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스피 지음/

 

제3장 새로운 철학

 

17세기의 철학은 자연을 탐구하여 그 신비를 밝히려는 목적을 가진 과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기반을 둔 자연과학철학은 철학이라는 허울을 벗고 진정한 과학, 객관성을 갖춘 과학으로 발전해 갔다. 새로운 철학은 과학 방법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고대 과학의 특징

르네상스 이전의 과학은 근대과학과는 다른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는 분류 그리고 현상의 설명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바탕을 두었다. 하지만 근대과학은 이러한 특징을 탈피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근대과학의 두가지 흐름

갈릴레오는 과학과 수학을 결합함으로 과학에 객관성을 부여하였다. 이와 함께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에 의해 고무된 실험과학 역시 고대과학의 낡은 프레임을 걷어버렸다. 또한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은 경험주의와는 대척점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한 줄기 흐름을 담당하였다. 근대과학은 베이컨의 경험주의에 근거한 실험물리학과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이론물리학의 두가지 흐름을 갖게 되었다.     

 

3장의 주요 내용

제3장 새로운 철학에서는 갈릴레오 이후 그리고 뉴턴 이전의 과학사조와 그에 따른 과학의 발전사를 다루고 있다. 르네 데카르트가 과학에 미친 영향, 그리고 뒤이어 베이컨에 바탕을 둔 실험물리학의 성과, 마지막으로 베이컨이 주장한 과학의 대중화 내지는 사회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느니 살펴본다. 

 

르네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은 17세기 과학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과학은 공허한 철학으로 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베이컨과 의견을 같이하나, 과학의 방법론에 있어 베이컨은 유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데카르트는 명석함에 의거하여 과학의 재건을 꾀했다. 다시 말해 베이컨은 실험과 귀납을 신뢰한 경험주의라면, 데카르트는 이성과 연역을 신뢰한 합리주의의 입장을 취하였다.

 

관성의 발견

데카르트의 관성에 대한 이해는 순수한 이성의 놀랄만한 업적이다. 그 이해는 경험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성에는 무한까지의 불변의 운동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운동은 실제로는 결코 일어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성의 개념은 고도로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적 현상보다는 자신의 사고를 더 크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관성의 법칙을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과학은 경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명석함'에 의지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극도의 추상적인 성질인 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와 수학

데카르트가 과학에 끼친 또 하나의 큰 유산이 있다. 그것은 수학이다. 그는 "나는 수학을 특히 좋아했는데, 이것으 그 추리의 확실함과 명증성때문이었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한 발판은 '이성의 명석함'이었고 또 다른 발판은 수학이었다. 그의 명증성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시작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의 직각좌표의 발견과 도입은 이러한 그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는 직선보다 더 단순한 것은 없었으며, 모든 존재들 사이의 관계나 비례를 두개의 직선으로 이루어지는 평면에 놓고 연구하는 것이 그에게는 아주 명확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좌표계의 도입으로 데카르트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하게 되었다. 공간적 연속의 수학인 기하학과 불연속적인 양의 수학인 대수학을 결합시켰던 것이다. 이를 이어 받은 뉴턴은 추상적이고 연속적인 공간개념과 구체적이며 불연속적인 원자론적인 물질개념을 통합하게 된다.

 

데카르트의 기계론

이러한 이성과 수학을 무기로 데카르트는 '세계는 하나의 기계'라는 기계론을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세계는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통해 정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수 없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정신이 존재한다면 그 정신 밖에 있는 또 다른 것의 존재 즉 물질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논리하에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이원론적인 생각이 나왔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비어있는 공간개념보다는 물질로 가득차 있는 공간개념으로 이끌었다. 결국 공간은 물질이며, 세계는 물질을 구성성분으로 가진 기계라는 사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우주의 모습은 올바르지 않다. 그렇다면 그가 자연에 대한 궁극적 이해에서 실패한 것은 무엇때문인가? 

