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선정 100권 중 <서부전선 이상없다>

레마르크 지음/ 열린책들



일차세계대전, 독일과 프랑스가 대치한 최전선, 서부전선. 포격전으로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는 전장에서 학도병으로 참전한 독일 병사 파울보히머. 나이는 19세.

집에는 암으로 죽어가는 어머니, 가족은 배급품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가고 있고, 전장에서도 병사들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싸운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포탄으로 참호는 짓이겨져 평평해지고 곳곳에서 찢겨나가는 살점과 몸통들, 튀어오르는 파편들, 허뿌옇게 일어나는 포연과 먼지속에 누가 누군지도 구별할 수도 없고, 벙커에 숨을 죽이고 있는 병사들. 어떤 병사는 미쳐 날뛰고, 동료들은 그를 때려 눕힌다. 어떤 이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으로 달려나간다. 전장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그 아우성이며, 아수라장이며, 그 핏빛이며, 그 미쳐 날뛰는 포탄이며. 전쟁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은 모른다. 안전한 후방에서 애국심이 어떠니 저떠니 떠드는 사람은 모른다. 다만 전장에서 전우를 잃고 자신도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온 몸이 얼어 붙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저 넘어 프랑스 군인들은 그들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있고, 이쪽 독일 군인들은 조국 독일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도 똑 같은 사람일 뿐인데, 왜 이렇게 싸워야 하는가? 파울 보이머는 알 수가 없다. 그런 가운데 함께 했던 전우들은 하나 둘 죽어간다. 가장 절친한 전우였던 카친스키마저 죽는다. 곧 전쟁이 끝날 것이란 말이 들리는데, 그 새를 못 참아서 죽다니 허망하다. 파울 보이머도 죽는다. 그가 죽는 날, 서부전선에서 사령부로 다음과 같은 전신이 날라간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수용소군도>를 읽은 후 읽게 된 <서부전선 이상없다>. 기분이 더럽다. 화가 난다. 슬프다. 인간세계는 조금씩 변하고 있는듯 하나 그 뿌리에서는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누구를 위해 싸우는 것인가? 누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일까? 난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더 이상 다수가 하는대로 따라하기는 싫다. 더 이상 의심없이 위에서 시키는대로 하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 오랫동안 전통이나 관습이란 명목으로 <해야한다>는 당위성에 기대어 요구하는 바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의 양심과 나의 마음이 하라고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 저항하고 싶다. 온 세상의 잘못된 기득권에, 온 세상의 약한 자를 억압하는 힘센 자들에게 저항하고 깨부수고 싶다. 나는 파울보히머처럼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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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 백정승 옮김/ 동서문화사

☞ 뉴욕 타임즈 선정 100권


브레히트의 희곡이다. 희곡이란 장르는 익숙한 소설과는 달라 낯설다. 묘사나 서술등으로 작가의 생각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소설과는 달리, 희곡은 대화를 통해서만 작가의 생각을 잡아내어야 한다. 실제로 연극을 보면 또 달라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익숙하지 않음이 희곡을 읽는데 어느 정도 장애로 작용한다.


주요인물: 억척어멈, 억척어멈의 벙어리 딸 카트린, 억척어멈의 큰 아들 아일립, 작은 아들 슈바이처카스


이 희곡은 '30년전쟁'(1618~1648년)이 배경이다. 안나 피얼링은 전쟁의 와중에서 질긴 삶을 이어가기 위해 군대를 따라다니며 병사들에게 물건을 팔면서 억척같이 돈을 번다. 전쟁터를 전전하는 동안 억척어멈은 아이들을 하나 하나 잃게 된다. 혼자 남은 억척어멈은 혼자 수레를 끌면서 퇴각하는 군대를 뒤따라 간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억척어멈은 전쟁으로 먹고사는 인생이다. 전쟁이 끝나려 하자 오히려 걱정을 한다. 생계의 끈이 떨어질까 염려하는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억척어멈의 모습에서 두가지 상반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전쟁이라는 악에 굴복하는 비루한 인생이 그 하나라면,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탐욕적인 인생이 또 다른 하나이다. 현대에 죽음의 상인이라 일컬어지는 무기상은 분명 전자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득을 위해 전쟁을 조장하기까지 한다고들 말을 하지 않는가? 


