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델,에셔,바흐- 영원한 황금 노끈

 

제7장  명제계산

 

이전에 MIU체계, pq-체계, tq-체계등이 논의되었었다. 이번 장에서는 명제계산이라는 형식체계가 등장한다.

호프스태터는 왜 명제체계을 도입하는가? 이 체계로 부터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가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8장에서 다룰 TNT체계의 중요한 요소이기때문이기도 하다. TNT체계는 호프스태터가 소개하는 마지막 형식체계이다. 그 형식체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그렇다면 명제계산이라는 체계로 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인공지능을 위한 귀중한 요소, 이상한 고리는 무엇인가?

다음의 말에 유의해 보면,  <명제계산에서는 모든 과정이 전적으로 활자로만 이루어진다. 그 누구도 "그 안에서" 그 연쇄체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기계적으로, 아무 사고도 동반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지어는 우둔하게 진행된다.>

 

이 언급은 명제계산의 기계적 특성을 잘 묘사한다. 이것은 지능적 특성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형식체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몇가지 특징들은 인공지능 문제에 대한 뭔가 중요한 요소들을 생각해 보도록 한다. 그것은 층위개념이다. 지능이란 체계 그 자체를 생각하고 논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형식을 그 외부에서 바라보며 그 형식체계를 논할 수 있는 것이 지능의 특성이라 볼 때, 한 형식체계의 상위 층위 개념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호프스태터는 명제계산의 한계 내지는 모순성을 지적함으로 상위체계 즉 메타체계와의 상호작용의 필요성을 보여주려는 의도인 듯 하다. 다음 호프스태터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에서 그 점을 추리해 볼 수 있겠다. 

 

<이 작은 논쟁은 논리와 추론적 사유가 스스로를 변호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우리는 절벽에 도달한다. 즉 "나는 내가 옳다고 봐"라고 큰 소리를 치는 것 외에는 어떤 방어수단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추론적 사고의 패턴을 영원히 변호할 수는 없다. 믿음이 그것을 대신하는 시점이 온다... 우리는 어떤 증거가 한 체계 안에서 옳다는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증거는 결코 댈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증거의 증거 또는 증거의 증거의 증거 등을 댈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맨 바깥의 체계 증거의 타당성은, 믿을 수는 있지만 증명되지 않은 가정에 머무른다.>   

 

....러셀의 역설이 수학을 확고한 반석위에 건축하려는 시도가 무모함을 일깨워 준 이후에도 힐베르트를 비롯한 일단의 수학자들은 수학의 완전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러셀은 그 자신의 이름을 딴 역설을 극복하려는 여러 노력으로 상위 층위 개념을 생각해 냈지만 이 역시 수학을 확고한 기반위에 세워 놓기에는 역부족임을 깨닫는다. 더 나아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힐베르트를 비롯한 실증주의 수학에 마지막 결정타를 가하고 만다. 결국 완벽한 학문의 위치에 있던 수학 조차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어 버렸던 것이다.

 

<명제계산은 어떤 점에서 추론적 사고와 매우 비슷하다. 그러나 명제계산의 규칙들을 인간의 사고규칙들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순적인 사고를 야기한 자신의 추론적 사고의 믿음과 방식들을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모순을 야기했으리라고 보이는 자신의 내부의 체계들로부터 가능한 벗어나서 그것을 수리하고자 할 것이다.>

 

<실제로 모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보와 발전의 주요 원천이며, 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전에 수학자들은 모순을 찾았을 때 그 즉시 모순을 야기한 체계들을 확인하여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서 그 체계를 개선하려고 했다. 모순의 발견과 수리는 수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신앙에서도 이러한 모순의 발견고 그로 인한 체계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할 수 있을까? 신에 대한 신앙을 완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완전을 가정한 체계내에서 모순이 발견된다는 것은 당황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논리 자체의 불완전성과 우리 자체 지식의 불완전성으로 볼 때, 모순이 아닌 것이 모순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데카르트는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관성을 명석한 이성으로 볼 수 있었다. 우리 지구상의 환경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현상, 모순이 되는 현상이 관성인데, 이 한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환경 즉 아무런 힘의 영향도 받지 않는 환경을 가정했을 때 비로소 명확히 드러나는 관성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형식체계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불가능한 상황을 가정하는 지능의 한 요소로서 가능하게 된 것은 아닌가? 그야말로 호프스태터의 말처럼 언젠가 믿음이 필요한 때가 닥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 적절한 (그와 같은 모순)은 바로 이 순간 다루고 있는 모순, 즉 우리가 실제로 생각하는 방식과 명제계산이 우리를 흉내내는 방식 사이의 괴리이다. 이것은 수 많은 논리학자들을 괴롭힌 원인이었기 때문에, 명제계산이 우둔하거나 경직되지 않도록 많은 창조적인 노력이 경주되었다....더욱 극단적인 시도들은 완전성이나 무오류성에 대한 요구를 묵살하며, 그 모든 비정합성을 가지고서 인간의 추론적인 사고를 모방하고자 한다. 그런 연구들은 이제 더 이상 수학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히 말해서오로지 인간의 사고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

 

...지능의 또 한가지 특징은 논리의 한계를 벗어난 비정합성이라...??? 인간의 사고 과정은 결코 수학적이지 않다. 그 독특한 사고과정을 어떻게 흉내낼 것인지 인공 지능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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