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2일 


제주 서귀포시 가온제이게스트하우스를 나와 제주 올레길 7코스로 출발한다. 

올레길 자체가 유명관광지라면 모를까, 유명한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비경들. 어떻게 보면 평범한 풍경도 비경이 될 수 있다





잭 케루악 / 이만식 옮김 / 민음사

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http://blog.daum.net/ccsj77/48


3개월만에 써 낸 소설, <길 위에서>. 타자지를 갈아끼는 것이 귀찮아 타자지를 이어붙인 36미터 길이의 종이위에 단숨에 써 내려간 소설이 <길 위에서>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 마자 당시의 젊은이들을 매료시킨다. 이른바 '히피문화'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 단초가 된 것도 이 책이란다. 리바이스 청바지와 컨버터블 자동차, 커피솝의 대유행도 이 책 <길 위에서>에 영향력 때문이라고도 한다.   





<길 위에서>는 샐 파라다이스와 딘 모리아티의 미친 여행 이야기이다. 4차에 걸쳐 미대륙을 동서로, 남북으로 여행한 여정의 기록이다. 1부는 동쪽 끝 뉴욕에서 콜로라도주의 덴버를 거쳐 서쪽 끝 샌프란시스코까지의 길 위에 선 샐 파라다이스의 이야기이다. 2부는 뉴욕에 있는 샐이 그를 찾아온 딘 일행(메릴루, 에드던컬)과 함께 남부의 뉴올리언즈를 경유하여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길 이야기이다. 3부는 샐과 딘이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가는 여정이며, 4부에는 뉴욕을 출발한 샐이 덴버에서 딘과 스탠과 합류한 후 멕시코시티까지 가는 여정이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 5부는 거의 미치광이가 된 딘과 샐의 마지막 해후와 슬픈 이별의 기록이다.  





딘 모리아티. 그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미친듯이 확인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딘의 깊은 곳에서 끓어 오르는 삶의 충동은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다. 그 충동은 마구잡이로 분출된다. 딘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보인다. 다만 샐과 몇몇 친구들만이 딘의 이러한 충동을 이해할 뿐이다. 관습과 형식에 매여있는 것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충동은 이러한 관습과 형식을 거부한다. 딘은 자유롭게, 미친듯이 연주하는 재즈에 열광한다. 딘의 눈에는 모든 여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보인다. 딘과 그의 친구들은 벤제드린이나 마리화나에 탐닉하기도 한다. 딘은 광적인 폭주(사실 그는 최고의 드라이버이기도 하다)로 동승한 사람들이 벌벌 떨게 만든다. 이 모두는 아마도 틀에 박힌 형식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삶의 충동적인 에너지의 발작일 것이다. 


딘은 천재적 기억력으로 끊임없이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또한 삶의 에너지가 각각 어떻게 분출되는지 끊임없이 사람들을 관찰하고, 새로운 삶에 진저리칠 정도로 흥분해 하여 사방으로 펄쩍 펄쩍 뛴다. 그에 비하면 샐은 미대륙을 횡단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대자연과 대면에서도 삶의 충만한 에너지를 느낀다. 거대한 대륙, 빛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대평원의 칠흑같은 밤의 어둠, 달빛에 젖은 옥수수밭.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여전히 침묵의 공간은 존재하고 있다. 


뉴욕에서 덴버를 거쳐 멕시코시티를 향한 여정은 샐과 딘에게 전혀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의 눈은 휘둥그레진다. 멕시코에서의 삶이란 미국민의 삶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위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미국인들은 행복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


정말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야. 뭐가 급한 것인지 데대로 된 판단도 못하고 순진하리만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저들의 영혼 말이야. 만인이 인정하는 고민거리를 발견할 때까지 절대 편안해지지 못해.


그러나 멕시코인들의 삶은 얼마나 다르냐?  그들이 가난하다고 멸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에게는 문명이 가지지 못한 순수함과 위엄이 있다. 하지만 문명에는 특유의 독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자각과 흥분과 방황에서 딘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딘의 미친듯한 삶에 대한 충동은 결국 슬프게 막을 내린다. 

