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의 칼날  (찰스 길리스피 지음/이필렬 옮김/새물결)

제1장 완전한 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낙체의 법칙 "자연스런 운동에서 통과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갈릴레오는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일상 언어 및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변수 x가 포함된 방정식이나 함수로 나타나는 대수학을 편리하게 사용한다. 하지만 그러한 도구가 없는 상태에서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명시하고 증명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번거로운 것이었을까? 위의 식도 대수적으로 나타내면 S=1/2*gt^2처럼 쉽게 나타낼 수도 있는데...어쨌든 갈릴레오가 이 낙체의 법칙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기하학적 도형은 자연을 수학의 언어로 표현하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갈릴레오는...수학적 기법과 철학적 주장이 온통 뒤얶여 있는 곳에서 물리학의 기본 요소를 골라내는 자연에 대한 판단력과 직관과 감각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것은 수리 물리학자가 단지 토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상황을 일변시켜버린 기법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그리스 과학에서 근대 과학으로

"과학은 그리스 철학의 유산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인의 사변적 천재성은 합리적 우주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질서 정연한 우주였다. 그리고 그 법칙은 인간 사고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성에 의해 모든 만물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신화에서 지식으로의 그리스인의 전이는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의 기원이기도했다. 실제로 자연에 관한 지식은 17세기의 과학혁명을 통해 분리되기까지 철학은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는 자연철학이라고 불이었다. 

 

그리스 과학은 근대 과학과는 그 성격에 있어 차이가 있다. 그리스 과학은 주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순수하게 지적이었다. 그것은 정신의 내부에서 출발하여, 보편성과 이성을 만족시키는 능력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과학은 실험이라는 근대 과학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스 과학의 도구는 이성이었다. 

 

이에 반해 근대과학은 비개성적이고 객관적이다. 출발점을 자연에 두며, 새로운 현상을 예측하고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가능하면 수학적으로 표현하고 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합리성을 내던지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계량적이고 경험적이다. 근대 과학은 자연을 이해함과 동시에 통제하려고 든다.

 

르네상스시대에 기성 권위에 대한 반역을 통해 근대 과학이 등장했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것은 중세시대의 과학을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허물어 뜨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플라톤의 힘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형이상학적이었으며 추론적이었다. 그것은 자연현상을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고도로 정교하게 관념화하였다. 상식에 의해서 파악된 경험에서 출발하여, 정의, 분류, 연역을 거쳐서 논리적인 증명에 도달하는 방식의 추론이 그것의 기초이었다. 이것의 무기는 실험과 방정식이 아니라 삼단 논법이었다.  이것의 목표는 무수한 종속적 수단들이 어떻게 질서라는 커다란 목적에 들어맞게 되는가를 보임으로써,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이고 미세한 관찰, 종에 의한 형상의 분류, 부분이 어떻게 전체에 봉사하는가에 대한 분석...이러한 것들은 19세기까지는 생명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기술이라고 불렸던 박물학에 유용한 것이었다.

 

플라톤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

플라톤은 과학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과학자에게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이데아론은 사물의 세계에서 진리를 제거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에 부정적이지만, 이상적인 단순성을 수학적 현실로 확인하는 점에서는 과학적 아이디어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안타깝게도 우주론과 물리학은 단일 과학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우주론은 달 저편에 있는 천체의 영역에 관여하고, 물리학은 지상의 세계에 관계하는 것이었다. 우주의 물리학과 지구의 물리학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케플러와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상의 운동은 불완전한 것이었으며, 오직 하나의 운동만이 완전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천체의 운동을 지배하는 원운동이었다.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연의 본질은 수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에게 수는 사물의 형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실재하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것이었다. 수에는 완전하고 영원한 구조가 존재한다고 믿었기때문이다. 현대물리학자중에도 우주의 본질은 구조라고 이야기하거나, 또는 정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질의 근본이 비물질이라는 사상은 고대나 현대나 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불가능한 수리물리학

그리스 철학 전통의 두 위대한 인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리물리학 즉 수학과 물리학의 결합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수학과 물리학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이상적이며 영속적인 수학의 세계는 그의 이상 세계에 실재하는 진실이었으며, 물리학은 불완전한 사물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서로는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수학이란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었으며, 물리학이란 현실적인 것을 취급하는 것이었다. 성질, 형상, 미묘한 특성들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는 수학을 통해 표현할 수없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현실 세계는 미묘하여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으며 특히 양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법칙등을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기하학과 물리학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1700년 후 그의 가장 뛰어난 제자 갈릴레오가 나타났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정역학은 동역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사고  

