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 유홍준 지음 /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씨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생각은 이 두 문장에 집약되어 있다. 유홍준씨의 답사기는 떠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킨다. 더군다나 지금은 파릇 파릇한 봄이 아닌가?

 

2권에서 소개하고 있는 답사지는 다음과 같다.

 

1. 지리산 동남쪽 - 함양과 산청

 

농월정/박지원사적비/정여창 고택/학사루/함양상림/단성향교/단속사터

산천제/덕천서원/대원사/가랑잎국민학교/지리산

 

남명 조식(1501~72)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그의 서재였던 산천제, 남명선생을 모신 덕천서원등이 있다.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도학의 쌍벽이었다.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 남명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산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의 장엄은 천왕봉의 높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넓이와 깊이에서 나온다. 지리산 연봉이 이루어낸 계곡의 깊이를 우리는 가늠치도 못한다. 그 크기를 말하는 것도 남명선생의 대안목은 달랐다.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은 채색 장식화보다도 수묵담채화를 좋아할 것이다.

 

도대체 지리산이 뭐길래 이렇듯 사람을 홀리는 말을 남기게 하나?

 

2. 영풍부석사

 

사과밭 진입로/무량수전/대석단/조사당/선묘각/부석

 

남한 땅의 5대명찰?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이다.

한여름 온 식수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풍 부석사이다.  

 

언젠가 이 명소들을 가게되면 유홍준씨의 읊은 평을 판단해 보련다...

 

영풍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한낱 여행객, 답사객의 눈으라도 풍요로운 자연의 서정과 빈틈없는 인공의 질서를 실수없이 읽어내고, 무량수전 안양루에 올라 멀어져 가는 태백산맥을 바라보면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을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니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맑은 하늘과 밝은 햇살 같을 뿐이다.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끝에 안양루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보기 위함이다.

 

유홍준씨는 해마다 거르는 일 없이 부석사를 가고 또 간 것은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기때문이라는데, 또 궁금해 진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사무치는 마음을 갖게 했을까?

 

3. 아우라지강의 회상-평창 정선

이효석 생각/ 봉산서재/팔석정/아우라지강/ 정선아리랑/사북과 고한/정암사/자장율사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 봉평

"이즈러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줄기)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설악산은 감성을 환기시켜주는 절경의 명산이라면 지리산은 감성을 심화시켜주는 깊이감을 갖고 있는 영산이라 할 만하며,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맞닥뜨린 태백산맥의 연봉들과 거기에 어우러진 큰 여울들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의 원형질을 대하면서 받는 자기 정서의 순화작용 같은 것이었다.

 

추억의 답사처를 회상하는데 골수회원들은 대다수가 아우라지강을 으뜸으로 꼽는데 신참 초보회원들은 전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고참들은 누구하난 무엇이 그리도 감동적인지를 신출내기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안타까워하면서 저희들끼리만은 한결같이 감성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이었다. 철학자 데까르뜨가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감성적 인식이란 이성적 사유와 달라서 분명하게는 인식하지만 판연하게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했던 얘기 같았다.

 

4. 토함산 석불사

창건설화/정시한의 석굴 기행/소네 통감의 도둑질/ 일제의 해체수리

박종홍/ 야나기/ 고유섭/ 요네다/ 이태녕/ 남천우/ 김익수 / 강우방

1963년 보수공사/ 전실문제/ 광창문제/ 보존문제/ 신라역사과학관/ 유치환시 /서정주 시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의 최미이다. 거기에는 전세계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지금도 석불사의 석굴 앞에 서면 숨막히는 감동과 살 끝이 저려오는 전율로 인하여 감히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오직 침묵 속에서 보내는 최대의 찬미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석굴에 감도는 고요의 심연에서 끝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신비롭고 장중한 정밀의 종교 음악을 감지할 뿐인 것이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만(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고유섭의 [우리는 고대미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서 ) 

 

박종홍씨는 석굴암의 신비를 파헤치다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였으나, 일본인 야나기는 석굴암의 미학적 가치에 대한 예찬을 펼친다. 한국 미술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유섭씨 역시 야나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석굴암의 미학적 유산을 발견해 낸다. 요네다는 석굴암을 실측하여 그 과학성을 밝혀내었다. 이태녕교수는 석굴암 아래에서 솟아나는 샘물의 신비를 밝혀냈으며, 남천우박사는 석굴암의 습기문제 즉 결로현상을 극복하기위해서는 원형대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태녕교수와 남천우 박사는 자연과학자로 신라인의 과학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의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조각가인 김익수교수는 석굴암의 구조를 상세히 연구한 후 석굴암의 창건자 김대성의 키가 170cm라고 주장했다. 반보 강우방 선생은 본존불의 정체를 밝히는 데 일조를 하였다.

 

5. 민통선 부근-철원

한탄강/ 고석정/승일교/도피안사/궁예궁터

 

고석정은 한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의 명소로 한탄강에 임꺽정이 은신처로 삼았다가 관군에 잡혀 처형되었을 때 그의 혼이 꺽지라는 물고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다소 사실무근적인 데가 있다고 한다. 

