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길리스피

 

제3장 새로운 철학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17세기 과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공허한 철학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베이컨과 의견을 같이하나,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 베이컨은 유용성에 기대고 있고, 데카르트는 명석함에 의거하여 과학의 재건을 꾀한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실험과 귀납을 신뢰한 경험주의라면, 데카르트는 이성과 연역을 신뢰한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관성의 이해에 있어 데카르트는 갈릴레오를 초월한다. 갈릴레오는 영속적인 원운동이야 말로 완전한 것이라 생각했다. 데카르트는 원에서 벗어나 무한으로 그 운동의 방향을 돌렸다. 즉 완전한 관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1) 어떤 물체도 가능한 한 동일 상태를 유지하려 하며, 그 상태는 다른 물체와의 충돌에 의해서만 바뀐다. 2) 어떤 물체도 그 운동을 곡선이 아니라 직선으로 계속하려고 한다. 이러한 직선관성의 원리는 무한의 우주상을 끌어들인다. 코이레는 우주의 무한성이야말로 다른 어떤 과학의 발전보다도 깊게 철학의 방위를 바꾼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뉴턴은 관성의 원리에서 운동의 법칙을 만들어 낸다.

 

이 관성의 개념은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다. 그래서 물리적 현상보다는 자기의 사고를 더 크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정식화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데카르트는 적절한 사람이었다. 데카르트에게는 오직 명석함, 어떤 결과가 나와도 무관심한 일종의 놀랄 만한 일관성만이 있었을 뿐이다. "눈뜨고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우리는 이성의 명증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리의 이성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지, 상상력이나 감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관성의 발견은 실제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 즉 무한까지의 불변의 운동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한 후에 얻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가 물리학에 끼친 유산은, 수학적 무기인 해석기하학, 합리적 광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굴절 법칙이 있으며, 물리학을 유클리드적 공간 개념 속에 자리잡게 한 것도 포함된다. 또한 유기체적 목적성을 기계의 비인격성으로 대체하여 전 자연을 포괄하는 질서의 모델로 삼은 것도 그렇다. 하지만 그는 명석함과 단순함이라는 미덕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형이상학으로 아주 잘못된 물리학을 만들어 내기까지 하였다.

 

방법서설에 나타난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말에 나타나 있다. "철학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럴 듯하게 이야기하며, 학식이 자기만 못한 사람들의 찬탄을 사게 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리고 수학에 대한 그의 찬탄은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은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때문이었다."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데카르트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부터 학문의 개조에 착수했는데, 그는 직선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존재들 사이의 관계나 비례등을 두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에 놓고 연구하는 직각좌표의 개념을 생각해냈다. 이렇게 그는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가 된다. 이것은 좌표와 대수학을 결합시킨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그래프와 방정식, 함수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전의 대수학은 불연속적인 양의 수학이었고, 기하학은 공간적 연속의 수학이었다. 자연의 구성성분을 수량화하려는 경향의 대수학과 자연의 통일을 꾀하는 기하학 사이의 괴리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데카르트가 이 간격을 없애버렸지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뉴턴은 이 두가지 수학상을 종합하였다.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공간 개념과 구체적이고 원자론적인 물질개념을 통합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세계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즉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비어있는 공간 개념이 아니라 물질로 가득차 있는 공간 개념을 가지게 된다. 공간은 곧 물질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그는 세계는 하나의 기계이다라는 사상까지 오게된다. 데카르트가 세계에 대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 데카르트는 자연이 아니라 이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사상은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수학은 도구이며 양을 표현하는 수단이고, 과학의 언어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언어와 주제를 혼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일한 일반화를 가지고 행위와 원인을 일거에 설명하려 한다. 모든 것을 그리고 그 원인과 함께 단일한 일반화로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계론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느  하나의 명석하고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르네상스 과학은 주로 문화와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문화와 철학은 주로 과학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의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서 있다. 그로부터 자연에 관한 지식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아갔다. 과학은 법칙의 균일성만을 가정할 뿐 진리의 통일, 우주 인격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직접 과학에 총괄적인 공헌을 한 최후의 위대한 체계적 철학자였다.