고대 그리스 전통의 물리학으로 부터의 과학 혁명은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하여 뉴턴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뉴턴의 중력 법칙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분리되어 있었던 천체와 지상의 지식을 연결하여 운동하는 물체에 관한 단일한 이론 과학을 완성한 때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의 지동설과 천동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은 행성의 역행운동과 같은 불규칙성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것은 태양 중심 모델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태양이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믿었으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310~230 BC)도 이러한 설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당시의 천문학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85~165 AD)의 완전한 기하학적 천문학을 받아들었다. 이는 지구가 정지해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이른바 천동설이다. 그는 주전원, 이심원, 대심이라는 세가지 구조를 사용한 원의 조합으로 천체의 겉보기 운동을 합성해 내었다. 이것은 고대 로마로부터 16세기까지의 역(달력)의 계산을 뒷받침하는데도 충분한 기능을 함으로 당시의 천문학자들에게 만족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1543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출판했다. 이 책에 들어있는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프톨레마이오스까지의 낡은 형식을 그 근본원리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학설은 태양계의 배치를 바꾸어 버렸다. 태양계의 중심에 태양이 있고,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하루에 한바퀴씩 돌게 만들었으며, 일년에 한번 태양주위를 돌게 만들었다. 그의 사상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그의 태양중심설은 근대물리학으로의 위대한 혁명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적 발상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상식의 흐름에 대항하여 얼마나 강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했는가는 고려한다면 그의 사상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지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대는 관성의 원리도 운동의 합성도 알려지지 않은 시대였다. 만일 지구가 움직인다면 우리는 공중으로 팽개쳐지는 것처럼 느껴야 할 것이다. 탑위에서 떨어지는 돌은 탑 서쪽에 떨어져야 하며, 서쪽을 향해 발사된 포탄은 동쪽으로 발사된 포탄보다 멀리 날아가야 한다. 분명한 경험과 우리가 느끼는 직관적인 정지감은 코페르니쿠스의 생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쿠스의 경우에는 이성이 오감을 제압하여 그 주인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 나는 찬탄을 금할 길이 없다"라고 갈릴레오가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신념

코페르니쿠스는 고집쟁이이다. 아리스타르코스적 생각의 단순성과 우아함을 깨달은 이후, 그는 수많은 모순에 압도되면서도 기가 꺽이지 않고, 온갖 곤란에 직면하면서도 그의 생각을 고수했었다. 사실 그의 연구가 완성되었지만 그 중심적인 내용의 멋진 단순성을 입증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의 체계는 수학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으며 아주 틀린 것도 많았었기때문이다. '과학에서 이론이 수행하는 합리화의 역할 및 사물에 궁극적 이치가 들어 있다는 신념'의 힘을 코페르니쿠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우월성은?

그 당시 코페르니쿠스체계의 우월성은 어디에 있었는가? 당시의 학문적 전통은 태양 중심설과 지구 중심설은 기하학적으로 교환 가능한 것이었으며, 특별히 태양 중심설을 취해야 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다는 쪽이었다. 천체의 위치를 예측하고 역을 만드는 등의 일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보다 우월한 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 체계의 우월성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인 것이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가 보여주지 못했던 장대한 규칙성을 제시한다는 점이었다. 그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은 데이터가 완성된 미래에 가능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의의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물리학의 발달에 기여한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이다. 또한 상상력의 날개를 펴도록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지구가 중심이 아니라면 세계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 것일까? 우주의 둥근 지붕에 별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얼마나 깊은 공간에 놓여있을까? 이런 생각은 공간과 세계에 무한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용감한 상상력은 비극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의 무한한 우주에 대한 용감한 주장은 그를 화형으로 인도하고 말았다. 

 

케플러의 법칙

케플러는 "나는 코페르니쿠스의 견해가 진리임을 고백하며, 활홀하게 그 조화를 명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보완할 세가지 법칙을 제안한다. 첫째, 행성은 타원의 한 초점에 놓여있는 태양 주위를 타원궤도를 그리며 돈다. 두번째 법칙은 행성의 속도가 변하더라도 일정하게 유지되는 양이 있다는 것이다. 행성이 공전할 때, 태양과 행성을 이은 가상의 선이 휩쓰는 면적은, 같은 시간에 같은 면적만큼 움직인다는 것이다. (1609년 <새로운 천문학>) 세번째 법칙은 행성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 부터의 평균거리의 세제곱에 비례한다.(1619년 <우주의 조화>)

 

케플러의 혁명적 발상

케플러에 이르기 전까지는 원은 우주 질서의 기초였으며, 사물은 원위를 영원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케플러의 경우에는 상상력, 사실에의 몰입, 좀 더 깊은 질서에의 신념이 도대체 어떻게 배합되어 있었기에 천문학 창시 이래의 관습을 깨고 태양계를 그 참 형태로 끌어내서 원의 완전성보다 더욱 추상적인 수학적 기초 위에 놓게 되었을까? 쉽게 말하자면 어떻게 행성이 타원궤도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유연성으로 가득한 위대한 인간 정신의 공적이며, 참신함이란 점에서 이와 비견될 수 있는 것은 상대성 이론뿐이다.