 

철원이 내세울 미술사적 유물의 진수는 도피안사이다. 이곳에 국보 63호인 철조 비로자나불상이 있다. 이 철불은 하대신라 즉 9세기를 대표하는 두 불상중 하나이다. 그 얼굴을 보면 원만한 것도 근엄한 것도 인자한 것도 아닌, 도전적이고 씩씩하며 개성적이다. 이것이 이 불상의 큰 매력이며 신앙사적, 사회사적 의의를 보여준다. 이것은 9세기 철원지방의 호족이 지닌 자화상적 이미지이다. 왕권과 중앙귀족이 원하는 세계는 석굴암 본존불 같은 원만한 질서이다. 꽉 짜여진 틀 속에 모든 것이 종속하기를 바라는 보편성의 추구이다. 그러나 지방의 호족은 달랐다. 그 보편적 틀 때문에 자신의 인간적, 사회적 능력ㅇ르 제약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그 틀을 깨어 버려야 했다. 능력있는 자가 부처라는 이미지로 몰고 갔던 것이다. 궁예는 그런 호족의 하나로 드디어 왕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6. 운문사와 그 주변

동곡의 선암서원/대천리 수몰마을/ 운문사 입구 솔밭

가슬갑사/이목소/운문적/일연스님/비구니 승가대학

새벽예불/벚나무 돌담길/운문사의 보물들/목우정/남매지

 

운문사의 아름다움 다섯

첫째는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 항시 사미니계를 받은 200여명의 비구니 학인스님이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장엄한 아침예불이 있기때문이다.

세째는 운문사 입구의 솔밭이다.

넷째는 운문사의 평온한 자리매김이다.

다섯째는 일연스님의 삼국유사가 여기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 올라 소나무 터널이 높이 치켜든 우산처럼 드리웢니 솔밭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다. 저 청정한 솔바람 소리에 실려오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걷는 순간 나는 법열에 든 스님보다도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이든, 풀벌레 우는 소리이든, 바람에 스치는 마른 갈 대 몸 뒤척이는 소리이든, 노보라 속에 산죽이 춤추는 소리이든, 아니면 운문사 비구니의 염불소리이든 붉은 홍송은 하늘로 치솟고 소리는 낮게 가라앉는다. ...

 

운문이라! 그 내력은 운문선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운문사는 구름문을 젖히고 들어오듯 안개가 짙게 내려앉는다. 그리하여 붉은 홍송줄기가 습기를 머금어 불그스레 피어오를 때 운문사 소나무들은 더욱 아름답다.

 

청도 운문사가 보존하고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은 새벽예불이다. 운문사이 답사는 반드시 새벽예불을 관람하거나 참배하는 음악이 있는 기행으로 엮어져야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운문사 답사는 미술사 답사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기행이다.

 

 

7. 미완의 여로-부안변산,농민전쟁의 현장

부안장승/구암리고인돌/ 수성당/ 내소사/ 반계선생 유허지/ 유천리 도요지/ 개암사

고부항교/백산/만석보터/말목장터/녹두장군집/황토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그 일번지를 놓고 강진과 부안을 여러번 저울질 하였다. 조용하고 조졸한 가운데 우리에게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 주는 저 소중한 아름다움을 끝끝내 지켜준 그 고마음의 뜻을 담은 일번지의 영광을 그럴 수만 있다면 강진과 부안 모두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내소사쪽을 향아면 화려한 원생으로 단청한 일주문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는데 그 안쪽은 한치도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공간 내부를 신비롭게 또는 호기심이 나게 유도하는 건축적 사고의 한 반영이었음은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에는 알게 된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답사객은 저마다 가벼운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전나무 숲길이 반듯하게 뻗어 멀리 앞서가는 사람이 꼬마의 키가 된다. 늘씬하게 뻗어 오른 전나무 옆으로는 산죽과 잡목들이 뒤엉키어 숲길은 더욱 호젓하고 한걸음 내딛고는 심호흡 한번, 한번 고개들어 하늘을 올려보고 또 한걸음 내딛고...전나무가 터널을 이룬 내소사 입구는 내소사 자체보다도 답사객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반계 유형원선생은 조선 후기 실학의 선구이다. 당신이 이룩한 실학의 전통은 성호 이익에서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태어난 반계는 나이 30세까지 벼슬에 드는 일 없이 곳곳을 전전하다가 32세에 이곳 우반동에 은거하여 20여년간 학문에 힘쓰다 숱한 저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지금 우리는 [반계수록]26권만 알고 있을 뿐 목록으로만 전하는 경학, 지리학, 역사학, 음운학의 저서들은 그 행방조차 모르고 있다.

 

반계 선생의 실천적 사고와 민에 대한 사랑, 투철한 현실인식은 실학이라는 이름의 전통이 되어 공재 윤두서,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환재 박규수로 이어간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로 이어지고 내 이루 이름을 열거할 수 없는 재야의 학인들이 그 정신적 뿌리를 여기서 찾고 있다. 20세기 한국 지성사에서 흔들릴 수 없는 재야학자들의 종가집이 바로 여기이다. 바로 그 자리 그분의 서재 툇마루에 우리는 걸터 앉아 있는 것이다.

 

이평이라고도 불리는 배들평야에 물을 대주는 작은 댐이 만석보이다. ..."배밭이 많아서 이평이 아니고 배가 여기까지 드나들었다고 해서 그냥 배들이라고 불렀는데 일제 때 지적도를 만들면서 면서기가 그 뜻은 모른 채 이평으로 적은 것이 지금껏 그대로 내려온 것입니다. 굳이 한자로 말하자면 선입이 되는 것이죠." 이태호교수의 설명이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현장이 바로 이 곳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가리키는 노래 "새야 새야 파랑새야"에서 파랑새란 곧 팔왕, 즉 전자의 파자라는 설이 나오고 실제로 지역에 따라서는 '팔왕장군'을 노래하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절명시에서 그의 의연한 기상을 볼 수 있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운들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민을 사랑하고 의를 바로 세움에 나는 아무 잘못이 없었건만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을 그 누가 알아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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