 

우주란 기하학적 물리학에서 묘사된 단일한 연속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불연속체-맥스웰의 정의에 따르면 "두 개로 나눠질 수 없는"물체인 원자-의 덩어리인가? 버트란트 러셀이 말한 것처럼 세계는 당밀이 든 양동이인가, 모래가 든 통인가?

 

아인쉬타인이나 데카르트와 같이 수학적인 인물이라면, 자연의 통일성을 가하학의 언어로 나타낼 것이다. 공간-물질은 연장에서나 분할에서나 모두 무한하다. 그러나 물리적 직관을 가진 탐구자라면, 측정의 명확한 조건, 즉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원리적으로는 그곳으로 과학이 내려와야할 계량 가능한 것을 찾을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경험 전체는 기묘한 패러독스를 확증한다. 연장에 있어서는 무한을 요청하면서도, 분활에 있어서는 무한을 배제한다는 것이 물리학이 거듭헤서 보였던 뛰어난 지혜였다. 사물의 논리에는 이에 대한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

 

원자론

고대 원자론 학파에서는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가 있다. 이 고대 원자론자드릉ㄴ 무한한 연장을 가진 진공 속에다 입자를 넣었고, 그럼으로써 물질이 보존되는 우주에서 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물체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과 말한다. 변화와 진행은 객관적 존재를 갖는 특정 크기와 형태를 지닌 입자의 물리적 재배열 그것이다.

 

이러한 원자론을 철학에 받아들인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원자론은 목적론을 배제하는 객관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결코 도덕적 권위의 환영을 받을 수 없었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자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않고 신들의 도움없이 우주를 운행시킨다"라고 말한다. 그리스 과학의 다양한 유파중에서 원자론자들만이 인간의 사고와 목적으로 부터 법칙을 분리했다. 그들의 자연관은 신학과는 완전히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는 훈련된 안정된 취미이고 세상을 마음 내키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관의 창을 통하여 실제 있는 그대로 살펴보는 용기에 찬 체념이다. 감각을 통해서 에피쿠로스적 진리에 접촉한다.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원자들의 배열로, 원자들의 우연한 집합이다. 우리가 감지하고 판단하는 물질의 제 2성질- 색, 냄새, 맛, 형, 감촉-은 우리속에 있는 지각의 양식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각은 원자연의 모습, 자연의 영광과 미를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의 범주들은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지성도 단순한 미립자의 배열에 불과하다.

 

17세기에 들어 피에르 가상디(1592~1655)에 의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과학사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17세기 두뇌만이 아니라 손으로도 과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원자론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원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원자가 놓여있다고 가정되는 진공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원리를 논박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진공의 발견

갈릴레오의 탁월한 제자인 토리첼리(1608~1647)은 수은 기압계를 발명한다. 토리첼리는 수은을 사용하여 위끝이 막힌 수직관 속의 액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는 수은이 그것을 담은 그릇으로 떨어져서 보통 30인치가 되었을 때 관 위쪽에 남는 빈 공간의 의미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이 진공공간이다. 그는 진공을 만들 때 받는 저항은 진공혐오의 원리가 아니라 공기의 무게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기의 대양의 밑바닥에 살고 있으며, 이 공기는 무게가 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

 

파스칼은 1648년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내려간다고 하는 유명한 실험을 실증하여 온 유럽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혐오라고 되어 있는 현상은 모두 공기의 무게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참된 원인을 간파하지 못할 때, 그들은 교묘하게 가상적 원인을 만들고 여기에다 특수한 이름을 붙여서 이성이 아니라 그 귀를 만족시킨다."