파스칼의 팡세에는 전쟁의 비논리성을 지적한 바 있다. 강 이편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살인죄가 되지만, 강 저편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오히려 용맹하다고 상을 받게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억척어멈의 큰 아들 아일립이 그렇다. 전쟁중에 살해행위는 용맹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게 되지만, 전쟁이 끝난 후의 살해행위는 범죄가 되는 것이다. 아일립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아일립을 그런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작은 아들 슈바이처카스는 어떤가? 적에게 군사자금을 넘겨주지 않으려다 목숨을 잃게 되는 슈바이처카스는. 한 쪽에서는 영웅으로 받들어질 행위가 다른 쪽에서는 죽을 죄가 되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을 편드는 순간 이미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전쟁의 희생자가 될 상황에 처하게 된다. 명분은 어느 쪽이나 갖고 있다. 더구나 종교 전쟁이 아닌가? 종교가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전쟁의 사도가 되어버리는 이 기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카트린의 죽음. 조용히 잠든 도시가 죽음의 문턱에 놓여있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다. 무지막지한 공격으로 곧 죽게 될 것도 모른채 잠들어 있다. 카트린은 임박한 무자비한 공격을 시민들에게 알린다. 하지만 카트린은 목숨을 잃는다. 카트린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을 막았다. 잔혹한 전쟁의 참상속에서도 빛나는 희생이 있다. 오래 기억에 남을 희생이지만, 오히려 모두의 눈에 숨겨진, 잊혀진 그런 희생이 있을 것이다. 밝은 인간성의 승리는 잊혀진다.



옮긴이의 브레히트의 작품 해설에 기대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의미를 되 짚어 본다. 


브레히트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이란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이 작품이 1941년 초연되었을 때, 처참한 전쟁터에서 어떻게든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쳤지만 끝내 자식들을 하나하나 잃고 마는 한 어머니의 불행한 운명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브레히트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러한 연출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1949년 직접 연출을 지휘했을 때, 억척어멈을 연기한 바이겔의 연기는 내면에 격렬한 분노를 품은 듯 하였다. 이 분노는 억척어멈의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억척 어멈을 향한 분노이었다. 바이겔은 스스로 억척어멈에게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멀찍이 거리를 두면서 그녀에게 분노하고, 관객에게도 그 분노를 느끼게끔 했던 것이다.'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전쟁터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를 하지만, 그 때문에 아이들을 모두 잃고 마은 것이다. 이보다 더한 모순이 있을까? 이러한 모순은 인간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이며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모순은 아니라고 브레히트는 강조한다... 브레히트는 그러한 모순을 개인적이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런 모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의 파멸과 몰락, 불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배우 자신이 극중인물에 감정이입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연기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무대 위의 인물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브레히트는 '서사적 태도'라고 일컬었다.


브레히트의 서사극은 대사나 줄거리가 아닌, 배우들의 연기나 작품구성방식 또는 연출 지문등를 통해 무대 위에서 실현된다. 이것을 '생소화 효과'라 한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각 장면들은 전통적인 극적 방식이 아닌 단순한 나열의 몽타주 기법으로 연결된다. 각 장면이 시작할 때 영사기로 제목을 무대 위 커튼 앞에 내보내고, 뒤에 이어질 장면도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리하여 관객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그에 대해 기대감을 품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브레히트의 극 사이사이에는 노래가 끼어든다. 이것 또한 무대 위헤서 벌어지는 사건을 낯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줄거리의 진행을 방해하고 관객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한다. 서사극 관객들은 극중 등장인물에 너무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냉정한 눈으로 등장인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무조건적인 이해가 아니라 잘못된 점을 찾아내 그 까닭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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