 

케플러와 티코 브라헤의 만남

케플러가 티코 브라헤를 만난 것은 과학 역사상 가장 잘된 만남의 하나였다. 티코 브라헤는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자연에 관해서 관측하고 실험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론적 통찰이라는 고도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믿지 않고 있었다. 티코는 케플러에게 고도의 이론적 능력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귀중한 관측 결과를 사용하게 하여 티코 학설을 수립하도록 케플러를 구속하려 했다. 하지만 1600년 그들의 만남이 있은 1년 후 티코는 사망하고 케플러가 그의 데이터를 물려 받았다. 이 데이터에서 케플러의 법칙이 만들어 진다.

 

어떻게 타원 궤도를 발견하게 되었을까?

케플러는 티코의 숫자들에 근거하여 화성의 궤도에 대해 연구하면서, 계산에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면서 적어도 일흔 번 이상 해 가며 5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그는 올바른 값을 얻었다고 생각했으며, 화성의 궤도를 증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관측된 위치와 이론에 의해서 예상된 위치 사이에 8분 정도의 각도가 어긋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아주 적은 차이였다. 티코 이전이라면 그것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케플러는 이 8분을 해결하기 위해 또 다시 6년을 연구하며 보냈다. 8분의 각도를 가지고 6년을 희생하며 연구했다는 것만큼 케플러의 양심을 증명해 주는 것은 없다. 이 8분이 원을 깨뜨리는 결함이라는 것이 판별되었다. 이리하여 케플러는 화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과학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은 왕왕 커다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소한 모순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타원궤도에 대한 또 다른 증거들

그의 발견중 타원궤도를 증명하는 것이 몇개 더 있다. 그가 생각한 달걀형 궤도와 완전한 원사이에 생긴 초승달 모양의 최대폭은 반지름의 0.00429배이며, 화성에서 태양으로 그리고 화성에서 궤도중심에 그은 선분이 이루는 최대각이 5도 18분이라는 것이다. 이 각의 시컨트 값이 1.00429라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 관계는 타원을 정의하는 조건중 하나였던 것이다.

 

케플러 제3 법칙의 발견의 배경

그는 타원의 불합리성에 화가 치밀었다. 그의 우주의 기하학적 구조는 미숙하였으며 그의 타원이란 결국 원에 대한 보잘 것 없는 대용품이었기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타원보다 더 깊이 내재한 사물의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세계의 조화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처럼 여러 방식으로 시도되었다. 그리고 결국 제3법칙에 도달하게 된다. 행성의 운동과 거리의 관계, 태양계의 운동과 구조의 관계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나의 책은 백 년 동안 독자를 기다려야 할 지 모른다. 신은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명상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까지 6천년이나 기다리지 않았던가."(케플러 <우주의 조화> 제3법칙 서문)

 

갈릴레오의 혁명

갈릴레오의 객관성은 어떻게 표출되는가?

갈릴레오의 플라톤주의는 피타고라스적 전통보다는 오히려 아르키메데스적 전통을 계승햏다. 그는 우주의 구조에서 감각성, 경건한 윤리, 교훈등의 애매한 요소들을 제거하여, 연구의 대상으로 유클리드적 차원의 견실하고 곧은 뼈대만을 남겼다. 그는 물체의 제1성질과 제2성질을 구분했다. 길이, 넓이, 무게, 모양등 수량화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인 성질이라 정의하고, 색, 맛, 냄새, 감촉등은 물질에 속한 본질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지각 양식으로 제2성질을 이룬다고 정의하였다. 그 차이는 객관과 주관의 차이이다.

 

갈릴레오의 독창성과 혁명성은 어디에 있는가?