 

실험 물리학은 로버트 보일(1621~1691)과 함께 본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진공에 존재에 관한 토리첼리와 파스칼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공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연기가 흩어지는 것, 새 털이 총알처럼 낙하하는 것, 그 속에 20일동안 쥐를 넣어 두면 죽는 것등을 증명했다. 보일은 화학자라기보다는 그 자신이 희망했던 바인 원자물리학자라고 간주애햐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공을 뛰어넘어 또는 진공 속으로 들어가서 원자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진공보다는 펌프의 작용과 공기의 반응 즉 "탄성"에 흥미가 있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들을 "입자 철학"의 자료로 삼을 생각으로 계획했다. 보일은 공기가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원자 모형은 그 현상을 "알기 쉽게"한다고 말한다. 보일은 입자 철학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중요한 물리학자였다.

 

기계론 철학자는 모든 변화를 "두 개의 가장 종합적인 원리-물질과 운동"으로 돌린다. 말하자면 변화는 객관적 세계의 여러 부분들의 재배치다. 만약 과학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은 혼돈으로 화하고, 세계는 (나중에 괴테가 원했듯이) 측정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에 의해서 통찰해야 할 것이 된다. 파우스트는 지식과 권력에의 지름길을 과학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술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  

보일의 과학은 상식의 과학이었다. 보일의 입자설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하나의 생각, 즉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을 발견했지만, 기체의 화학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했기때문이다. 백년이 더 지나서 돌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입자철학"은 수로 표현된 적극적 의미를 갖게 된다.

 

실험에의 열의

베이컨의 실험주의는 보일과 영국의 왕립학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베이컨의 영감이 보일에게 작용하여 원자 물리학을 진공으로부터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또한 "베이컨의 문장만큼 <왕립학회의 역사>의 서문으로 어울리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고 스프랫주교는 말했다. 베이컨은 개념을 가지고 질서를 수립하려는 추상적인 사상에 비하면 실험은 쉬운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에게 천하게 보인 것은 실제로 실험하여 얻은 몇 조각을 가지고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겸양이었을 것이다.

 

실험가들은 과학의 장인이었다. 수학은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실험적 방법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즉 데카르트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탐구하는 실험가들에 의햐여 재표현되어야 한다.

베이컨은 다소 천박한 반지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과학자들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의 축적과 분류로써 얻은 질서를 추상과 수학 공식에 의하여 얻어진 질서와 대립시키지 않았기때문이다.

 

과학의 사회성

베이컨의 예언대로 과학은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필요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발전시킨다. 역사적으로 두개의 탁월한 과학단체가 있다. 런던 왕립학회(1662)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이다. 최초로 과학적 목적을 가진 것은 1603년 로마에서 탄생한 린체이 아카데미였다.1657년 창설된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델 치멘토는 계획연구의 산실이었다. 여기에서는 대기압, 온도측정, 압력측정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실험 기구의 고안이 아마 그들의 가장 뛰어난 공헌일 것이다. 그들은 결빙현상이 일정한 온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의 지식인들은 장소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살롱을 형성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적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지방의 동료와는 서신에 의존했다. 이 그룹의 중심인 메르센느(1588-1648)신부는 과학의 가십을 전하는 사람으로 "학계의 우편함"으로 유명했다.

 

영국의 왕립학회와 프랑스의 왕립과학아카데미의 성격의 차이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베이컨의 새 아틀란티스의 상보다는 프랑스풍의 국가 통제적 전통에서 구상된 것었다. 그것은 왕립학회와는 달리 프랑스 공업의기술적 감독과 개량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재촉받는 일은 거의 없었고, 회원들은 와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영예를 누렸다. 왕립학회의 정직한 아무추어 기질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왕립학회는 흥미있는 개인적 기획을 넘어서 특별히 자격을 까다롭게 심사하는 일은 없었다. 과학 아카데미의 자리는 제한되어 있었다.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과학이 좀 더 전문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루이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성숙한 과학자들은 데카르트나 파스칼 세대에 비하면 훨씬 빈약했고, 뉴턴 시대에 왕립학회에 모여들었던 영국의 천재들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18세기 계몽사조나 나올 때에야 비로소 그 우위가 드러나 보인다.

