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사고/ 레비 스트로스 지음/

 

레비 스트로스는 누구인가? 현대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샤르트르와 맞짱을 뜬 인물이라면 그의 위상을 알 수 있으련가? 그는 실존주의를 뒤이은 구조주의의 창시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또한 인류학자로서 <슬픈 열대>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는 브라질의 원주민들의 사회와 문화에 대한 그의 관찰을 보여주며 더 나아가 문명과 야만에 대한 반전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또 다른 저서인 <야생의 사고>에서는 그의 인류학자로서 그리고 구조주의자로서 입장이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멜라네시아, 아프리카등지의 원주민들의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그 특성을 밝혀낸다. 특히 토테미즘이나 외혼제, 음식금기, 명명법등의 제도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원시사회는 현대문명세계도 놀랄만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레비 이전의 서양의 인류학자들은 원주민의 문화를 멸시하며 경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서구의 합리적 과학나 역사등에 비해 볼 때 원주민들의 제도나 문화는 미신적이며 역사도 없는 미개한 것이라는 사고가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원시사회의 사고를 "야생의 사고"라고 일컬으며, 이 야생의 사고는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과 당당히 양립할 수 있는 엄격하면서도 방대한 지적인 논리체계임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미개문화를 비롯한 타문화에 대한 서구의 배타적 우월주의에 결정적인 한방을 가하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의 연구의 의의는 무엇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레비스트로스가 제시하는 다양한 미개사회의 문화나 제도,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난 야생의 사고, 그 야생의 사고의 틀이 되는 논리체계등은 나에게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으며,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책은 역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상당히 난해한 책이 아니든가? 나 역시 지금껏 읽었던 모든 책 중에 가장 어려웠었다. 심지어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 바하>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계속 읽어야만 하는가하는 갈등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두번 읽고 그 요점을 정리하던 중에, 그의 연구의 결과가 어떤 놀라운 사상으로 인도하는지, 그리고 왜 <야생의 사고>가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속하게 되는지 그 답을 희미하게 나마 인지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얻게 된 결론을 다음의 세가지로 정리해 본다.  

 

구조주의

첫째, 구조주의는 나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야생의 사고>를 통해 구조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느낌을 잡았다고나 할까? 이 새로운 개념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인식하도록 만든 것이 <야생의 사고>이다. 또한 구조주의적 접근 방법은 대상을 파악해 나가는 하나의 독특한 학문의 연구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미개 사회에 존재하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며, 심지어는 서로 대립하는 듯이 보이는 그 다양한 관습들이나 제도들에서, 그리고 때로는 단순하고 별 의미가 없어 보이며, 때로는 원형을 찾을 수 없을만큼 파편화되어 버린 수많은 조각들로 부터 구조나 논리등을 형성해 나가는 레비스트로스의 지적 능력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놀라운 연구방법과 그가 도출해낸 독특한 결론등은 이 책을 고전으로 만드는 하나의 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레비는 야생의 사고에 존재하고 있던 그 구조를 발견한 것일까? 아니면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통해 그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일까? 그의 구조주의적 방법은 충분히 그럴만한 창조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인데...실상 레비스트로스도 <야생의 사고>에서 서양의 과학이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을 발견한 것인지, 아니면 과학적 방법으로 그러한 것을 만들어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던가? 사실 코페르니쿠스의 과학혁명이 있기 이전 세계는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자연법칙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가? 또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과학이 설명하는 자연의 모습은 본질적인 자연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에 따라 달려져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 물리학이나 과학이 제시하는 자연상이 절대 본질의 자연상이라고 단정지을 순 없을 듯 하다. 결국 과학은 그 나름의 방법에 따라 세계와 자연을 설명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현상을 넘어 본질을 탐구하려는 과학적 시도와 철학적 노력은 지속되어야 하겠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역사관