 

데카르트의 한계

데카르트는 자연이 아니라 이성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사상은 지나치게 수학적이다. 과학의 주제는 자연이며, 수학은 도구, 수단, 또는 과학의 언어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 언어와 주제를 혼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단일한 일반화를 가지고 행위와 원인을 일거에 설명하려 한다. 그 단일한 일반화는 기계론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단지 하나의 명석하고 단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도 자신이 비판한 철학의 공허함이라는 오류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과학사에서의 데카르트의 위치

하지만 데카르트는 철학과 과학사에 있어 위대한 공헌을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르네상스 과학은 주로 문화와 철학에서 유래하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에는 문화와 철학은 주로 과학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의 교차점에 데카르트가 서 있다. 그로부터 자연에 관한 지식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옮아갔다. 과학은 법칙의 균일성만을 가정할 뿐 진리의 통일, 우주 인격 같은 것은 상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직접 과학에 총괄적인 공헌을 한 최후의 위대한 체계적 철학자였다.

 

원자론

고대 원자론

데카르트의 기여가 이론 물리학에 있다면 베이컨은 실험물리학에 그 기여가 있다. 이 실험물리학은 원자론에서 그 최초의 모습을 드러낸다. 즉 진공에 대한 실험들이 바로 그것이다. 고대 원자론 학파에서는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가 있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물체와 진공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고대 원자론들은 이와 같이 무한한 진공속에 입자(물체)를 넣었고, 그리고 그 공간내에서의 물체의 움직임 즉 운동이 가능하다는 기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원자들의 배열이며, 변화와 진행은 입자의 물리적 재배열일뿐이다고 보았다. 심지어 영혼과 지성도 단순한 미립자의 배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감지하고 판단하는 물질의 제 2성질 - 색, 냄새, 맛, 형, 감촉 - 은 우리 속에 있는 지각의 양식에 불과하며 이러한 지각은 자연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운동이란 자연의 본질 즉 원자와 관련된 것이지만 물제의 제2속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중세시대와 원자론

이러한 원자론을 철학에 받아들인 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원자론이 지니고 있던 객관성은 목적론을 배제했기때문에 자연에 대한 신의 역할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에피쿠로스의 신들은 세계를 창조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은 자유다. 그리고 거만한 사람들의 통치도 받지 않고 신들의 도움없이 우주를 운행시킨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의 자연관은 신학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도덕적 권위의 환영을 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고대 원자론은 신을 중심으로 하는 중세시대에서는 찬밥신세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상황이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진공의 발견

17세기에 들어 피에르 가상디(1592~1655)에 의해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 과학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17세기에 손으로 즉 실험을 통해 과학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원자론이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원자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었으나, 원자가 놓여있다고 가정되는 진공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실험물리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자연은 진공을 혐오한다"는 오래된 목적론적인 원리를 반박할 수 있는 단서를 실험을 통해 찾았다.  

 

갈릴레오의 탁월한 제자인 토리첼리(1608~1647)은 수은 기압계를 발명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신 수직관의 열린 쪽을 수은 용액 속으로 거꾸로 뒤집어 넣고, 그 수직관 속의 액체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수직관 속의 수은이 그 수직관을 타고 내려옴에 따라 형성되는 빈 공간의 의미에 흥미를 가졌다. 그 공간이 진공공간이었다. 그는 진공을 만들 때 받는 저항은 진공 혐오의 원리때문이 아니라 공기의 무게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우리는 공기의 대양의 밑바닥에 살고 있으며, 이 공기는 무게가 있다는 것이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고 말했다. 실험으로 진공을 만들어냈던 것이었다. 이 진공은 원자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공간이 아니던가? 원자론이 이러한 실험에 의해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파스칼은 1648년 높은 곳에서는 기압이 내려간다고 하는 유명한 실험을 실증하여 온 유럽의 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자연은 진공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혐오라고 되어 있는 현상은 모두 공기의 무게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참된 원인을 간파하지 못할 때, 그들은 교묘하게 가상적 원인을 만들고 여기에다 특수한 이름을 붙여서 이성이 아니라 그 귀를 만족시킨다."

고 이야기함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의 무지함을 비판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드러내 보였다. 

