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제2장 예술과 생명의 실험/ 해부학 및 베이컨 주의/찰스 길리피스 지음

 

17세기 천재들은 자연주의, 경험주의, 베이컨주의등을 과학의 기초로 사용하였다. 자연주의는 과학의 주요 요소가 되기 전에 이미 예술의 표현 양식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경험주의는 물리학보다 생명의 과학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여지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항해자, 기술자, 장인 등의 기술적 성취는 베이컨주의의 배경을 이루었다. 베이컨주의는 과학을 개념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귀납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학문으로 만들었으며, 자연의 힘을 조종할 능력은 자연을 이해한 보상으로 오는 것이라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연주의와 해부학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는 자연을 순수한 탐구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나타냈다. 그러한 태도는 자연으로부터 윤리나 교훈을 끌어내려는 경향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를 자연주의라 부를 수 있다. 또한 레오나르도의 정신은 자연에서 기하학적 형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려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입체기하학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과학일반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과학의 언어인 수학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던 그 당시의 과학은 서술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술적(묘사적) 과학은 사물을 관찰하여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3차원의 모습을 평면상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과학의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과학적 방법인 투시화법과 같은 방법들이 미술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한편 인체를 자연주의적(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르네상스의 취향은 인체 해부학 연구로 이끌었다. 

 

생명 과학의 발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1514~1564)는 르네상스 해부학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이 출판된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책은 인체의 멋진 목판화를 제공하고 있다. 과학과 미술이 자연주의 안에서 함께 어우러져 나타났다.

 

코페르니쿠스 이론은 인류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살리우스의 사상을 비롯한 다윈 이전의 어떠한 생물학자들의 연구도 인류의 세계관까지는 바꾸지 않았다. 물리과학의 경우 이론의 심화는 사실의 확장에 선행하는 반면, 생명과학의 발전 순서는 그와는 반대였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으로부터 하비의 혈액 순환의 실증에 이르기까지 사고의 움직임은 물리학사의 어떤 에피소드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흥미롭다. 하지만 그 업적에는 한계가 있다. 뉴턴은 중력이론으로 케플러의 행성 법칙과 갈릴레오의 역학을 통일하여 물리학의 전 문제가 망라된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수리 과학을 수립했다. 그러나 하비의 혈액 순환은 해부학과 생리학을 결합시킨 데 불과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나름대로 그 세계의 진리였다. 그의 분류학은 수백만의 생명 형태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물학은 기본 전제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그 기본 전제인 목적에 대한 고려, 기능에 대한 목적론적 분석은 다윈에 이르기까지 생물학을 지배하였다. 생물학은 물리학에 비해 볼 때 덜 급진적인 쪽이었다. 또한 생물학자들은 수리 분야의 학자들보다는 좀 더 인간적인 기질의 소유자들이었다. 수리 분야의 학자들이 추상적인 것, 정확한 것에 주목했다면 이들은 오히려 생명과 육체에 중점을 두었기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만큼 생명과학이 객관성을 지닌 과학으로 발전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베살리우스의 강의 및 강의내용이 수록된 책은 세가지 요소로 인해 성공을 거두었다. 권위있는 지식, 해설적 방법 그리고 조직적 접근. 베살리우스의 주요한 공헌은 어떤 단일한 세부사항이나 방법에서의 독창성보다, 오히려 이 세 요소를 짜 맞추어서 해부 실습의 체계를 세운는 종합적 수완에 있었다. 베살리우스 자신은 책을 통해서보다는 시체로 해부학을 배우는 것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렇듯 베살리우스가 일으킨 혁신은 실물 교습의 방법이었고, 이후 그것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기법이 되었다.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고도로 체계적인 저작이다. 베살리우스가 체계적으로 저술했다기 보다는 그의 연구 대상이었던 육체 자체가 체계적이었다. 그의 연구 구조는 대상(신체)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범적인 해부학 저술일 뿐 아니라, 모든 관련 사실이 질서 정연하고 자연으로부터 직접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과학의 역사상 최초의 저술이다. 거기에는 새로운 이론은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실이 거기에 있었다. 베살리우스 저술의 영향은 낡은 과학의 안정성을 무너뜨리게 되고 해부학 전체가 세심한 관찰과 독립적 사고방식에 의하여 재건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었다.