 



샐과 딘이 삶의 원초적 충동을 통제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충동에 따라 미친듯이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케루악은 필연적으로 삶의 의미와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케루악의 눈에는 현대 문명은 건설보다는 파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문명이 모든 것 즉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 지를 몰랐다. 이 모든 일이 어디로 흘러갈 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꽃은 미친 듯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혹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신을 몰아낸 현대문명은 갈 길을 잃었다. 어떠한 삶의 길을 가야할 지 방향을 잃었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든 그 삶의 길을 가야만 한다. 삶은 길이기 때문이다. 어떤 길을 가야만 할까? 목적도 의미도 이미 무너져 버린 사회에서는 각 개인의 삶의 길은 열려져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가장 단순 명쾌한 방식으로 도에 다다르려 했다. 이봐, 너의 길은 뭐야? 성인의 길, 광인의 길, 무지개의 길, 어떤 길이라도 될 수 있어. 어떤 짓을 하든 누구에게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길이 있지. 그럼 어디서 어떻게 할래?

아무런 꿈이 없었기에 내 앞으로 세계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샐이나 딘, 그리고 딘과 같이 젊음의 충동을 마구 쏟아내면서 미친듯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그의 친구들 모두 어렴풋이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런 생활 방식은 젊음의 치기처럼 느껴지면, 그런 생활 방식은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생도 역시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모든 사물은 가장 안정된 상태를 향해 간다. 인생도 그렇다.


이런 미친 짓과 쉼없는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어. 우린 어딘가로 가서 뭔가를 찾아내야만 해.

이런 사진을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부모들이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사진 안에 들어 갈 만한 인생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인생의 보도를 걸어갔다고 생각하게 될까? 우리의 인생이, 진짜 밤이, 그 지옥이, 무의미한 악몽이 길이 거친 광기와 방탕으로 가득했단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잭 케루악이 이 책을 3개월만에 단숨에 썼다는 사실은 믿어지지 않는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멕시코로 여행하는 도중 딘은 스탠에게 자기 이야기를 좀 하라고 한다. 스탠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 지 당황스러워하자, 딘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껏 즐겨.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전부 말해봐. 그렇다해도 다 얘기할 순 없을테니까 느긋하게 해. 느긋하게.


아마 케루악이 글을 써 내려갈 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약에 취해 몽환의 상태로 생각나는 대로, 아무리 사소한 것일찌라도 마음 속에 떠 오르는 것을 거침없이 전부 써 내려갔는지도 모른다. 그런 정황이 분명히 드러나는 부분들이 <길 위에서>의 중간 중간에 나타난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도 그렇다. 어떻게 제정신으로 이런 책을 3개월만에 써내려 갈 수가 있단 말인가?


잭 케루악은 젊은이들에게 이런 '길 위에서'의 생활을 미화하기 위해서 쓴 글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무한한 자유에의 열망은 독성이 있음을 경고하려는 것인지도. 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딘의 모습에서 자기들이 추구하는 자유의 원시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딘과 같이 길위에 섰다. 하긴 좁은 울타리내에서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범인들에겐,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어디론가 용감하게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책이기는 하다. 누군들 딘보다 사정이 나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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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무엇으로 정의할까? 여행이란 역사탐구란 느낌이 든다. 터키 여행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돌아보는 길이었다고나 할까? 이제는 찾을 길 없는 사라진 인생들이 남긴 희미한 발자취를 통해 잠시나마 꿈같은 시간여행을 했었고, 카파도키아 지역의 황량한 들판과 계곡을 보면서 자연이 시간의 힘을 빌어 지표면에 남긴 흔적에 자그만 탄성을 내질렀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아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여행을 통해 어느 정도는 그 한계의 테두리를 넘어 서게 될 수 있다. 책속에서만 존재했던 역사가 눈 앞에 그 자취를 보이고, 다람취 체바퀴같은 일상의 공간은 그 문을 열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새로움에 익숙해질 즈음엔 다시 이제는 다소 낯선 것이 되어버린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여행이란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인가? 돌아갈 집이 있기에 여행이라 하는 것일테지,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이란 방황일 뿐일테니까. 여행은 현재 삶의 뿌리를 찾으러 떠난 길이 다시 현재로 이어진 길일 것이다.   

 

여행은 자유의 느낌을 진하게 풍긴다. 여행이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란 또 다른 구속으로의 선택일 뿐이라 생각한다면, 여행은 상대적으로 더 작은 구속- 더 큰 자유를 향한 것일 것이다. 패키지여행은 자유여행에 비해 자유의 정도가 더 약하다. 어느 것이든 선택할 수  상황을 자유라고 정의한다면, 패키지 여행은 선택의 가능성이 작은 자유이다. 가장 큰 자유를 주는 여행이라면 누가 뭐라해도 도보 여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언제나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출 수 있기때문이다. 비록 한정된 시간에 더 멀리 가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선택의 폭은 넓을 수 밖에 없다. 도보여행과 자전거여행이 댕긴다.