 

보일의 입자철학

실험 물리학은 로버트 보일(1621~1691)과 함께 본 궤도에 진입했다. 그는 진공에 존재에 관한 토리첼리와 파스칼의 의견을 확인했다. 그리고 진공이 되면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연기가 흩어지는 것, 새 털이 총알처럼 낙하하는 것, 그 속에 쥐를 넣어 두면 죽는 것등을 증명했다. 일반적으로 보일은 화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 희망했던 바인 원자물리학자라고 간주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진공보다는 그 속에서 운동하는 원자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진공보다는 펌프의 작용과 공기의 반응 즉 "탄성"에 더 흥미가 있었다. 보일은 그의 실험들을 "입자 철학"의 자료로 삼을 생각으로 계획했다. 그의 '입자철학'이란 '입자과학'과는 다르다. 즉 보일은 공기가 원자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원자 모형은 그 현상을 "알기 쉽게"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입자론은 과학이라기 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던 것이다. 보일은 입자 철학을 수립하는 수단으로서, 화학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최초의 중요한 물리학자였다.

 

보일은 실험물리학을 발전시킨 큰 공로가 있지만 그의 과학은 완벽한 의미에서 객관성을 지니고 있지는 못했다. 그의 과학이 '입자과학'이 아니라 '입자철학'으로 불려야 했다. 왜 그런가? 보일의 과학은 상식의 과학이었다. 보일의 입자설은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물질에 관한 하나의 생각, 즉 데카르트의 경우처럼 하나의 방법론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화학을 양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보일은 공기의 물리적 특성을 발견했지만, 기체의 화학적 특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백년이 더 지나서 돌턴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입자철학"은 수로 표현된 적극적 의미로서의 객관성을 갖게 된다. 하지만 베이컨의 실험주의는 보일과 영국의 왕립학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베이컨의 영감이 보일에게 작용하여 원자 물리학을 진공으로부터 탄생시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공존

과학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수학은 오만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학만으로는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모든 이론이 객관성을 확립하려면 실험적 방법을 통해 심판받아야 한다. 즉 데카르트와 같이 순수하게 이성과 추상적인 수학에 기대는 사람들은, 사실을 진지하고 겸허하게 탐구하는 실험가들에 의하여 재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과 수학에 실험이 더해진다면, 또한 거꾸로 뒤집어 실험에 이성과 수학을 덧붙인다면 어떤 결과가 산출될까?

 

역사는 이와 관련하여 어떻게 흘러갔을까? 실험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이컨은 다소 천박한 반지성주의적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과학자들은 거기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편협한 태도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은 사실의 축적과 분류로써 얻은 질서를 추상과 수학 공식에 의하여 얻어진 질서와 대립시키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들은 베이컨식의 방법과 데카르트식의 방법의 장점을 다 함께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물리학은 실험물리학과 이론물리학이라는 두개의 멜로디가 잘 어우러진 음악이 되었다.  

 

과학의 사회성

베이컨의 예언대로 과학은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필요로부터 사회적 성격을 발전시켰다. 역사적으로 두개의 탁월한 과학단체가 있었다. 런던 왕립학회(1662)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1666)가 그것이었다.

 

17세기 전반에 파리의 지식인들은 장소를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살롱을 형성했는데, 여기에서 프랑스적 양심에 대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지방의 동료와는 서신에 의존했다. 이 그룹의 중심인 메르센느(1588-1648)신부는 과학의 가십을 전하는 사람으로 "학계의 우편함"으로 유명했다.

 

프랑스 왕립 과학 아카데미

프랑스의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베이컨의 새 과학상으로 제시된 협동, 커뮤니케이션, 후원등의 요소들이 있었으나 자발적인 성격보다는 국가 통제적 전통에서 구상된 것었다. 그것은 프랑스 공업의 기술적 감독과 개량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아 영예를 누렸다. 이렇듯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과학이 좀 더 전문적으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루이14세 치하의 프랑스에서 성숙한 과학자들은 데카르트나 파스칼 세대에 비하면 훨씬 빈약했고, 뉴턴 시대에 왕립학회에 모여들었던 영국의 천재들보다 덜 생산적이었다. 18세기 계몽사조나 나올 때에야 비로소 그 우위가 드러나 보였다.