 

갈레노스의 낡은 이론

의학사에서 갈레노스의 위치는 물리학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위치에 비교할 수 있다. 갈레노스의 목적론은 사물의 목적에 관심을 가진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인 태도와 신이 모든 것을 완전히 계획하고 있다는 플라톤의 신비 사상이 결합된 것이었다.

 

갈레노스는 심장의 기능보다는 간장의 우월성을 지지하였다. 갈레노스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간장은 영양분을 위장으로부터 공급받고 영양분이 풍부한 피를 생산한다. 이 피는 심장의 팽창박동(수축이 아니라)에 의해 우심방으로 빨려들어가고, 심장이 수축할 때 일부는 폐로 가며, 나머지는 심장의 격막(좌심방과 우심방을 가르는 근육막)을 통해 좌심방으로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서 페정맥을 통해 운반된 공기와 섞여서 생명을 주는 유동체로 밝은 적색을 띠고 동맥속에서 밀려갔다 밀러오며 신체에서 물결친다. 여기서 갈레노스가 보기에 폐정맥은 혈관이 아니라 기관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간장에서 나온 정맥혈은 신체 중의 검은 자양분을 좀 더 서서히 운반한다. 갈레아노의 이론에는 혈액의 순환 개념을 찾아 볼 수가 없다.

 

갈레노스의 이론의 난점은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갈레노스는 심장의 주된 역할이 흡인이라고 보았지만, 사실 심장근육의 구조는 심장의 역할이 수축과 분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둘째, 그는 폐정맥을 혈관이 아니라 기관으로 보았지만, 사실 폐정맥은 해부적으로 혈관이라는 것이다. 즉 폐정맥은 공기가 아니라 피로 가득차 있으며, 폐정맥은 혈관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폐정맥은 기관과는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째, 심장 격막을 통해 피가 전달된다는 것은 완전히 비이치적인 주장이었다. 이 격막은 두껍고 강한 근육이다. 베살리우스도 이 격막을 조사했지만 구멍이나 통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윌리엄 하비(1578~1657)의 혈액 순환 이론이 1628년 출판될 때까지 사람들은 이 오류를 받아들여 왔다. 

 

 혈액의 소순환을 밝힌 미구엘 세르베토(1511~1553)

혈액이 폐를 거쳐서 우심실에서 우심방으로 이행하는 혈액의 소순환은 1553년 출판된 세르베토의 <기독교의 부흥>이라는 책에 기술되어 있다. 그는 자연신학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연을 읽고 파악함으로 신의 말을 통찰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신의 단순한 말을 통해 신학자들에 의해서 생긴 허영과 부패를 뛰어 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칼빈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고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세르베토는 격막을 통한 전달은 없다고 말했다. 그 대신 "이 피는 교묘한 기교를 써서 폐 속의 어떤 도관을 통과한다. 폐에 의하여 그것은 밝은 색을 띠게 되며 폐동맥에서 폐정맥으로 옮겨 간다. 다음에 그 정맥에서 공기를 흡입하는 사이에 공기와 섞이며 배기할 때 불순물을 씻어낸다."라고 썼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피가 순환할 가능성을 영향력있는 누군가에게 암시하는 일은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그것은 피가 격막을 통하여 심장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스며 나오고 그 동안 생명의 영에 의해서 깨끗해진다고 하는 설을 폐 우회설로 대치시켰을 뿐이었다.

 

파브리키우스(1537~1619)의 판막 발견

파브리키우스는 1603년 정맥에서 발견한 판막에 관하여 기술한 해부학 저술을 출판했다. 그것은 피를 한 방향 즉 심장으로만 흐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시대까지는 해부학자들은 혈액의 순환을 올바로 파악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혈액의 소순환, 그리고 판막의 존재, 심장의 근육의 구조등은 모두가 혈액 순환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혈액의 순환을 발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새로운 접근 방법이었다.

 

윌리엄 하비(1578~1657)의 혈액 순환 이론

하비는 논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기본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관찰과 실험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탐구의 무기는 경험 그리고 그것을 실험실에서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이론이 결정되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진실하고 풍부한 결실을 맺는 자연철학은 모두 이중의 사닥다리, 즉 상승하는 것과 하강하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실험에서 공리로 상승하는 사닥다리와 공리로부터 새로운 실험의 고안으로 하강하는 사닥다리다" 라고 그의 방법론을 설명한다. 하비는 이러한 상승하는 사닥다리와 하강하는 사닥다리를 적절히 사용한, 탐구와 경험주의를 잘 배합된 방법으로 혈액 순환 개념에 다다른다. 