 

자유를 이야기하다 보면 문득 "쇼생크 탈출"이 떠오른다. 자유를 향한 갈망을 그린 영화. 교도소 안에서 아름답게 울려퍼지는 아리아 '저녁바람 부드럽게'는 이상스럽게도 자유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한가로운 어촌에서 배를 손보고 있는 앤디의 모습... 그의 여유로운 모습에서 자유의 느낌을 본다. 열려 있는 바다를 향한 작은 배, 앤디의 마음은, 그의 자유는 바다를 향해 있다. 자신이 만든 배로, 자기자신만의 힘으로 더 넓은 자유의 바다를 향하는 앤디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 쇼생크 탈출 마지막 장면 ->http://pann.nate.com/video/13820586

 

<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 아흐멧 위밋 지음/ 이난아 옮김

 

여행은 준비가 반이다라고 생각하고 터키를 알기 위해 집은 책이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과 아흐멧 위밋의 <파디샤의 여섯 번째 선물>입니다. <파디샤의 여섯 번째의선물은 어른을 위한 동화입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초등 4학년 딸애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더니 재미있게 읽더군요. 한 터키의 신문에서는 "이 책을 읽을 만한 연령의 자녀가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사주세요. 아마 당신이 먼저 읽게 될 겁니다." 라고 소개했네요. 


 

파디샤는 이슬람 교를 믿는 나라의 군주입니다. 한 나라에 베풀기를 좋아하여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훌륭한 파디샤가 있었습니다. 그는 칭찬받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충직한 신하이자 친구인 총리대신은 파디샤가 이 나쁜 버릇을 고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총리대신은 "폐하보다 너그러운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파디샤와 총리대신은 파디샤보다 너그러운 사람을 찾아보려고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에서 그들은 다섯명의 기이한 사연을 가진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기구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첫번째 사람은 장님인데, 놀랍게도 매일 장터에서 그의 목덜미를 힘껏 내리치는 사람에게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며 금화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보석상인입니다. 그는 매일 장터에서 진귀한 황금달걀을 경매에 붙이고서는 고가에 황금달걀이 낙찰되자 마자, 그것을 쇠절구에 빻아 공중으로 날려보냅니다.


세번째 사람은 대장장이입니다. 그는 매일 일을 시작하려다 말고, 갑자기 벽으로 뛰어들어 머리를 부딪히고는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네번째 사람은 뮤에진입니다. 뮤에진은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기도문을 읽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오 날마다 기도 시간을 알리기 위해 사원으로 가다가 첨탑의 꼭대기를 바라보고는 기쁨에 역력한 표정으로 갑자기 첨탑의 계단을 황급히 뛰어 올라갑니다. 그러나 조금 후 그는 아주 허탈한 표정으로 어깨를 죽 늘어뜨린 채 밖으로 나옵니다. 


다섯번째 사람은 모자장수입니다. 일주일마다 정성껏 만든 유명한 모자를 시장에서 흥정을 하는 도중 무언가를 보고 '날 떠나지 마시오.'하고 외치며 묘지까지 죽어라 달려가서는 두 개의 무덤 앞에 엎드려 기절할 때까지 울고 또 웁니다. 


파디샤와 총리대신은 이 다섯사람의 기구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파디샤는 이 다섯사람을 궁궐로 불러서 자문관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는 총리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기억력은 불행하게도 그리 오래가지 않지. 머지 않아 이 여행중에 배우게 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겠나?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우리가 들었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오류들을 나도 똑같이 범할 수도 있고.... 나는 그것이 두렵네. 차라리 내게 경고해 줄 수 있는 자문관들을 곁에 두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하리란 생각이 들어." 197쪽