둘째, <야생의 사고>의 뒷 부분은 샤르트르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의 역사관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이전에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상당히 놀랐던 것이 기억난다. 역사란 '역사가가 선택한 과거의 사실'들의 집합이라는 기본적 사실에서 부터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라는 카의 정의에 이르기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나의 생각의 한계를 깨뜨리게 하기에 충분하였었다. 그런데 <야생의 사고>는 역사를 보는 또 다른 특이한 시각이 있음을 보여주며 생각의 또 다른 지평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레비 스트로스는 역사가 있는 사회와 역사가 없는 사회를 대비시켜 논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문자가 없는 사회는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회를 형성했으며, 반면에 문자를 가진 사회는 역사를 가진 사회로 발전하였다. 그는 역사없는 사회를 '차가운 사회'라고 일컬으며, 반면에 역사를 소유한 사회를 '뜨거운 사회'라고 부른다. 레비스트로스는 사회내의 갈등이나 그로 인한 투쟁등을 '열'이라고 비유하면서, '차가운 사회'는 그러한 열이 없는 사회로서 발전이 없이 정체되어 있는 사회라고 말을 한다. 반면에 '뜨거운 사회'는 그 사회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 열이 동력으로 작용하여 발전을 가능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가진 사회 - 뜨거운 사회'와 '역사를 가지지 않은 사회- 차가운 사회' 둘 중 어느 것이 우월한가? 다른 말로 하자면 '발전하는 사회'와 '정체된 사회'중 어느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 문제에 있어 레비스트로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 생각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즉 역사없는 사회 즉 '차가운 미개 사회'가 '뜨거운 사회'에 비해 결코 그 사회의 질이나 사고의 깊이에서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차가운 사회'가 '뜨거운 사회'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준다. 

 

그는 역사가 있는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드러낸다. 역사라는 집합은 무한집합이라는 것이다. 즉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 또는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의도나 목적에 따라 수없이 많은 역사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필시 권력에 의해 역사가 오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무한집합내의 각 원소들은 긍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다. 실례로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사는 역사의 긍정적인 부면으로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인식 역시 각 민족이나 사회들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키고 더 나아가 차이에서 파생된 차별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차별은 근본적으로 평화보다는 갈등과 투쟁으로 이끄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통해 보면 힘있는 자들이 역사를 통제하며 그것을 조작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그들의 권력과 소유를 정당화했던 사례들을 무수히 관찰할 수 있지 않은가? 역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유용한 도구가 되어 왔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역사를 가지지 않은 야생의 사고는 오히려 현대 문명사회보다 권력의 폐해로 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사회가 아닌가? 그리고 차가운 사회가 뜨거운 사회보다 더 평등한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여지가 많지 않은가? 그러한 야생의 사고야말로 보편적 인류가 오랫동안 염원하고 추구하였던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훨씬 유용한 사고의 형태가 아닐까?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를 통해 이와 같은 역사관을 드러낸다. 

 

역사가 없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나에게 꽤 충격이었다. 더구나 그 역사가 없는 사회가 역사가 있는 사회에 비해 그 논리체계나 유용성등에 있어 열등하지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우월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지적 충격이었다. 

 

타문화 사회에 대한 존중

세째, 미개사회라 하더라도 그들의 제도나 삶의 방식은 존중받을 만한 논리와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타자의 관점을 무시하는 자기본위의 생각이나 관점이 얼마나 편향적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야생의 사고가 지적 논리적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은, 편견의 울타리를 깨고 개방적인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문화와는 다른 생각이나 문화 역시 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은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야생의 사고를 통해 얻게 된 생각들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서, 어려운 책을 읽는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 도대체 저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용이 난해할 수록 더욱 그러한 질문을 마음에 간직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은 반드시 두번 이상 읽기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즉 첫번째의 읽기는 저자가 말하고 싶은 사상을 파악하는데 의미가 있다. 첫번째 읽을 때는 세부적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냥 끝까지 읽어 나가는 것이다. 끝까지 읽다 보면 저자의 생각을 어렴풋하게 나마 이해하게 된다. 어차피 그의 생각들이 책의 요소 요소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두번째 읽기이다. 이 때에는 세부적인 면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세부사항들이 주제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생각하며 읽는 것이다. 이 과정은 즐거운 과정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생각의 흐름, 저자가 특정한 점을을 말하는 이유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때문이다. 이 때야 말로 '아하!'하는 감탄사가 튀어 나오는 때이다. 깨달음의 즐거움이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내용을 정리하여 글로 남기는 것이 마지막 단계이다. 세번째 읽을 때는 전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주요내용만을 읽어나가는 것이다. 첫째, 둘째 읽기에서 표시해 놓은 주요점들만 읽어가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때에는 이러한 요점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이 이해를 넓히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어려운 책을 읽고 ...물론 100%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레비스트로스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었다는 느낌은 참 좋다. 어려운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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