 

윌리엄 하비의 <심장과 피의 운동에 관하여>(1628)은 귀납적 과학의 고전이다. 그 책은 귀납적 추론의 모범을 보여준다. 각 장마다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한 간결한 요점이 적혀있다. 예를 들면 그는 냉혈동물 생체해부를 통해 심장근육의 수축은 펌프작용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관찰은 폐순환의 정당함은 물론 더 나아가 동맥에서 정맥으로 흐르는 전체적인 혈액 순환이 합리적 결론임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혈액의 순환에 대한 결정적 논의가 피의 양에 관해서 전개되었다. 심장의 용량, 속도 및 박동으로부터 계산해 보면 심장은 한 시간에 인간의 체중보다도 많은 양의 혈액을 뿜어낸다. 이 양은 사람이 섭취할 수 있는 음식물의 최대량으로 만들어진 것보다도 많은 양이다. 이 많은 양의 피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혈액이 순환한다는 것이야 말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단 하나의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혈액은 심장의 박동에 의해 순환로를 끊임없이 도는 일종의 순환운동을 한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제시되었다.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이 완성된 것이었다.

 

모세혈관의 존재를 몰랐던 당시, 혈액 순환 이론의 단 하나의 난점은 피가 세동맥에서 세정맥으로 어떻게 흘러가는가이다. 그러나 하비는 모세혈관의 존재를 가정했으며, 1661년 말피기(1628~1694)가 현미경을 사용하여 개구리의 폐기관에서 모세혈관을 확인함으로 그의 가정이 증명되었다. 

 

하비의 견해는 말피기의 발견이 있기 이전 30년간이나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비에 반대의 강력한 이유는 피의 흐름의 수력학은 단 하나의 자연 현상을 확증하기 위하여 신체의 철학 전체를 파괴해버렸다는데 있다. 하비의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서로 부터 이어져 오던 목적론적 견해와이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비 업적은 갈릴레오의 업적과 같은 과학의 선구적 개념이 되었다. 그의 과학은 측정에 기반을 둔 객관적인 새과학이었으며, 성질, 체액, 목적, 내재적 경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옛 과학을 대신했다. 그의 과학적 사고와 질서에서는 주관성과 개성적인 것이 배제되어 있었다. 갈릴레오는 물리학으로부터 생물학적 비유를 추방했다. 하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계론적인 사고를 유기체 연구에 도입했다. 이윽고 데카르트가 인간속에서 기계론를 발견하게 되었다.   

 

베이컨의 실험주의 및 실용주의

하비와 베이컨의 관계는 과학을 실천하는 자와 그 방법에 관하여 논의하는 자의 관계이다. 베이컨은 하비의 혈액순환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도, 케플러의 행성의 법칙도 수용하지 않았으며, 갈릴레오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천재적인 과학자라기 보다는 과학세계에서는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새 과학의 철학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서 지식을 조직하는 새로운 확파를 창시하였다. "내가 과학의 발견을 위하여 제안하는 과정은 지혜의 예리함이나 힘에는 거의 의존하지 않고 재능이나 이해력 여하를 막문하고 모두 동일한 수준에 놓는 것이다." 베이컨 철학은 과학이 공공적으로 그리고 공중에의 관심에서 수행되는 하나의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이컨 저작의 주제는 세가지, 즉 학문의 가치와 존엄의 실증, 학문을 쇠퇴시키고 쓸모없게 만드는 장애의 분석, 학문을 개혁하고 진보시키는 방법으로 나눌 수 있다. 베이컨은 과학의 학도는 아니었지만 대단히 날카로운 인간학의 학도였다. 지성 자체에 대한 지성의 방해 작용을 논하는 점에서 그점이 잘 나타난다. 그는 우리 오성의 구조 자체에 정신의 혁신을 저해하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베이컨은 이 생득적인 눈가리개들을 "우상"이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있다.

 

베이컨의 우상

먼저 "종족의 우상"은 우리의 공통된 천성으로부터 오는 왜곡이다. "인간 이해력에는 의지와 애정이 스며든다....인간은 스스로 진리라고 믿는 것을 실제의 진리보다도 쉽게 믿어버린다."

 

또한 "동굴의 우상"은 만인 공통의 이 오해의 경향(종족의 우상)과 개인의 편견 및 정열이 복합된 것이다. 각 개인은 "자연의 빛을 굴절시키고 색을 상실케하는 그 자신의 동굴 내지는 은신처를 가지고 있다."