 

17세기 과학 대중의 요구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으로 성립되어 과학의 경향과 양식을 창조한 것은 왕립학회였다. 과학 대중이 없었더라면 사회적 활력으로 되기에는 너무 세련된 수준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후계자 및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고상한 개념이 교환되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왕립학회는 성실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려하고, 경건, 학문, 인간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토론을 거듭했던 데서 유래했다. 보일은 크롬웰 통치하의 그들의 모임을 "보이지 않는 컬리지"라고 불렀다. 보일은 19세때 왕립학회의 거장들과 교제를 맺게 되었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윌킨스는 1648년 새로운 역학과 우주론을 다룬 저작을 출판한다. 그는 놀랄만한 통찰력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의 수학화와 베이컨의 과학의 사회화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윌킨스가 과학의 성과중의 하나로서 의견교환이 아니라 사물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언어"의 고안인데, 이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항구적인 조직을 세우고자 국왕의 은혜를 구했다. 1662년 예비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자연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재가를 받았다. 학회의 <철학회보>가 1665년 창간되어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학술지가 되었다. "왕립"이라는 칭호는 국왕의 관용을 표시할 뿐, 지원은 없었다. 왕립학회는 영국시의 자발적인 단체로, 대륙에서라면 공영 기관이 되엇을 것에 민영 사업이 손을 뻗힌 것이다. 거기에는 공공심 있는 후견인과 보일, 로버트 후크, 에드먼드 핼리 등 자기 실험실이나 재정 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은 학회의 실험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향상"에 실제로 종사한 사람들이 제휴했다. 이리하여 왕립학회는 왕정복고 하의 협동적인 문화 운동을 체현하였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 -계몽사조의 기독교에 대한 적의와는 달랐다.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가 종교의 에토스로부터 과학의 에토스로 이행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생애는 청교도 윤리가 과학과 정치라는 세속적 활동으로 돌려진 예로서, 미국인을 고무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보일에 있어서 이 윤리는 세속화될 것까지도 없었다. 그의 지극히 영국적인 자연신학은 고도의 성실성에 따르는 그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신의 없으로서의 자연이라고 하는 증거 위에 안주해 있었다.

 

칼빈주의자의 행동 양식인 전통에의 적의, 공리주의, 타산적 자기 부정, 세상일에 대한 소명, 합리성, 경험의 개인적 해석등은 서구 문화사의 일반적 특색이다. 프로테스탄트와 시민 계급의 환경은 재능있는 자나 야심 있는 자를 격려하여 과학을 높여왔다. 반면에 가톨릭과 귀족적 환경은 과학자의 발전을 저해했다. 스코틀랜드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의 역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아일랜드인과 스페인인은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 그러나 이 영향들은 사회적인 것이지 교의적인 것이 아니다. 최근 미국 과학자의 출신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 중서부의 특정 종파와 관계있는 소규모 대학 출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귀족주의의 망령이 남아 있는 남부나 졸업생들이 보통 법률, 외교, 정치 분야로 진출하는 아이비리그 출신이 아니라, 옥수수지대 출신인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과학자들은 고립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으로 부터 이렇게 동떨어진 견해는 없다. 어는 인문학자는 '그의 과학자 동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집단을 이루고 샘이 날 정도의 연구비에 힘입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며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훌륭한 결과를 맺는 토론을 하기에는 하등의 방해도 안 될 것 같은 집회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과학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공통의 이해>에서 과학 안에서 살고 과학 안에서 존재하는 참된 공동체를 감동깊게 고찰한다. 이것이 왕립학회가 발족했을 때부터 성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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