갈릴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지니고 있던 주관성 즉 목적론적 물리학을 완전히 바꾸어 객관적 물리학으로 만들었다. 갈릴레오의 세계는 공감보다는 오히려 측정에 의해 파악된다. 갈릴레오는 그의 낙체의 법칙에서 시간을 순수한 물리 현상의 매개 변수로 취급하여 운동을 수량화하였다.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이루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 거리와 속도에 관한 일반적 표현을 발견하려 시도하였고, 결국 속도를 낙하시간과의 관계로 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자연의 책은 수학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갈릴레오가 윤리에 미친 부정적 영향

갈릴레오는 자연의 모든 것을 크기, 형, 수, 운동이라는 제1성질로 환원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주관적인 것으로서 제2성질로 분류했다. 이리하여 과학과 윤리학 사이의 치명적인 불화가 시작되었다. 과학의 객관화는 자연에의 모든 목적론적인 의미를 제거함으로 세계는 허무주의에 노출되었다. 과학자는 측정을 너무 좋아하는 나머지 도덕적 책임을 스스로 해제했고,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행사하지 않게되었다. 과학자의 성격이나 윤리에 대한 판단으로 부터 그들의 업적에 대한 판단을 분리하라는 요청을 받는 시대는 갈릴레오로 부터 시작되었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통해 하늘을 관찰하면서 천체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되었다. 구멍투성이의 달표면, 태약의 흑점등...그리고 토성의 위성들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의 정당성을 추론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보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다. 케플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라고 말했는데, 이는 어느 스콜라 철학자들이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것을 거절했을 때의 일이었다.

 

갈릴레오와 교회와의 반목의 원인

갈릴레오와 교회의 분쟁은 종교의 과학에 대한 원천적 적의나, 진리와 지식 사이의 반목에서 유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자와 세상물정에 밝은 사람들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에 기인한 것이었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그것이 거론되길 원치 않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어떻게 갈릴레오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신앙과 도덕과 문명의 질서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성직자들이, 상식과 정통 종교에 대항하여 기존 자연철학의 구조를 뒤엎으려 하는 갈릴레오의 정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추기경과 수사들은 수리적 추론에는 완전히 무지했으며,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힘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갈릴레오의 한계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갈릴레오도 그와 같은 경향을 나타냈다. 갈릴레오는 천체와 지상을 단일 물리학으로 결합시키는 수리 과학을 수립하려는 열망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대신할 통일적 우주상을 얻으려는 갈망이 있었다. 갈릴레오는 운동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이 지속된다고 하여 보존법칙과 힘의 법칙으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뉴턴의 제1법칙과 고전 동역학의 기초가 되는 관성의 원리를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완전한 수리화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그 역시 질서 쪽을 택했기때문이다. 그리스에서 과학의 기능은 우주를 단일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설명하는 것이지, 단지 어떤 특정한 현상만을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었기때문이다. 설명가능한 우주, 우리에게 적합한 우주는 유한해야 했다. 하지만 관성의 법칙은 무한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물체는 무한히 앞으로 전진할 것이었기때문이다. 갈릴레오조차 앞에 펼쳐져 있는 무한성과 대결하지 못했다.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운동은 관성 운동이며, 상승도 하강도 하지 않은 지구 중심으로부터의 등거리 운동, 즉 원운동이었다. 지구는 이미 우주의 중심은 아니지만 여전히 운동의 중심이긴 했다.

 

갈릴레오는 이 원을 타파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낙체의 법칙에는 투사체의 포물선 궤도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타원궤도를 논한 케플러의 <새로운 천문학>도 가지고 있었다. 타원궤도에서 행성을 떠 받치고 있는 물리적 힘은 투사체의 포물선을 만들어내는 힘과 동일한 것이며, 그 어느 것이든 원추 곡선이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갈릴레오가 원했던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승리지, 혼돈이 아니었기때문이다. 중력이 없다면 직선적인 관성을 가진 물체는 일직선으로 무한히 날아 갈 것이다. 만약 갈릴레오가 원을 포기했다면, 그리고 케플러의 업적을 생각했다면, 그는 관성을 직선상으로 보았을런지도 모르며 천체와 지구를 중력으로 연결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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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관념이 깨어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는 과학혁명에 불을 붙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적 전통에서 이어져 온 "완전한 원"이란 개념안에 갇혀버렸다. 위대한 혁명적 발상의 소유자들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었다. 단 케플러만이 화성의 궤도를 알아내기 위한 5년, 그리고 실제로 나타나는 궤도와 이론상의 궤도사이의 8분의 오차를 설명하기 위한 6년의 연구 끝에 '완전한 원'을 대신하는 타원을 발견했다. 데카르트에 이르러서야 영원한 원운동은 직선상의 운동개념으로 발전하며, 무한을 향한 움직임을 상상하게 된다. 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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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모순을 뛰어넘는다. 어떤 모순들은 지식의 불완전함에 유래한다.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완전한 지식을 향한 걸음이다. 오류는 진리를 향한 첫 발걸음을 재촉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모순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시도로부터 발전을 이끌어내는 동력이다.  모순 뒤에 숨어 있는 진리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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