 

"시장의 우상"은 "사람들의 교제나 연합에 의하여 형성된 우상이다. 말의 부적절한 선택은 오성을 놀랄 만큼 저해한다." 말에 가득찬 오류를 확인하는 것은 수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때 이후로 과학 언어에 정확성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소홀히 여겨진 적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철학자의 체계적 독단론이다. "모든 기성 체계는, 비현실적이고 연극과 같은 방식으로 그들이 창조한 세계를 표현하는 연극에 불과하다." 데카르트는 고대 철학들의 근거 없는 많은 가정 - 원의 완전성, 자연에 내재된 목적이라는 생각등의 근거없음을 한 사람의 철학자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언어의 분석과 관련된 이 "체계의 추방"이 18세기 계몽사조의 과학의 주요 모티프가 된다. 이것은 과학에 상당한 건전성을 가져 왔지만 지나치게 건전하게 보이게 하는 결점도 조장했다. 말하자면 상상력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것은 미세한 사실의 축적을 장려하였지만, 이론을 막았다. 그리고 박물학을 장려하였지만 추상적인 일반화를 억눌렀다. 베이컨에게는 사소한 사상이나 추론을 확장하여 세계 체계에 도달하려고 하는 케플러,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태도가 없었다.

 

베이컨의 과학 방법론

베이컨에 의하면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적 방법은 세개의 서로 다른 단계로 이루어 진다. 귀납적 방법의 적용, 보편적인 박물학의 창조, 과학의 공공 연구 조직이다.

 

귀납은 과학의 절차를 바꿈으로 공허한 합리주의를 뜯어 고치고 새롭게 출발하게 한다. 스콜라학파는 원리에서 출발하여 결론을 연역한다. 그러나 베이컨은 개별 사실에서 출발하여 모든 관련 사실들을 망라하여 차츰차츰 일반적 원리로 높여간다. 베이컨의 근대과학에의 큰 기여는 실험에 대한 강조에 있다. 17세기 이후의 과학을 르네상스 및 그리스 과학으로 부터 명료하게 구분하는 것은 실험이다. 자연의 관찰 결과뿐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의 인공적 재현 즉 실험의 관찰을 중요시 한다. "자연을 노하게 하면, 그것은 가면을 벗고 진면목을 드러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진정한 박물학이 창조된다. 베이컨의 완성하고자 했던 방대한 박물학은 협력과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과학은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기때문에 과학을 유지하고 조직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다. 이렇게 과학은 공공 연구조직을 갖게 될 것이다.  

 

베이컨 이후의 과학의 발전 방향

갈릴레오 이후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향하는 바와 같은 인간적인 면을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베이컨의 과학은 인도주의의 모습을 띠게 되었으며 이는 많은 과학자들에게 매력적인 생각이었다. 과학은 부분적으로 베이컨이 의도했던 대로 되었지만 베이컨의 방법에 따라 이루어진 발견은 전혀없었다. 그리고 과학사상도 베이컨이 예상했던 것보다 혹은 베이컨이 뜻했던 것보다 훨씬 추상적이고 우아하며, 지적인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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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예술에 도입된 자연주의는 인체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면서 해부학의 발달에 기여하였다. 인체에 대한 오랫동안의 잘못된 이해는 하비의 혈액 순환 이론에 의해 바로 잡히게 된다. 그리고 베이컨에 의한 실험주의, 실용주의 과학관이 주장되면서 근대과학의 큰 특징이 형성된다.

 

베이컨의 우상이론은 흥미롭다. 지성의 올바른 작용을 방해하는 요소들...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인간의 경향, 진리를 찾고자 하나, 실체에 다가가기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믿어버리는 인간 특유의 경향은 진리를 밝히는데 큰 걸림돌이다. 거기에 더해 개인적인 편견-다양한 환경이나 상황에서 생성된 편견등이 진리로 부터 얼마나 우리 자신을 멀리 떨어지게 하는지 개탄할 만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 부터 받는 영향들, 그리고 사용하는 언어의 불완전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지는 진리와의 갭, 더더구나 특정한 체계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그 체계밖에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 어렵게 되는 상황들...

 

그렇다면 인간의 이성으로 객관적 실체를 발견하기란 너무 지난한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베이컨이 주장한 것처럼 귀납적인 방법 역시 그 한계가 있어 실체로 가는 길을 밝혀줄 수 없다면, 그 무엇으로 하여 그 길을 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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