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9장  무몬과 괴델

 

서양 지성인들의 동양종교에의 심취는 무슨 까닭일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 나타난 종교사상을 호프스태터의 이 책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무몬은 참선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13세기에 48개의 선문답집을 썼다. 선문답(공안)의 전형적인 요소는 이율배반이다. "논리의 본질을 분쇄하려는"시도가 모든 선문답에 드러나 있다. 참선의 목표는 논리를 분쇄시킴으로 혼동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를 혼동의 상태에 있게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논리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참선의 목표인 것이다. 그 이론에 따르면 논리로부터 벗어날 경우에만 깨우침으로 도약할 수 있다

 

깨우침을 가장 정확히 요약하자면 '초월적 이원론'이다. 인간의 지각은 그 본질에 있어 이원론적이다. 인간의 지각은 세계를 개념적으로나 지각적으로 상이한 범주로 분할한다. 낱말의 사용은 아주 분명하게 개념적인 범주를 표상하기때문에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이다. 따라서 참선의 요체는 낱말에 대한 의존을 극복하려는 투쟁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우침의 적은 논리라기 보다는 언어적 사고 속에 들어 있는 이원론적 사고이며 지각이다. 지각은 우리를 대상과 그 밖의 세계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세계를 인위적으로 여러 부분으로 쪼개며, 그로 인해 진정한 길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주인공인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그의 친구 고빈다가 깨달은 것이 바로 이러한 이원론의 초월이셈이다. 싯다르타는 그의 친구 고빈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고빈다도 모든 세계가 일체로 이루어졌음 - 심지어 선과 악도 일체임을 깨닫게 된다. 금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인정받는 비트겐슈타인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은 참선이 표방하는 언어로는 진리를 나타낼 수 없다는 사상과 맥이 닿는 것 같다. 에셔의 목판화 "베르붐"이라는 작품에서는 대립들이 다양한 층위의 통일체로 묶인다. 그리고 "세개의 공"이라는 석판을 보면, 세계의 각 부분이 각기 다른 부분을 포함하고, 또 모든 다른 부분들에 거꾸로 포함된 것 처럼 보이는 모습이 있다. 이것은 불교의 우화 "인드라의 그물"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MU는 정리의 본성을 가지는가, 아닌가?

호프스태터는 MIU-체계에 괴델수를 부여함으로 310-체계와 같은 숫자로 이루어진 체계로의 변환을 보여준다. 이렇게 괴델의 방법론을 통해  임의의 형식체계에 그와 동형관계를 가지는 일련의 산술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결론은 모든 형식체계의 연구에 수론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활자형 규칙의 집합이 정리들을 재귀순환적으로 생성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산술 규칙을 반복적용함으로 그에 상응하는 자연수의 집합을 만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를 "가산수"라고 하는데, 이 "가산수"는 수론에서 형식체계의 정리들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면 "비가산수"도 재귀순환적으로 연산될 수 있는 지, 비가산수들은 공통적인 산술적 속성을 가지는 지 궁금해 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TNT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

 

즉 'MU는 MIU-체계의 정리인가?' 은 310-체계를 통해 "30은 MIU-수인가?"라는 말로 변환될 수 있다.

그리고 "30은 MIU-수이다"라는 명제를 또 다시 TNT-표기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렇게 얻어진 TNT 연쇄체를 MUMON이란 부르면...

"MUMON은 TNT의 정리인가?"라는 질문이 "MU는 MIU-체계의 정리인가?"하는 문제와 동형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우리는 "MU는 MIU-체계의 정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얻기 위해(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MIU-체계내에서의 기계적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다만 그 형식체계를 벗어난 상태에서 지능적인 방법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비교적 짧은 연쇄체(MU)을 또 다른 기괴한 연쇄체(MUNON)으로, 그리고 간단한 형식체계(MIU-체계)를 더 복잡한 형식체계(TNT)로 대체한 것이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사실과 관련이 된다.

1) "MU는 정리이다"와 같은 명제들은 괴델의 동형관계를 거쳐서 수론으로 코드화될 수 있다.

2) 수론의 명제들은 TNT로 번역될 수 있다.

 

이제 TNT 자체에 괴델 수를 부여하고 그 추론 규칙을 "산술화"한다. ...블라블라....이하는 이해불가...

 

G의 존재가 TNT의 불완전성을 야기한다.

G는 TNT의 정리인가, 아인가?

TNT는 추론적 사고의 유효한 방법이고, 따라서 TNT 자체는 결코 정리에 대한 거짓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일상적인 전제를 해 보자. 달리 말하자면, TNT의 정리인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를 표현한다. 그래서 G가 정리라면, 그것은 하나의 진리, 즉 "G는 정리가 아니다"를 표현할 것이다. 이 재귀준거의 힘이 여기서 아죽 극적으로 발휘된다. 하나의 정리이기 위하여, G는 거짓이어야 할 것이다. TNT가 결코 정리에 대한 거짓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전제에 기대어 볼 때, 우리는 G는 정리가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그런대로 괜찮지만, 작은 문제가 하나 남는다. G가 정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G가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시인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TNT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참인 명제를 나타내지만 정리는 아닌 연쇄체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우리는 G 또한 그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주는 산술적 해석을 가진다는 사실의 단서를 놓쳐서는 안된다.

'TNT의 연쇄체는 발견되었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수의 일정한 산술적 속성에 대한 명제를 표현한다. 더욱이 그 체계의 외부에서 추론한다면, 그 명제가 참인지뿐만 아니라 그 연쇄체가 TNT의 정리가 아니라는 것 또한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TNT에게 그 명제가 참인지를 묻는다면, TNT는 긍정할 수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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