 

영국의 왕립학회

이에 비해 영국의 왕립학회는 또 다른 성격을 지닌다. 프랑스의 왕립아카데미는 국가의 관리하에 전문화의 길을 걸었다면 왕립학회는 정직한 아마추어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17세기 과학 대중의 요구에 대한 자연발생적 응답으로 성립되었다. 왕립학회는 성실한 사람들이 위대한 발견을 이해하려하고, 경건, 학문, 인간성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토론을 거듭했던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하여 과학의 방법과 양식에 있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 그룹의 한 사람인 윌킨스는 놀랄만한 통찰력으로 갈릴레오의 과학의 수학화와 베이컨의 과학의 사회화 사이에 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윌킨스가 과학의 성과중의 하나로서 의견교환이 아니라 사물을 표시하는 기호에 의한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일종의 "학술언어"의 고안인데, 이것은 베이컨의 시장의 우상을 추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그룹은 항구적인 조직을 세우고자 국왕의 은혜를 구했다. 1662년 예비헌장이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자연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런던 왕립학회"라는 재가를 받았다. "왕립"이라는 칭호는 국왕의 관용을 표시할 뿐, 지원은 없었다. 실제적인 지원은 공공심 있는 후견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자기의 실험실이나 재정상태가 지극히 좋지 않은 학회의 실험실에서 "자연에 관한 지식의 향상"에 실제로 종사하던 보일, 로버트 후크, 에드먼드 핼리등이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리하여 왕립학회는 협동적인 문화 운동을 체현하였다. 왕립학회는 영국식의 자발적인 단체로, 대륙에서라면 공영 기관이 되엇을 것에 민영 사업이 손을 뻗힌 것이었다.

 

과학의 대중화 및 사회화

과학 대중이 없었더라면 사회적 활력으로 되기에는 너무 세련된 수준에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후계자 및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고상한 개념이 교환되는 형태가 계속되었을 것이다. 즉 과학의 사회화를 통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는 과학자들은 고립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의 진정한 사회적 성격으로 부터 이렇게 동떨어진 견해는 없다. 어는 인문학자는 '그의 과학자 동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집단을 이루고 샘이 날 정도의 연구비에 힘입어서, 온 세계를 여행하며 언어가 제대로 통하지 않지만 훌륭한 결과를 맺는, 토론을 하기에는 하등의 방해도 안 될 것 같은 집회에 참석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모두 과학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과학과 공통의 이해>에서 과학 안에서 살고 과학 안에서 존재하는 참된 공동체를 감동깊게 고찰한다. 이것이 왕립학회가 발족했을 때부터 성취한 것이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

이 당시의 과학과 종교는 서로 반목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 청교도의 헌신과 열의등의 종교적 열정은 과학에의 열정으로 옮겨갔다. 보일은 성실한 과학자이자 지극히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의 자연신학은 신의 업적은 그 놀라운 자연에 나타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전통에의 적의, 공리주의, 타산적 자기 부정, 세상 일에 대한 소명, 합리성, 경험의 개인적 해석등은 서구 문화사의 일반적 특색으로 칼빈주의자의 행동 양식이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프로테스탄트적 종교적 양식은 재능있는 자나 야심 있는 자를 격려하여 과학을 높여왔다. 또한 시민계급의 환경도 이러한 움직임에 합세하였다. 반면에 가톨릭과 귀족적 환경은 과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프로테스탄트 성향이 강한 스코틀랜드인과 네덜란드인은 과학의 역사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카톨릭적 성향의 아일랜드인과 스페인인 가운데서는 두드러진 과학자 무리를 거의 찾아 볼수가 없다. 

 

하지만 이후에 등장하는 계몽사조시대를 거쳐 점차 목적론적인 철학과 객관성이 심화되는 과학사이의 괴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과학과 기독교는 서로 엇박자를 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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