도대체 다섯사람은 어떤 기구한 이야기의 소유자일까요? 파디샤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에 꼭 필요한 교훈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다섯 사람을 궁궐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네는 탐욕 때문에 눈이 멀었고, 대장장이는 나눌 줄을 몰라서 중요한 기회를 놓쳤지. 또 보석 상인은 흥청망청 쓴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중이고, 뮤에진은 인내심이 없어서 사랑하는 여자를 잃지 않았소? 모자장수는 또 어떤가? 질투심 때문에 아내와 아들을 죽임으로 몰아넣었소. 자네들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오류들의 생생한 증거들일세. 모두 내 곁에 머물면서 바른 길을 제시해 주길 바라오." 199쪽


파디샤는 여행을 통해 탐욕, 나눔, 낭비, 인내, 질투와 관련된 중요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는 그 교훈을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파디샤의 나라는 더욱 행복해졌고, 그는 백성으로부터 더 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을 살아가는 길에도 이정표가 될 가치들이 존재하겠죠. 나 자신은 어떤 가치를 우선시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내가 배운 가치는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해 봅니다. 다만 눈을 즐겁게 하는 여행으로 만족한다면 더소중한 교훈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문득 듭니다만, 한편으로는 너무 그런 점에 연연해 하지는 말자는 생각도 듭니다. 이후의 나의 생각과 행동은 나의 여행이 가치가 있었는지의 여부를 결정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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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여행은 '익숙함과의 결별'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익숙함과의 결별은 필연적으로 미지의 세계와의 만남을 의미하겠죠. 미지의 세계는 불확실의 영역에 속하기때문에 여행이란 어떤 사람에게는 불안과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한편 모험적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지의 세계와의 만남이 오히려 호기심과 짜릿한 흥분을 주기도 합니다. 어쨌건 주사위는 던져졌으며 이미 비행기는 날개를 펼쳤습니다. 

 

밤 11시 부산을 떠나 터키의 이스탄불에 도착하니 터키 현지 시간으로 오후 4시반입니다. 터키는 우리와 6시간 시차가 나기때문에 우리 시간으로는 밤 10시반에 도착한 셈입니다. 부산에서 이스탄불까지 30분 모자라는 24시간이 꼬박 걸렸습니다. 꽤 먼 길입니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 튀르크 공항까지 8000km가 넘는 거리를 장장 12시간을 쉬지 않고 날았습니다. 이스탄불은 실크로드의 종착지입니다. 옛날에는 도보로 몇달을 걸리던 이 길이라 생각하면, 단 12시간만에 날아온 것은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터키 제1의 도시 이스탄불의 관문은 아타 튀르크 공항입니다. 아타는 '아버지'란 뜻이고, '튀르크'는 터키를 말하기때문에 아타 튀르크는 '국부'란 뜻입니다. 터키의 아타 튀르크는 터키 민주공화국의 설립자인 케말 무스타파를 가리킵니다. 터키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타 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입니다. 그는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연합국에 점령당한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되찾아 터키 민주 공화국을 설립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아랍나라들이 이슬람 국가인데 반해 터키는 민주공화국입니다. 국민의 98%가 무슬림이긴 하지만 이슬람교를 터키의 국교라 부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아랍의 이슬람국가와는 달리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무슬림들도 이슬람교의를 따를 것을 강제받지 않습니다. 여성들도 히잡이나 차도르를 해야할 지 말아야 할 지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합니다. 히잡은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와 같은 것이고, 차도르는 눈을 제외한 다른 부분을 모두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체제는 모두가 아타 튀르크 무스타파 케말덕분인 것입니다.   

 

아타 튀르크 공항에 도착한 후 첫번째 방문지는 '그랜드 바자르'입니다. '그랜드 바자르'를 향하는 길의 오른쪽으로 '마르마라해'를 끼고 달리다 보니, 해안가에 거의 6km나 뻗어 있는 하드리아누스 성벽도 보입니다. 또한 여기저기 둥근 지붕을 한 모스크들이 눈에 띕니다. 

 

'그랜드 바자르'는 154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561년에 설립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만도 450년정도가 되네요. 관광객을 위한 수많은 상점이 밀집되어 있는 '그랜드 바자르'에서 우리 일행은 일차 쇼핑을 합니다. 길거리에서 많은 아이들이 물이나 기념품을 팔기위해 분주합니다.

 

터키에서의 첫날밤 새벽 3~4시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더워서일까요, 아니면 가이드말처럼 시차때문일까요? 한국과의 시차는 6시간, 매일 1시간씩 시차가 적응된다고 하니, 집에 갈 때쯤이면 완전히 시차에 적응이 되겠군요. 이제 첫째날 새벽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설레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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