의 문제작인 동시에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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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1904년 6월 16일 하루동안 레오폴드 블룸과 스티븐 데덜러스에게 일어난 일들을 중심으로 사건들이 전개된다. 스티븐은 초등학교에서 시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의 일을 그만두고 예술가의 삶을 꿈꾸는 젊은이이다. 그리고 레오폴드 불룸은 신문사의 광고 영업원이다. 블룸은 아침에 친구 디그넘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나가면서 우연히 아내 몰리가 그 날 오후 다른 남자와의 밀회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블룸은 스티븐과 여러번 이리 저리 엇갈리면서 더블린 시를 방랑하다가 그날 저녁 늦게 홍등가에서 낭패에 처한 스티븐을 도와준다. 그리고 밤 늦게 스티븐을 데리고 집으로 귀환한다. 다음날 새벽까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스티븐은, 자고 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떠나가고 블룸은 밀회의 흔적이 있는 아내의 발치 침대에 거꾸로 누워 잠이든다. 언뜻 잠이 깬 몰리는 젊은 시절의 추억들로부터 현재에까지 이르는 장황한 회상에 잠긴다. 

 

<율리시스>의 배경이 되는 그 날 1904년 6월16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블룸즈데이(Bloomsday)'로 알려져 있다. '율리시스'는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의 라틴식 이름이다.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만들어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리스 장군이다. 그는 아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귀환하는 도중 수많은 난관들을 극복해야만 하였다. 블룸도 하루종일 더블린 시를 방황하여 결국 아내 몰리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이 작품에서 오디세우스는 블룸에, 몰리는 페넬로페에, 그리고 스티븐은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에 상응하는 구도로 나타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을 이해하면서 읽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읽기는 하나 무엇을 읽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한마디로 난해하다. 이 책이 미국에서 외설 시비에 휘말렸을 때 이를 변호하던 변호사는 이 책의 불가해성을 그의 논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의 텍스트의 불가해성은 몇가지 요인들에 기인한다.

첫째,  '의식의 흐름'을 표현한 그의 기법은 창의적이며 혁신적이다. 그리고 한 개인의 머리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연속적인 또는 비연속적인 생각들의 파편들은 그 생각의 주인공의 내면을 밝혀주는 귀중한 정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모두 논리적,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냥 그대로 읽어 나가는 것이 이 책을 즐기는 방법이 될 것이다.

 

둘째,  블룸은 알고 있지만 독자들은 알지 못하는 더블린 시의 수많은 소시민들이 사전 정보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들의 목소리들과 의식의 흐름이 함께 섞여서 복합적으로 서술되면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불확정성 상황이 전개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보조 설명을 먼저 읽고 익숙해진 후에 이 작품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먼저 읽고나서 <율리우스>에 도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율리우스>에 나오는 스티븐은 '젊은 에술가'인 조이스 자신의 모습이기때문이다.

 

세째, <율리우스>는 예술적 표절이 난무하는 뒤범벅 잡탕같은 느낌이 든다. 수많은 텍스트들에서 인용된 표현들, 은유들이 정신을 사납게 한다. 주석이 달린 책을 읽을 때 그런 느낌이 들 것이다. 주석이 없으면 그것이 인용인지 조이스의 표현인지를 가늠하기조차 힘들 수 있다. 가장 많이 인용 및 인유된 것은 <성서>이며, 그 밖에 그 당시 아일랜드의 문학, 가사등에서 수많은 표현들이 '표절'되었다. 어떤 비평가는 말하기를 '율리시스는 읽는 독자에게는 그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탐구하는 독자들에게만 그 진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하였다. 

 

<율리시스>를 읽으면서 조이스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몇가지 점들도 있다. 먼저 다방면에 대한 그의 엄청난 지식들 - 신학, 역사, 언어, 과학, 예술, 의학 - 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 도덕적 검열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거침없는 표현력도 대단하다. 마음대로 써 내려간 듯하나, 사실은 치밀하게 계획된 상황들, 스티븐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는 이야기의 배경이 어느듯 블룸의 이야기의 전경이 되고,  이렇듯 배경과 전경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 교차하는 소설적 기법은 입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같은 상황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술하는 방식들이 발견되는데 , 이러한 서술의 원형이 바로 <율리시스>인가?

 

결론은? 이 소설은 일반인을 위한 것은 아닌듯하다. 하지만 소설지망가들은 이 소설의 형식이나 표현등을 탐구함으로 글을 쓰는데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연구자들은 이 텍스트에서 엄청난 연구의 보고를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 평범한 독자들은 이 대작을 한 번 읽어 봤다는 만족감에 만족해야 할 듯하다. 나 역시 이해불가한 이 책, 1300여페이지에 달하는 이 작품을 읽고, 다 읽었다는 뿌듯함을 가지고 나의 사투에 자찬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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